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잘 만들어진 변주곡…생명력 다시 갖게 된 맹목적 반일감정
   
▲ 최공재 독립영화감독
오컬트가 폐쇄적 민족주의를 만났을 때 들리는 소리, ‘곡성哭聲’

영화 '곡성’이 높은 흥행률을 기록하고 있다. 장르영화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변형된 좀비와 오컬트(Occult, 초자연적 현상이나 악마의 이야기를 다룬 공포영화 장르)가 버무려진 형식임에도 이례적인 결과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의외의 성공을 거두고 있고 더 나아가 영화가 잘 이해가 안 간다며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면서 팬덤 현상과 함께 각종 스포일러들이 난무하고 있다.

왜 갑자기 한국 관객은 그 동안 외면했던 이런 장르영화에 열광하고 있을까? 그건 바로 영화적 장치만 제외하고 본다면 그간의 한국영화의 틀에서 철저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런 한국적인 틀 안에서 더욱 더 철저하게 변형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비록 포장은 오컬트 형식이지만, 내용은 '민족주의’를 오히려 더욱 강하게 뿜어내고 있으며, 다른 민족주의 영화들보다 더욱 더 폐쇄적인 모습이다. 그러니 오컬트라는 장르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내용은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지인인 일본인은 반일의 상징인 제국주의와 기독교(악마)의 상징이며, 황정민은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이름이 日光)에 악마의 하수인이고, 곽도원은 선량한 시골 촌사람(마을을 지키는 경찰)일 뿐이며, 천우희는 마을을 지키는 하얀 옷(백의민족, 민족주의)의 수호신이다. 군복을 입은 좀비는 군국주의자이며, 하필 성씨도 '박’씨다.

어린 여자아이 효진을 비롯한 희생자들(대부분이 여성)은 일본 제국주의자와 기독교로부터 처참히 유린당한 피해자들이고, 건강원 주인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피하려 한 비겁한 백성으로 벼락(천벌)을 맞아 죽는다. 이런 배치를 통한다면 굳이 오컬트가 필요 없는 간단명료한 주제를 드러낸다.

“우덜은 피해자고, 외부에서 오는 것들은 다 나쁜 것들이니께 우덜끼리만 뭉치자고!”

   
▲ 영화 '곡성'에서 외지인인 일본인은 반일의 상징인 제국주의와 기독교(악마)의 상징이며, 군복을 입은 좀비는 군국주의자인데다가 성씨가 '박’씨다./자료사진=영화 '곡성' 스틸컷


이 영화는 오컬트 형식으로 포장한 폐쇄적 민족주의 영화다. 그 근간에는 반일과 군국주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를 바탕으로 하지만 결국은 우덜끼리식의 '민족주의’가 주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타 다른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한국영화와는 차별을 둔다. 형편없었던 최민식 주연의 '대호’처럼 멍청하게 반일감정만을 앞세운 영화들의 식상함에 관객들이 고개를 돌릴 즈음, 이 영화는 다른 모양새로 민족주의를 내걸고 관객을 다시 돌려 세웠다. 뭐 그럴 수도 있고, 한국영화의 기본 레퍼토리 중의 하나가 '반일’이니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그 외의 뭔가 더 무서운 부분이 있다.

반일이란 감정을 일제시대를 넘어 현재로 앞당기고, 반일을 넘어 외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폐쇄적 민족주의의 극단을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정말 무서운 것은 거기에서 한발 더 극단적으로 발을 내딛는다. 바로 그 모든 잘못이 마을 사람들(대중)에게서 벌어졌다는 자괴감이고,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허탈함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든 꽃은 하얀 옷의 마을 수호신이 결계를 쳐놓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행동하고, 그 결계는 풀려 버리며 꽃이 시들어 버린다.

당연히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관객들은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되는데 참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사람들을 탓한다. 나는 그게 제일 무섭다. 결국 민족주의 안에서 하나의 정해진 규율을 무조건 따라 행동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는 절대적 통치자가 지배하는 북한에서나 통할 이야기 구조가 아닌가 말이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의 죽음은 외지인이 아닌 외지인에게 마음을 연 사람들에 대한 그 민족주의 수호신의 저주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분명 타당한 말이지만 감독이 그걸 의도했을 리는 없고, 만약 의도했다면 그건 더욱 끔찍한 상상이 될 것이다.

