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신화 깨려면 '문단 최고존엄'부터 제거하라
예로부터 한 시대의 문제를 꼬집고 비판하는 문학작품은 대중의 환영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일제시대에 태어나 소시민적 슬픔이 담긴 시를 쓰던 김수영은 1960년 본격적으로 사회참여시를 쓰기 시작하며 이름을 알린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일찍 등졌지만 그의 작품은 문단의 지지를 받으며 더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김수영의 사회참여시는 어느샌가 대중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자유경제원은 12일 ‘김수영 가짜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 문단권력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열린 ‘사회를 흔드는 사회참여시, 누가 김수영을 이용하나’ 세미나에서 토론자로 나선 미디어펜 조우석 주필은 출판사, 학연 등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혀 마치 결혼식 주례를 하듯 작품과 작가에 대해 일방적인 칭찬만 해주는 얼빠진 비평행위, 주례사 비평에 대하여 일침했다. 조 주필은 “빅 브라더 아닌 빅 브라더가 존재하는 문단 구조 속에서 이의제기 없이 ‘알아서 기는 비평행위’는 모두가 획일주의-전체주의 압제 속에 갇혀있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조 주필은 “백낙청의 지적 권위에 ‘당신은 아닙니다!’라고 비판하는 이도 없으며, 김수영 신화 앞에 ‘김수영 시는 과대평가됐다!’고 냉정하게 지적하는 평론가와 시인도 희귀하다”며 “백낙청의 창비 계열이 내세우는 민중문학 유일사상은 국수주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조 주필은 복거일 소설가의 “그들의 문제의식의 크기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로 갇혀있는 그들의 시야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을 전하며 전체주의 문학판에서 ‘노’라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조우석 주필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주필
전체주의 문학판에서 “노!”라고 하는 용기

김수영 신화 깨려면 ‘문단 최고존엄’부터 제거하라

아무도 한국문학을 읽지 않고, ‘그들만의 잔치’인 주요 문학상의 수상작가도 대중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조정래의 ‘정글만리’와 정유정의 ‘28’ 등이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 순위 10위권에 포진했던 2013년 이래, 한국문학은 이 차트의 100위권에서도 거의 실종됐다.(도표 참조) 한국문학의 오랜 침체의 원인으로 다양한 원인이 지적되지만, 이른바 ‘주례사 비평’이 큰 몫을 한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주례사 비평은 비평가의 양식보다 출판사, 학연 등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혀 마치 결혼식 주례를 하듯 작품과 작가에 대해 일방적인 칭찬만 해주는 얼빠진 비평행위를 일컫는다. 오해 마시라. 주례사 비평이 격려와 상찬의 덕담비평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 그 이상의 악성(惡性)에 속한다. 엄연히 빅 브라더 아닌 빅 브라더가 존재하는 문단 구조 속에서 아무도 의의제기 없이 ‘알아서 기는 비평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가장 창조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장르인 문학은 없어지고, 모두가 획일주의-전체주의의 압제 속에 갇혀있는 꼴이다.

   
▲ 한국문학 '실종된 베스트셀러' 순위./자료출처=한국출판인회의


그래서 문학의 죽음은 타살 이전에 엄연히 자살이다. 생각의 독립정부이어야 할 문학이, 독립적 지성의 위엄을 보여주어야 할 문학이 ‘줄 세우기’와 ‘알아서 기기’로 변질된 게 지금이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망가지고 고장 난 문학의 죽음은 벌써 30년을 훌쩍 넘기는데, 그건 구체적으로 문단 헤게모니를 장악한 창비 계열 백낙청의 유일적 지도체계를 말한다. 그래서 백낙청은 가히 한국문단의 최고존엄인데, 철 지난 지 오래인 그의 지적-도덕적 권위를 허물어뜨려야 한국문학이 산다. 김수영이란 가짜 신화도 백낙청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

‘주례사 비평’에 몰두하는 비평행위와, 관행적인 질 낮은 작품을 반복해 쏟아내는 창작 행위 모두가 이 구조 속에서 음습하게 ‘악의 꽃’을 피운 채 공생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1980년대까지 그래서 한국문학을 장악한 양대 에콜이었던 리얼리즘의 창비와 모더니즘의 문학과지성이 있었다고? 그건 잊어라. 당시에도 문지는 창비의 눈치를 보면서 은근히 따라하길 반복하던 ‘창비 2중대’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마저 사라진 채 창비 독주 체제다.

