일본의 노골적인 병합에 대항한 조선의 밀사…반세기만에 나라 살려
올해는 대한민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은 지 63년이 되는 해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동맹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950년 당시 미국이 처음부터 한국과 한미동맹을 체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설득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극적으로 체결하여 흔들림 없는 안보의 기틀을 놓는데 성공했다. 1950년 6.25전쟁부터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유경제원은 지난달 20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한미동맹-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패널로 나선 복거일 소설가는 “1904년 일본의 조선 병탄 의도에 대항한 대한제국 조정은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우남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여 미국에 파견했다”며 “당시 미국의 외교적 수사에 실질적 의미를 부여했던 조선 조정은 국제 정세와 관행에 어두웠다”고 밝혔다. 복 소설가는 “미국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밀약의 존재를 알 길이 없던 이승만으로서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임무였다”고 지적했다. 

복 소설가는 “1954년에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본질적으로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우호 조항'을 외교적 수사에서 실질적 조항으로 바꾼 셈”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이승만이 1904년에 조선이 부여한 임무를 꼭 반세기 만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이룬 것”이라고 강조했다. 복 소설가는 “이승만은 혼자 힘으로 연합국 전체를 상대로 해서 이룬 것”이라며 “우남 자신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자신의 삶에서 지닌 뜻을 그렇게 인식했다”고 언급했다. 아래 글은 복거일 소설가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한 토론문

권혁철 박사의 발표문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내력과 중요성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다. 6.25전쟁이라는 맥락 속에 이 조약을 정치하고 그 뜻을 살펴서,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과 지도력을 돋보이게 기술했다. 나로선 이 조약이 우남의 일생에서 차지하는 뜻을 간략하게 살피려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대한제국 조정에선 미국의 적극적 도움을 받으려는 노력이 나왔다. 당시 조선 조정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우호 조항(amity clause)'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 조항은 조약의 제1조를 뜻한다.

嗣後 大朝鮮國君主 大美國伯理爾天德 並其商民 各皆 永遠 和平友好. 若 他國有何不公輕藐之事 一經照知 必須相助 從中善爲調處 以示友誼關切

There shall be perpetual peace and friendship betwee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king of Chosen and the citizens and subjects of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

당시 외교 관행으로는 이런 조항은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 정세와 관행에 어두웠던 조선 조정은 그 조항이 실질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우남이 밀사로 선정되어 미국에 파견되었다. 1904년 11월 4일 우남은 제물포에서 기선에 올랐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가는 외교 문서들을 지녔지만, 핵심적 문서는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과 의정부 찬성 한규설(韓圭卨)이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였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90년까지 주한 미국 공사로 일해서 두 사람과 친교가 있었다. 이승만은 12월 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이어 기차로 12월 31일에 워싱턴에 닿았다.

   
▲ 1954년에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본질적으로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우호 조항'을 외교적 수사에서 실질적 조항으로 바꾼 셈이 됐다./자료사진=연합뉴스


1905년 2월 우남은 딘스모어 상원의원과 함께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우남은 헤이에게 그가 주도한 중국의 '문호 개방 정책'을 한국에도 적용해달라고 요청했다. '문호 개방 정책'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모든 나라들이 동등한 기회를 누리고 중국의 영토적 및 행정적 일체성은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정책으로 중국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요청을 듣자, 헤이 장관은 "조약에 따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1905년 여름 하와이의 조선인들이 독립 운동 단체를 만들고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이 독립하도록 도와 달라고 청원하기로 했다. 마침 일본으로 가던 윌리엄 태프트 전쟁장관이 하와이에 들렀다. 조선 독립 운동가들은 태프트를 환영하면서 자기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태프트는 선뜻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래서 우남과 윤병구 목사가 대통령이 여름 휴가를 보내던 오이스터 베이로 가서 소개장과 청원서를 대통령 비서에게 내밀고 면담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튿날 대통령 별장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긴장이 되어 별장의 응접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들어왔다. 그들은 당황해서 자기 소개도 제대로 못하고 선 채로 청원서만 불쑥 내밀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나를 찾아주니 기쁘오. 나도 당신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소.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 채널을 통하기 전에는 처리하기 어렵소. 당신네 공사를 시켜 국무부에 제출하시오'라고 말했다. 우남과 윤병구는 크게 고무되었다. 공사관을 통해서 제출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직 '외교적 수사'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들이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조선 공사에게 청원서를 국무부에 제출해달라고 했다. 공사는 '정부 훈령이 없는 한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이미 주미 조선 공사관은 일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임무였다.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른 태프트가 써준 소개장 덕분에 우남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때 태프트가 일본에 간 것은 일본과 미국의 세력권을 획정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이겨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필리핀을 넘보는 것을 걱정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래서 태프트 전쟁장관과 가쓰라 타로(桂太郞) 수상은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기도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확약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점에 대해 합의했다. 그런 밀약이 있었다는 것을 우남은 알 길이 없었다. 그 밀약은 거의 스무 해 뒤에야 공개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병탄할 때, 미국 대통령은 바로 윌리엄 태프트였다.

   
▲ 1954년에 발효된 한미동맹을 통해 우남 이승만은 1904년에 조선이 부여한 임무를 꼭 반세기 만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이루었다.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는 수행했지만, 실질적 성과 없이 귀국하게 되자, 우남은 고민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남아서 공부하기로 되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린스턴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에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본질적으로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우호 조항'을 외교적 수사에서 실질적 조항으로 바꾼 셈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우남은 1904년에 조국이 부여한 임무를 꼭 반세기 만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이룬 것이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저항하는 연합국 전체를 상대로 해서 이룬 것이다. 우남 자신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자신의 삶에서 지닌 뜻을 그렇게 인식했다.  

이처럼 나라를 살리기 위한 임무를 반세기 만에 멋지게 이룬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다. 자연히, 우남 자신의 삶도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이야기로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우남은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때 우남은 79세였다.

그러나 우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뒤로 그는 빠르게 노쇠했고 그의 통치엔 그늘이 덮이기 시작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탄식했다.

사람들의 악행들은 청동에 새겨져 남는다; 그들의 덕행들을 우리는 물로 쓴다.
Men's evil manners live in brass; their virtues We write in water.  

그래서 우리는 '이승만' 세 글자를 물로 썼다.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