   
▲ 곽도원은 선량한 시골 촌사람(마을을 지키는 경찰)일 뿐이며, 천우희는 마을을 지키는 하얀 옷(백의민족, 민족주의)의 수호신이다./자료사진=영화 '곡성' 스틸컷


왜 감독은 폐쇄적 민족주의를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오컬트’를 택했을까

오컬트는 초자연적인 신비로운 힘과 악마적 힘이라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맹목적인 현상(그것이 종교나 무속으로 변형되었을지라도)을 유발시킨다. 감독은 민족주의라는 바로 이런 맹목적인 의식을 초자연적 신비로운 힘으로 대비시키고, 그 외의 것을 절대적인 악마의 모양으로 대치시키면서 극단적 민족주의를 관객에게 주입시키려 한다. 이유도 필요 없다. 개인주의적 사고도 필요 없다. 글로벌화된 현실의 세계 따위도 필요 없다. 백의민족이란 우산아래 맹목적으로 들어가 있어야만 살 수 있음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쯤 되면 협박에 가깝게 보여준다.

괴벨스도 차마 생각 못했던 것을 이 영화의 감독은 태연하게 코미디라 말하며 던져놓았고, 물지 말아야 할 미끼를 관객들은 서슴없이 목구멍 깊숙이 삼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영화 내용보다 더 끔찍하고 무섭다. 맹목적 반일감정은 그렇게 이 영화로 인해 다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위의 내용 어느 것보다 더 내게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영화적으로만 보면 할 말 없을 정도로 영화 '곡성’은 너무도 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질투심에 휩싸일 정도로 영화는 오컬트 영화의 변주곡으로서는 합격점을 받기에 충분하다. 나는 그게 무섭다. 

저들은 하나의 형식이 외면 받을 즈음 전혀 새로운 형식과 방식으로 지독하리만치 자신들의 이념과 사상들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데, 우파라 불리우는 이 곳에서는 아무런 대응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생각과 능력조차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 있는 분들이 투자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영화를 만들 인재들을 키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름깨나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 영화를 찍으려 하다 보니 늘상 사기만 당한다. 좌파에서 버려진 오물들에게 그런 꼴을 당하다 보니 젊은 문화인들마저 떠나 버린다. 이런 악순환에서 '태양아래’의 2만 5천 관객도 어찌 보면 기적이다.

   
▲ 황정민은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이름이 日光)에 악마의 하수인이다. 어린 여자아이 효진을 비롯한 희생자들(대부분이 여성)은 일본 제국주의자와 기독교로부터 처참히 유린당한다./자료사진=영화 '곡성' 스틸컷


정말 우파는 문화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21세기는 문화산업이 도래하는 시대고, 영화는 대중문화의 최전선에 있다. 이제는 우파도 좌파들이 무서워하는 영화 한편 정도는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착각하지 말자. 21세기 최초의 우파영화인 '연평해전’은 영화적으론 매우 실패한 영화다.

이 영화와 다른 좌파 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최소 15년 이상의 차이가 벌어져 있다. 이러다 자칫 좌파에서는 '곡성’으로 만세 부를 때, 우파에서는 허구한 날 '곡 소리’나 들어야 될지 걱정이다. 나는 그게 제일 무섭다. 그건 바로 현실이니까! 우스갯소리지만 인터넷을 보면 왜 장소를 곡성으로 택했는가 하는 질문들이 많이 보인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난 왜 이정현 의원이 생각났을까?

그는 호남 지역 그것도 곡성의 유일한 새누리당 의원이다, 이달 말까진!  그도 어찌 보면 고향이 같을 뿐 '새누리당’이라는 죽어도 들어와서는 안 되는 외지세력이다. 설마 아니겠지만 나라면 그런 포지션을 만들 것이란 생각에 농담을 던져봤다. 그런 점에서 이번엔 순천에서 우파영화 찍으면 재밌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긴 글 마친다. /최공재 독립영화감독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예술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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