   
▲ 오세영의 글, 복거일의 일문일답에서 드러나는 반 김수영론은 “노!”를 발하는 의미 있는 문제제기로 기억해둠직하다. 김수영 신화를 깨는 작업은 이런 성과의 토대 위에 새롭게 시도되어야 한다./자료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형해화된 리얼리즘이 판을 치면서, 변해도 수차례 바뀐 세상을 도외시하면서 ‘그들끼리의 문학’으로 변질됐다. 이 구조를 떠받쳐주는 게 주례사 비평이고, 많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행위를 짓누르는 억압의 메카니즘이다. 그 구조는 무섭다. 찍히면 죽는 풍토이기 때문인데,  2002년 권성우 등 일군의 평론가들이 뭉쳐서 단행본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를 펴내며, 주례사 비평과 문학권력의 문제를 문제제기했지만 이들 상당수가  문단 밖으로 축출되다시피 하며 완패를 당해야 했다. 

문학판이 획일주의를 넘어서 전체주의 풍토로 변질된 것인데, 지난해 한국일보의 한 문학기사는 모처럼 한국문학을 죽인 원인으로 주례사 비평의 문제를 다루면서 평론가인 김명인 인하대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주례사 비평은 작가들로 하여금 오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비판이 없으니 독자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그 안에서 독버섯이 피어나는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문단은 전체가 마이동풍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라고 외치는 사람 자체가 없거나 희귀하다. 백낙청의 지적 권위에 “당신은 아닙니다!”라고 비판하는 이도 없으며, 김수영 신화 앞에 “김수영 시는 과대평가됐다!”고 냉정하게 지적하는 평론가와 시인도 희귀하다. 문학판 내부에서 그런 움직임을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자유경제원이 주최하는 ‘김수영 비판 연속세미나’는 자정(自淨)능력 혹은 자기 쇄신 기능을 오래 전에 상실한 한국문학이 문학판 외부에서 비판을 당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노출한다.

그 점에서 연속 세미나 첫 회에서 “이제 김수영을 내 눈으로 다시 읽을 때가 되었다”고 강원대 신중섭 교수가 언명했던 것은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전체주의 문학판’에 던지는 의미 있는 목소리로 기억돼야 한다. 그 전에 문학판에 우상 김수영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시인이기도 한 서울대 오세영 명예교수가 거의 유일하다.  2005년 1,2월호 문예잡지 <현대시>에 기고한 글 <우상의 가면-김수영 論>(그해 <우상의 눈물-오세영 평론집>(문학동네 펴냄)에 재수록)이 그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학계가 한국의 현대시, 특히 작품론 연구에서 반성해야 될 몇 가지 타성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우리 학계의 보다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학풍의 진작을 바라는 염원 때문이다. 이제 우리 연구자들은 작품에 대한 기존의 견해나 평가에서 과감하게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자신만의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눈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졸작이 명작으로 치부되고, 작품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는 것은 학자로서 직무유기이며, 문화적 범죄행위인 까닭이다.” 

그 글의 맺음말이 썩 인상적인데, 한국문학에서는 이런 목소리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게 사실이다. 어쨌거나 “작품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는 것은 학자로서 직무유기이며, 문화적 범죄행위”라고까지 지적한 것은 백낙청의 창비 계열이 내세우는 민중문학 유일사상에 대한 훌륭한 반론이며, 포괄적인 지적으로 유감없다.  당시 김수영 비판론이 나왔다는 것 자체로 잠시 화제가 됐었지만, 그럼에도 오세영의 글은 본격적인 김수영 비판에서는 먼 게 사실이다. 

