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16일…대통령중심제로의 전환, 산업화의 첫걸음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대한민국? 5.16은 없고 5.18 광주만 있는 나라

5.16은 없고 5.18 광주만 있는 나라다. 지난 16일 전후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이슈는 자취를 감췄고 며칠 간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만 계속됐다. 급기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18일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유족들의 반발로 식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둘러싼 이견과 반목이 연출한 장면이다. 목불인견이다.

5.16 공식 기념행사는 없는데 5.18 민주화운동은 언제부터 국가보훈처 주관 행사가 되었는지, 5.18 광주항쟁이 왜 민주화운동이란 이름을 달았는지 의문이다. 5.16이 성공한 쿠데타라면 5.18은 실패한 쿠데타였다. 광주시민들은 생존과 자유 수호라는 기치 아래 군부의 억압에 분연히 일어났지만 진압됐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방어에 나섰다. 경찰서 무기고를 털고 교도소를 습격하면서 중무장한 채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했지만, 당시 벌어졌던 광주 시민들의 무장투쟁은 민주화라는 성취를 내지 못했다. 이듬해 총선, 전두환의 민정당은 전남 광주에서 압승했다. 5.18 광주항쟁은 1987년 이후에서야 비로소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5.18 광주와 비교해 5.16 박정희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했다지만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이후 취했던 조치는 '총'으로 권좌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세워 기존의 내각책임제를 허물었고 1962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중심제-대통령직선제를 세웠다.

이후 그는 1963년 10월 제 5대 대선에 나섰다. 쿠데타로 무너진 정권 실세들은 모두 죽는다는 것이 상식인데 5.16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5.16으로 무너진 장면정권의 前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와 대선에서 맞붙었다.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에 맞서 46.6% 대 45.1%(470만표 대 454만표)로 1.5%p 차의 신승을 거두었다. 투표율은 85%였다.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는 독재자(?)가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했고, 이후 열린 대선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국민의 선택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책임제 하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 이것이 5.16의 진실이다.

   
▲ 박정희는 '총'으로 권좌에 오르지 않았다. 국민투표 및 대선 등 국민의 선택을 통해 대통령에 올랐다.


대한민국은 1960년 4월 19일 이후 이듬 해 5.16으로 뒤집어지기 전까지 온 국민이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살았던 나라가 아니다. 4.19 이후 연일 거듭되던 시위에 내각책임제 정국의 혼란함은 극에 달했고 이는 5.16 이후 안정되었다.

5.16은 박정희가 국민투표를 거쳐 기존의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책임제로 바꾸는데 초석이 된 사건이었다. 1962년 12월 17일 실시됐던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85.3%에 80%의 찬성을 얻어 대통령책임제가 이 땅의 통치체제로 들어섰다.

“국가에 있어서 정치의 초점은 경제 건설이며 민주주의도 경제 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박정희의 말이다. 우리나라는 2차 대전 후 독립국 중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까지 이룬 유일한 나라다. 지금 우리는 그 열매를 누리며 살고 있다. 5.16은 단순히 대통령중심제로의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첫 걸음을 뜻하기도 한다. 5.16은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성공한 쿠데타였다. 5.16은 없고 5.18 광주만 기리는 나라가 씁쓸하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 지난 16일 전후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이슈는 자취를 감췄고 며칠 간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만 계속됐다./자료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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