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의 대상 아냐…여소야대 20대 국회·호남 구애 경쟁 맞물려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곡 제정·제창의 문제가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법적지위가 없는 곡의 제창은 부적절하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이에 대한 반발이 정치권·관련 단체와의 갈등으로 번졌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와 자유민주연구원은 18일 한국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5.18기념곡 제정의 문제점과 대안을 찾기 위한 긴급토론회를 개최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5.18기념곡 제정, 무엇이 문제인가’ 긴급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反)하는 가요이므로 합창이나 제창 및 기념곡 제정도 부적합하다”며 “5대 국경일과 46개 기념일 관련 노래도 기념곡으로 지정한 전례도 법적 근거도 없다”고 지적했다. 유 원장은 “5.18 기념곡 지정을 위해서는 법적 근거를 먼저 확보해야 함이 옳다”며 “진정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승화 시킬 수 있는 기념곡을 새로 작곡하여 국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합창, 또는 제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유 원장은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정확한 실체를 안다면, 정치권과 일부 언론들의 행태는 정말 부끄럽고 한심한 반헌법적 작태”라며 “만약 정부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허용한다면,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스스로 훼손하고 부정하는 자해행위임을 지적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유 원장은 “5.18 기념식에서 합창을 허용한 부분을 제외하면, 국가보훈처가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유동열 원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곡 제정의 반헌법성

Ⅰ. 문제제기

올해에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이 앞장서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제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한 정치지형과 야당들의 경쟁적 호남 구애작전(?)과 맞물려 있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지난 5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 원내지도부와의 회동에서 이 문제에 대해 “국론분열이 생기지 않는 좋은 방안을 찾아볼 것을 국가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말했고, 16일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기념식에서 합창 형식을 유지하고, 5·18 기념곡 지정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놓고 야당은 시작부터 협치(協治)를 깬 것이라며 반발하고 집권여당 원내 지도부도 재고를 요청하는 등 여야가 합동작전을 펼치는 모습을 연출하고, 보수 언론마져 이에 가세하는 혼돈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20대 국회가 개원하면 국가보훈처장을 해임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러나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정확한 실체를 안다면, 정치권과 일부 언론들의 행태는 정말 부끄럽고 한심한 반헌법적 작태임을 깨달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反)하는 가요이므로 합창이나, 제창 및 기념곡 지정도 부적합하다. 이 사안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볼 때,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만약 정부가 이를 허용한다면,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스스로 훼손하고 부정하는 자해행위임을 지적한다. 기념식에서 합창을 허용한 부분을 제외하면, 국가보훈처가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 사진은 지난 2014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추도식'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모습./사진=연합뉴스


Ⅱ. 「임을 위한 행진곡」의 실체1) 와 반(反)헌법성

1.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 배경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월 광주사건에서 희생당한 30세의 청년 윤상원(일명: 윤개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동 가요를 작곡한 김종률(당시 학생가수,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2013년 5월 1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을 제작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상원과 그의 야학동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라고 밝혔다. 윤상원과 박기순은 전남대학교의 동문이었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운동의 동지였다. 젊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사망한(박기순, 1978년 12월 사망) 두 젊은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두 사람의 친구와 가족들이 두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황석영 등 광주지역 문화예술운동가들은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기리는 노래극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노래극에 들어가는 하나의 노래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석영의 주장에 따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작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아니고, 1983년 봄 황석영과 극단 ‘광대’의 잔여활동가들이 전개한 「자유 광주」 방송 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광주항쟁 과정에서 죽은 남녀를 주제로 한 넋풀이 극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황석영의 설명에 따르면, 「자유 광주」 방송 활동이란 한 달에 한 개 씩의 노래극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활동이었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이 주제곡으로 들어 있는 넋풀이 노래극의 테이프는 「자유 광주」 방송의 세 번 째 작품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나 그 주변 인사들의 회고에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윤상원도 광주사건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므로, 이 노래가 직·간접적으로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오늘날 광주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던 사람들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을 신성시하는 모든 사람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은 당시 황석영이 이끄는 문화운동 패의 일원이면서 전남대 학생으로 대학가요제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학생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김종률이 맡았다. 작사는 황석영이 맡았다. 황석영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중의 일부 대목을 뽑아서 동석한 사람들과 협의하여 약간 수정해서 노랫말로 만들었다. 

2. 「임을 위한 행진곡」과 윤상원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월 광주사건에서 희생당한 30세의 청년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임’이란 윤상원을 의미하는 것2)이고 이 노래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위해서는 윤상원이란 인물을 조명해야 한다. 