   
▲ 주례사 비평은 한국문단의 죽음을 상징한다. 빅 브라더가 존재하는 문단 구조 속에서 아무도 의의제기 없이 ‘알아서 기는 비평행위’란 가장 창조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장르인 문학은 없어지고, 모두가 획일주의-전체주의의 압제 속에 갇혀있는 꼴이다./자료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김수영은 물론 ‘서시’의 윤동주와 월북 시인 임화 등 몇 명을 한꺼번에 표적으로 삼고 있어서 과녁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한계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김수영 시작품 전체를 다루지 않고 민중시로 알려진 ‘풀’ 한 편에 대한 의의제기로 그쳤다. 그 점에서 오세영의 반 김수영론은 전체주의 문단 풍토를 깼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시도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불발탄에 그쳤다. 파괴력도 약하고 대중적 전파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던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별도로 김수영과, 그를 둘러싼 신화를 만들어낸 창비 백낙청에 대한 문제제기로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 토론자가 1년 전 작가 복거일과 했던 인터뷰 “지적(知的) 거인 복거일, 미제스-노이만 천재성에 절망했다”(미디어펜 2015년 4월 25일자 보도)가 아닐까 싶다. 당시 문단 상황을 점검하는 가운데 복거일은 “김수영은 지적 파산을 한 사람”이자 “김수영의 유명한 작품 ‘거대한 뿌리’는 알고 보면 창비 진영 특유의 국수주의 이념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라는 단호한 발언이 등장한다. 백낙청 비판도 등장하는데, 당시 일문일답은 다음과 같다.

-(조우석 질문) 최인훈-복거일 저평가 분위기는 지식사회 전반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화된 탓도 큽니다. 어느 때인데 민중문학-민족문학의 힘이 여전합니다. 특히 백낙청이 주도하는 창비 진영의 헤게모니가 문제입니다.

-(복거일 대답)“제가 등단한 1980년대 후반부터 그런 기운이 강했습니다. 창비 진영도 그랬지만 무크지 <실천문학>이 더 맹렬했죠. 타계한 문학평론가 채광석의 목청이 그중 높았는데, 그들은 문학은 현실변혁에 복무해야 한다고 외쳤더랬습니다. 그런 민중문학은 소비에트의 레닌이 주창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변형에 불과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중앙일보에서 펴내는 문학잡지 <문예중앙>에 ‘문인이 자존심도 없는가, 문학은 자율적인 영역이다’라고 연신 주창했던 겁니다. 물론 그 때문에 저는 미운털이 더 박혔을 겁니다.”

-(조우석 질문)저는 창비 진영의 자기 쇄신이 없고서는 우리문학의 풍토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는 쪽입니다. 너무 오래 고이면 결국 썩는 거 아닙니까?

-(복거일 대답)“백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 하나 더 할까요? 시인 김수영의 유명한 작품 ‘거대한 뿌리’는 알고 보면 창비 진영 특유의 국수주의 이념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한 번은 백 선생 앞에서 김수영을 대놓고 비판했어요. ‘말년에 그런 시를 쓴 김수영은 사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백 선생이 ‘그 비판은 내가 못 참겠네’하면서 반론 하시더라구요. 어쩝니까? 대꾸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서 참고 말았죠. 어쨌거나 창비와 한국사회는 국수주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조우석 질문)사실 1970년대 이후 문학권력을 휘둘러왔고, 문단이 반(反)지성주의로 타락하는데, 백낙청이야말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입니다.

-(복거일 대답)“글쎄요. 제가 어떤 잡지 인터뷰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들려주는 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 쏘는 솜씨는 좋아졌지만, 막상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새총에 불과한 게 아니냐?’ 제 눈엔 그들의 문제의식의 크기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로 갇혀있는 그들의 시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겁니다.”

   
▲ 오세영 교수가 “작품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는 것은 학자로서 직무유기이며, 문화적 범죄행위”라고까지 지적한 것은 백낙청의 창비 계열이 내세우는 민중문학 유일사상에 대한 훌륭한 반론이다./자료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이제 마무리다. 재확인하지만 주례사 비평은 한국문단의 죽음을 상징한다. 빅 브라더가 존재하는 문단 구조 속에서 아무도 의의제기 없이 ‘알아서 기는 비평행위’란 가장 창조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장르인 문학은 없어지고, 모두가 획일주의-전체주의의 압제 속에 갇혀있는 꼴이다. 그 점에서 오세영의 글, 복거일의 일문일답에서 드러나는 반 김수영론은 “노!”를 발하는 의미 있는 문제제기로 기억해둠직하다. 김수영 신화를 깨는 작업은 이런 성과의 토대 위에 새롭게 시도되어야 한다. 김수영을 김수영답게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과대포장된 거짓 신화를 깨는 작업은 이제부터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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