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
올해는 대한민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은 지 63년이 되는 해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동맹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950년 당시 미국이 처음부터 한국과 한미동맹을 체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설득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극적으로 체결하여 흔들림 없는 안보의 기틀을 놓는데 성공했다. 1950년 6.25전쟁부터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유경제원은 지난달 20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한미동맹-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패널로 나선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안보를 담보 받기 위한 이중 삼중의 안전책을 강구했다”며 “한미동맹은 이에 대한 결과며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과 강국으로의 초석을 닦는 발판이었다”고 평했다. 김 편집장은 “1954년 11월 17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후속 조치로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서명하여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손에 쥐게 되었다”며 “의사록의 주된 내용은 유엔군 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고, 미국은 한국에 1955년도 회계연도에 4억 2000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 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 편집장은 “미군의 주둔과 지원은 국방비 절감효과를 가져와 1970년대 전반기까지 GNP에서 국방비를 단지 4% 정도만 사용하며 경제개발우선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했다”며 “이를 발판으로 대한민국은 산업화에 매진해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성취해 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 편집장은 “오늘날 우리가 원조를 받던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한미동맹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김용삼 편집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한미상호방위조약은 ‘神의 한 수’였다

클린턴 로시터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위기로 전쟁, 반란, 그리고 경제위기를 꼽는다. 건국 직후 이승만 시대는 국민 대다수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세 가지 위기가 복합된 형태로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이승만 시대에 한국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을 모델로 하는 대륙문명 지향 국가에서 벗어나 미국을 모델로 하는 해양문명 지향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미국식 모델이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해양세력으로서 대외적으로 개방하고 교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승만은 때때로 미국의 정책노선을 비판하며 미국과의 대결을 서슴지 않았지만,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미국에 살면서 미국식 모델의 우수성을 확신했기에 대통령이 된 후 건국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때 미국식 모델을 참고했다. 나아가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을 통해 미국의 발목을 잡아두고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등, 용미(用美)의 지혜를 발휘하여 미국과 교류와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근대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따라서 ‘한강의 기적’의 시발은 미국의 패러다임을 따르고자 했던 이승만 시대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휴전조약과의 비교

김충남과 문순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국의 안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는 20년 뒤 베트남과 비교할 때 명백해진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의 구정공세 때문이다. 구정을 맞아 공산 월맹이 기습공격을 가하여 사이공(현 호치민)에 위치한 주월 미국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미군이 즉시 반격을 가해 9만 명 이상의 월맹군이 사살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미국 대사관마저 점령당하니 앞으로 지긋지긋한 이 전쟁은 아무리 싸워도 끝도 안 보이고 대내외적 명분을 잃었던 것이다. 

덕분에 거의 승리한 전쟁에서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이 1968년 5월 10일이다. 미국과 월맹 사이에 진행되던 휴전협상에 월남이 참여함으로써 1969년 1월 15일부터 회담은 미국과 월남, 그리고 공산 측에서는 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과 월맹의 4자(者)회담으로 확대됐다.  

   
▲ 우남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을 통해 미국의 발목을 잡아두고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등, 용미(用美)의 지혜를 발휘하여 미국과 교류와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근대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의 '한강의 기적' 시발은 미국의 패러다임을 따르고자 했던 이승만 시대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의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회담의 확실한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키로 했다. 이 돈으로 피폐해진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 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한편 월맹에서는 인질 형식으로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이것도 믿지 못해 영국·소련 ·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을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12개국이 담보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이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北爆)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1973년 1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였고, 미군은 3월 29일에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한국군도 철수했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를 월남에 양도,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적어도 휴전체제가 10년은 갈 것으로 낙관했다. 

그런데 파리 평화협정은 완전 엉터리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됐을 때 월남의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성의 곳곳에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긋지긋한 월남전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남 영토 곳곳에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휴전협정을 체결해버린 결과 이런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덕분에 월남 정부는 전체 월남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월남 총 인구의 90.5%를 지배할 뿐이었다. 나머지 영토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지역이었고, 나머지 4.5%는 공산 측 지배지역이었다. 