윤상원은 1978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교를 졸업하고 주택은행에 입사하여 서울에서 근무했으나 이른바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입사 6개 월 만에 사직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온 윤상원은 광주 청년·학생운동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을 위해 광주시 광천공단 내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일당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는 동시에 그 지역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뒤이어 빈민청년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윤상원은 전남대 운동권 재학생들과의 연계도 강화했고,  1979년 가을 무렵엔 광주 운동권의 비중 있는 인물의 하나로 부상했다. 

10·26이후 정치·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자 전국 각지의 운동권들이 활동을 확대했으며, 윤상원도 혁명적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이태복과 1979년 12월 접선되어 혁명적 노동운동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1982년 당국에 적발된 ‘전국민주학생연맹 및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의 주범 이태복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1979년 12월 초순부터…윤상원 등과 만나 노동자조직 구성을 위해 활동하고, 1980년 5월 3일-5일 ‘전민노련’을 결성”했다.3) 윤상원은 전민노련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당국에 따르면, 이태복이 주도하고 윤상원이 참여한 전민노련은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집단으로서의 노동자 집단을 조직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윤상원은 또 그 해 봄에 결성될 예정인 기성인 운동권의 결집체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전남지부’의 사무국장으로 내정되었었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다수의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소수의 이른바 짝퉁 민주화운동세력(혁명세력)을 위한 노래이다./자료사진=연합뉴스


이른바 5·18 항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윤상원은 광주지역의 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부가 5·17 계엄확대 조치를 취하면서 운동권인사들을 예비검속하자 광주지역 운동권 인사 및 운동권 학생들의 대부분은 검속을 피해 광주를 떠나 타지로 피신했으나, 윤상원은 체포 경력이 없어 당국의 예비검속의 대상이 되지 않아 광주에 남아서 항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윤상원은 전남대생들의 가두시위가 개시된 시점부터 녹두서점에서 광주에 잔류한 운동권 인사들과 학생 시위를 확대할 대책을 강구하고, 화염병을 제작하여 시위 현장에 공급하고, 화염병 투척방법을 지도했다. 또한 들불야학 팀을 동원하여 투쟁과 관련된 선전·선동물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윤상원은 5월 19일에는 가두투쟁에 직접 참가하여 진압군에게 돌멩이, 깡통수류탄,  화염병 등을 투척하기도 하고 공수부대원을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윤상원의 공수부대원 살해에 관해서는 항쟁기간 중 그를 추종하여 활동한 김효석이란 당시 고등학생이 증언하고 있다.4) 

윤상원은 21일부터 전 민중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는 선동물을 제작하여 살포했다.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 22일 오전부터 윤상원은 도청의 시민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청을 점거한 시민군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동조자들을 포섭하고, 도청 앞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도청 시민군 지휘부로 하여금 계엄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당시 도청 안에 있는 시민군 지휘부인 시민·학생수습위원회는 다수의 구성원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윤상원은 무장투쟁을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연일 개최하는 동시에 도청에 가까이 있는 YWCA 빌딩에 들불야학 팀, 극단 ‘광대’ 팀, 기타 운동권 대학생들로 구성된 행동대를 조직하여 도청 진입를 준비했다. 무장투쟁을 위해서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결정적인 순간에 투쟁지도부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 윤상원과 그의 민민운동 동지들의 생각이었다. 

윤상원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도청접수를 추진하면서, 계엄군과의 투쟁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인들을 도청에 인질로 잡아두는 계획을 동지들과 은밀히 검토하기도 했다. 군부의 광주 진압을 위한 병력투입은 미국의 승인 하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므로 도청에 미국인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으면 계엄군이 함부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미국인을 인질로 잡아두려는 윤상원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25일 오후 윤상원과 그의 동지들은 도청 접수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날 오후 5시 경 도청의 학생수습위원회는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무기반납문제를 토의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위원장 김창길의 주도 하에 무기반납에 동조하는 성원이 다수를 차지했고, 그에 반대하는 성원은 부위원장 김종배를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다. 윤상원은 도청으로 들어가 김창길을 비난하는 고함을 지르며 회의를 무산시켰다. 회의를 무산시킨  직후 YWCA빌딩에 모여 있던 운동권 청년들과 지도급 학생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김창길에게 위원장 사퇴 압력을 가했다. 김창길은 위원장직 사퇴의사를 밝힌 후 그의 말에 동조하는 다수의 시민군들과 함께 도청에서 철수했다. 윤상원 일행은 일종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윤상원은 저녁 8시 경 YWCA로 가서 도청진입을 위해 대기 중이던 청년 학생 1백여 명을 인솔하고 도청에 진입하였다. 도청에 진입한 윤상원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에서 무장투쟁 지속을 주장해온 김종배 박남선 등 소수파 지도자들과 합세하여 청년학생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김종배를 내세우고, 부위원장은 정상용과 허규정, 상황실장은 박남선이 맡고, 윤상원은 대변인을 자청하여 맡았다. 이때부터 광주항쟁의 지도부는 전문 운동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의 광주 진입작전이 개시되자 새로운 항쟁지도부는 진압군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진압군이 진격해오면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을 무장시켜 저지하고, 저지에 실패하면 게릴라전을 대항하며, 최후의 순간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하기로 결정했다. 항쟁기간 중 도청 지하실에는 8톤 트럭 1대 분량 다이너마이트(이리역 폭발사고의 10배 위력을 가진 분량)가 뇌관까지 설치된 상태였다. 윤상원 등이 계획대로 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켰더라면 광주 시내의 절반 이상을 쑥밭으로 만들고 수만 명의 광주 시민이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김창길 등 온건파가 군의 폭약전문가들과 협조하여 25일 밤과 26일 낮에 도청 지하실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킬 수 있는 뇌관들을 제거함으로써 광주 시민 수만 명을 자기들의 자살에 동행시키려던 윤상원 등의 다이너마이트 폭발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5월 26일 저녁 도청에서는 시민·학생 통합수습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정원 30명 중 20여명이 넘는 성원들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 김창길이 제시한 무기반납론이 또다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무기반납에 반대하는 소수파가 회의장을 떠난 가운데, 잔류 성원들은 무기반납이 의결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상원은 무기를 휴대한 박남선 상황실장(시민군 군사지휘 총책)을 앞세우고 동지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갔다. 박남선이 무기로 위협하는 가운데 윤상원은 무장투쟁 지속을 강조했다. 무기반납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고 그들의 결의는 무효가 되었다. 

이처럼 무장투쟁을 고수하는데 앞장선 윤상원은 27일 새벽 3시 경, 도청 무기고 앞에서 잔류 시민군 병사들에게 최후까지 저항할 것을 호소했고, 새벽 4시 경 공수대원의 사격에 복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주장이나, 5.18 기념식에서 합창 또는 제창하자는 주장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한다./자료사진=연합뉴스


3. 「임을 위한 행진곡」의 반헌법성

첫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 진정한 민주화운동가를 기리는 노래가 아니다. 이 노래는 이른바 광주항쟁에서 끝가지 투쟁한 윤상원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고, 넓게는 이른바 그들이 지향하는 혁명을 위해 윤상원과 같이 최후까지 투쟁하다 사망한 자들을 기리는 노래이다. 이는 앞서 소개한 윤상원의 사회주의지향의 투쟁경력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노래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것은 진정한 ‘광주민주운동 정신을 훼손하고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이란 당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신이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둘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른바 운동권세력(지하혁명세력 포함)들에 의해 애국가를 대신하여 불리워지는 대표적 운동권 가요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 운동권세력들은 각종 행사나 비밀회합시 국민의례를 거부하고 이른바 민중의례를 진행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 제창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이는 그 동안 적발된 간첩사건 등 국가보안법 사건 및 이석기 내란선동사건이나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진당사건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 구현하려는 가요라면, 결코 혁명세력들에 의해 불리워질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에 의해 남조선혁명을 선동하는 이른바 혁명가요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남한(적화)혁명을 위한 인민봉기” 또는 “남조선 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사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 사변”로 규정하고5) 매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루고 있다. 또한 5.18 관련자들을 애국열사능에 가묘를 세워 안장하고 조국통일상 등을 수여한 바도 있다. 

특히, 북한은 1991년 5.18를 소재로 한 「임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시나리오를 당시 불법 방북한 황석영과 리춘구(북한작가)가 공동 집필하고 음악은 재독 친북음악가 윤이상과 리종오(북한 음악가)가 담당하였다. 동 영화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두차례에 걸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있다.