이러한 공산군 점령지뿐만 아니라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여 암약하고 있었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 인민혁명당원 4만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에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낙관했다. 월맹군이 도발하면 즉시 미국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월맹에 대한 경제원조도 중단하며, 월등한 월남군의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1975년 1월 초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레준 서기장은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며 남침전쟁 결론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당시 티우 대통령은 미국과의 방위조약을 낙관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리더십 부재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월남에 대한 방위조약을 수행할 엄두를 내지 못해 월남은 패망했다. 방위조약에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한국과 미국 간의 인계철선 역할 등)이 부재한 데 따르는 업보였다.

덕분에 월남은 월맹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1975년 3월 10일 이후 불과 50일 만에 허망하게 패망하여 공산 통일되고 말았다. 

   
▲ 이승만 시대에 한국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을 모델로 하는 대륙문명 지향 국가에서 벗어나 미국을 모델로 하는 해양문명 지향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자료사진=연합뉴스


이승만의 심모원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인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군사력 확보였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육해군을 합쳐 1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이 망할 무렵인 1907년 대한제국의 총 병력은 중앙군 4215명, 지방군 4305명, 헌병대 265명 등 총 8785명에 불과할 정도로 군사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미국은 우리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미군을 전원 철수하고 한국군 병력 규모를 육군 6만5천, 해안경비대 4천, 경찰 3만5천 명으로 묶었다. 또한 미국은 이들 기관에 혹시라도 모를 북진통일을 봉쇄하기 위해 경무기만을 공급했다.

주한미군 철수로 인해 공산침략의 위험에 노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끌어들여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하여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안전보장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런 구상에 의해 아시아 국가들에게 ‘태평양동맹’의 결성을 제안했다.

이승만의 제안에 중국 대륙에서 밀려날 형편에 있던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과 필리핀의 키리노 대통령 등이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다. 태평양동맹의 필요성을 절감한 장개석은 이승만의 요청을 받고 1949년 8월 6일 방한하여 진해에서 이승만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아시아에서 군사적 집단안보체제 결성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반대했고, 인도의 네루 수상도 반대하고 나섰다. 덕분에 1950년 6·25 발발 직전 한국군은 육군 9만 6140명, 해군 7715명, 공군 1970명이었다. 장병들은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고, 소총과 박격포 등 소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6‧25가 발발하자 미국을 비롯하여 자유 우방 16개국이 유엔군으로 참전했다. 3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한국이 휴전협정에 동의하자 미국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국 미국이 자국의 국익에 의해 언제든 한국을 버릴 수도 있다고 보고, 한국의 안보를 담보 받기 위한 이중 삼중의 안전책을 강구했다. 이승만이 미국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1954년 11월 17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후속 조치로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서명한 것이다. 

1954년 11월 발효된 상호방위조약과 더불어 같은 달 후속 조치로 체결된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의해 이승만은 태평양동맹을 통해 얻으려 했던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는 “상호 합의에 의해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외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주한 미군 제2사단이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 배치됐다. 

이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이 자동 개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이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 없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참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의사록의 주된 내용은 유엔군 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 사령부의 작전 지휘권 하에 두는 조건 하에 미국은 한국에 1955년도 회계연도에 4억 2000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 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키로 했다. 이 액수는 후에 1억 달러가 추가되어 총 8억 달러로 늘어났다. 동시에 한국군 10개 예비사단 추가 신설, 79척의 군함과 100대의 제트 전투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단군개국 이래 최대 최강의 군사력인 75만 대군을 보유한 아시아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 한미동맹은 이후 6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오고 있다. 한미동맹이 가장 성공적인 동맹이라고 평가 받는 이유는 동맹의 목적인 '전쟁 방지'에 성공했다는 점이다./자료사진=연합뉴스


1954년 당시 우리나라의 수출총액이 2400만 달러였는데, 연간 총 수출액의 34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54∼1968년 미국이 한국에 지원한 경제·군사 원조 액수는 약 224억 달러(약 24조원)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됐다.

미군의 주둔과 지원은 국방비 절감효과를 가져와 1970년대 전반기까지 GNP에서 국방비를 단지 4% 정도만 사용하며 경제개발우선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했다. 이를 발판으로 대한민국은 산업화에 매진해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성취해 낼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한미동맹이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은 이후 6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오고 있다. 한미동맹이 가장 성공적인 동맹이라고 평가 받는 이유는 동맹의 목적인 ‘전쟁 방지’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또 동맹을 맺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만약 한미동맹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았다면 한국처럼 극도로 안보가 불안한 나라에 어느 누가 투자를 하겠다고 선뜻 나섰겠는가.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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