국내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사하고 제작을 주도했던 황석영6)이 불법 방북하여 5.18 관련 혁명영화제작에 참여하고, 이 영화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경 음악으로 삽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또한 북한이 발간한 혁명가요집 <통일노래 100곡 모음집>(윤이상음악연구소, 1990)에 국내 운동권 가요가 2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제반 정황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 의해 남한혁명을 선동하는 혁명가요의 반열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의 국가기념곡 지정과 관련한 현재의 혼돈국면은 이른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다./자료사진=연합뉴스


Ⅲ. 정책제언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주장이나, 5.18 기념식에서 합창 또는 제창하자는 주장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수호하고 입법활동을 통해 헌법적 가치를 구현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헌법정신을 훼손하고 부정하는 노래를 국가기념곡으로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행위는 한심한 차원을 넘어서 반국가적 행위이며 대한민국의 수치이다.

또한 백번양보해서 행정절차측면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의 국가기념곡 지정은 법적 근거가 없는 초법적 발상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5대 국경일괴 46개 정부기념일 및 30개 개별 법률에 규정된 기념일에도 기념곡으로 지정된 노래는 한편도 없다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국가기념곡 지정을 주장하는 여야 정치인들은 무식함에 앞서 망국적 행위를 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국가기념곡 지정과 관련한 현재의 혼돈국면은 이른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다.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이란 당시 군사폭압체제에 항거한 광주시민들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정신이다. 그런데, 당시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세력들 중에는 대다수의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과 함께 광주사태라는 혁명적 국면에 편승하여 자기들의 사회주의혁명을 성취하려는 계기로 조성하려는 소수의 이른바 짝퉁 민주화운동세력(혁명세력)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민주화운동세력이라 평가한 것이 현재의 혼돈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바로 대다수의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소수의 이른바 짝퉁 민주화운동세력(혁명세력)을 위한 노래이다.

따라서 혁명선동가요를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것은 진정한 광주민주화운동 정신과 희생자들의 유지를 훼손하고 배신하는 것이며 더나가 헌법적 가치에도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기념곡을 새로 작곡하여 5.18 기념식때 전 국민과 함께 합창 또는 제창할 것을 제안한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1) 이상의 내용은 양동안, “임을 위한 행진곡의 문제점”, 5.18 기념곡 제정관련 토론회 자료집, 바른사회시민회의-자유민주연구원, 2015.4.2.을 사실관계를 재확인하여 요약 발췌함. 

2) 일부에서는 ‘임’이 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과정된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윤상원 등 이른바 광주항쟁을 위해 투쟁하다 희생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 대검찰청, 『공안자료 제1집(좌익사건실록 제13권)』(대검찰청, 1984), 348-349쪽. 양동안, 앞의 논문, 재인용. 

4) “20일 날인가 내가 녹두서점에 점심인가를 먹을라고 와서 쉬고 있었던가 그랬는디 상원이 형이 용용하게 옵디다. 철모하고 단검을 하나 들고 오드라고. 내가 ‘뭔 일이요?’ 물어보니까 ‘내가 한 놈 죽여불고 왔다’ 하더라고. 상원이 형 이야기가 태평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서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밀고 당기고 했다는 거여. 천변로에서 계속 밀고 쫓기면서 돌멩이를 띵기고 했다는데, 시민들이 도망가면 계속 다들 일정 정도 좇아오다가 다시 대열로 돌아가는데 어떤 놈이 계속 끄트머리까지 좇아오더라 이거여. 근디 상원이 형이 그놈 보니까 비틀비틀하니 술 취한 놈처럼 그러더라 이거여. 그래서 ‘아 저놈을 봐 버려야겠구나’ 생각하고 도망가면서도 시민들한테 ‘저 놈 봐불자’ 그랬다는 거여. 도망가던 군중들도 돌아서서 보니까 혼자 좇아오고 있거든. 그래서 ‘와!’ 하니 좇아갔다는 것이여. 그러니까 그놈이 놀래서 하천으로 뛰어내려 분 거여. 시민들이 하천으로 뛰어 내려가 가지고 그놈을 밟아 부렀지. 그 때 상원이 형이 거기서 큰 돌팍을 들어가지고 대그빡을 찍어 부렀다는 것이여. 그 기념으로 철모랑 단검을 뺏어왔다는 것이여. 아마 그 공수부대원은 죽었을 거라는 거여. 그래가지고 녹두서점으로 철모하고 단검을 들고 왔어.” 김효석, 「나는 역사의 새벽을 보았다」, 김양현·강현정 엮음, 『5·18항쟁 증언자료집 Ⅳ』(5·18연구소 자료총서 4)(전남대학교 출판부, 2005), 106-107쪽.

5)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5.18 광주인민봉기, 우리민족끼리 논설(2016.5.18.일자). 

6) 북한 5회 방문,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7년 선고.
[유동열]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