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담론·어젠다 논하는 정치인들의 세상…소통 부족·폐쇄성 초래
유교에 목이 졸린 대한민국
 
한두 가지 모습을 갖고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의 문화를 정확히 표현하고 평가하기에는 문화란 모호하면서도 매우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의 기저에는 그것이 외부적으로 드러난 모습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어떤 무엇인가가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이를 컬쳐 코어(Culture Cor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문화의 컬쳐 코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면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 전래되어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은, 또한 시기적으로 근접한 근대화 이전의 왕조였던 조선왕조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유교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시작점은 공자가 꿈꾸었던 고대 제정일치(祭政一致) 체제인 주(周)로의 문화적 복귀를 통한 정적인 질서 회복과 이것의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데 있다. 이는 공자의 말 모음집인 <논어(論語)>에 집약되어 있고,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한마디 한마디는 유교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를 거치며 한국인의 뇌리에 특히 더 깊이 박히게 되었다.

<논어>에 나온 몇 가지 핵심어들과 공자의 지향점만 살펴보아도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일련의 위기들, 조선(造船)산업의 붕괴, 서비스업과 결합된 고부가가치 제조업으로의 비교우위 전환 실패, 준법 의식 및 법치 수준의 저하 등의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들의 이면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유교의 폐해에 대한 냉철하고 진지한 인식은 부족해 보인다.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述而不作을 살펴보자. 이 구절은 공자가 스스로 겸손함을 표현하고 자신이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담긴 선언이다. 그러나 述而不作의 선언은 도전과 창의력, 이들을 통해 축적한 성공과 실패의 과정으로 태어나는 혁신과 창작을 차단하고 과거에 전해오던 대상에 대한 기술(記述)을 우위에 둔다.

그래서 그런 걸까? 정부는 애타게 창조경제를 외치고, 전 세계 경영대학원에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이 논의될 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단기적 시각에 매몰된 결과만능주의,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사회 성원들의 전반적인 무관심, 새로운 경쟁우위를 창출하지 못하고 추격 전략에서 못 벗어나는 모습들을 늘 지적 받고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 오로지 거대 담론과 어젠다를 말하는 역할인 士만이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되고, 조직과 사회에서 무시 받지 않기 위해 성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士가 되려고 한다. 공무원 관료, 정치인, 교수가 대표적 사례다./자료사진=연합뉴스

<논어>에서 말하는 인간의 삶도 개인을 억압하는 측면이 강하다. <논어>에서는 공자가 나이에 따른 자신의 변화에 대해 말한 구절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20세=弱冠], [30세=而立], [40세=不惑], [50대=知天命]이라는 도식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논어와 그 밖의 유교 콘텐츠에서 개인이 어떻게 발달하고 성장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논의를 찾기 어렵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자신의 변화는 나이의 숫자 변화에 따른 당위론으로 고착되어 한국인에게 정신적인 굴레를 씌우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과거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서 충분한 지식과 경력을 축적한 다음, 창업가로 독립하여 자신의 영역을 새로 개척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축하를 보내주고 그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건전한 스타트업(Start-up) 문화가 있다. 하지만 대기업을 다니다가 창업을 하려고 하면 선진국과는 달리,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덤비냐고 조롱하며 우려하는 한국에서 개인은 복지부동(伏地不動)하게 되고, 벤처 시스템은 붕괴되며, 사회 활력과 질적 제고도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인간 수명의 연장으로 인해 특히 선진국을 중심으로 노인들이 제2의 삶을 살겠다며 다시 운동해서 건강을 찾고 요트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한 이야기, 일생을 교직에 몸 담았다가 자신이 어릴 때 꿈꾸던 요리사가 되겠다며 은퇴하고 단신으로 유학을 간 어느 老교수의 성공담 등이 사회 성원들에게 미담이자 동시에 인생 성장을 위한 자극제로 칭송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에서는 주로 별난 특종 기사감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청년과 중장년층에게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현실적으로 더 이상 설득력이 미약한 孝라는 유교적 가치를 노인을 위해 일방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아직도 미덕으로 삼는 한국 사회에서 급속한 고령화가 지금보다 더 진전되었을 때 얼마나 더 좌충우돌할지 염려스러울 뿐이다.
士農工商 사상과 유교 교육을 받은 선비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지나치게 당위적인 유교적 엘리트 의식도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농공상과 유교적 엘리트 의식이라는 틀 안에서 工과 商으로 대표되는 가장 절차적이고 기능적인 부문은 간과되거나 멸시 받을 수밖에 없다. 오로지 거대 담론과 어젠다를 말하는 역할인 士만이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되고, 조직과 사회에서 무시 받지 않기 위해 성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士가 되려고 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비록 조명을 받지 못하지만 존재하지 않으면 한 사회와 조직의 유지가 불가능한 부문들 – 철저한 체크리스트 확인, 소방관 및 군인 등의 희생적인 직업, 물류·회계 등의 기능 부서 – 에 우수한 인력을 배치하거나 양성하기 어렵게 되고, 결국에는 부실한 기초로 인한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의 저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유교적 엘리트 의식은 견제 없는 과잉 관료주의의 문화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많은 폐해를 불러 온다. 현대 행정은 규제와 간섭은 필요한 정도로만 최소화하면서 민간의 자율성과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기반 시설을 부지런히 갖추어 주고 제도적 안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주는, 야구로 비유하면 민간을 위한 테이블 세터(Table Setter)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적 엘리트 의식에서는 오로지 유교라는 하나의 컨텐츠를 교육 받은 관료들의 결정이 주역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관한 전문성 부족, 획일화, 관료들만의 소통으로 인한 불투명성, 은폐성, 폐쇄성을 초래하게 된다.

   
▲ 전 세계 경영대학원에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이 논의될 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단기적 시각에 매몰된 결과만능주의,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사회 성원들의 전반적인 무관심, 새로운 경쟁우위를 창출하지 못하고 추격 전략에서 못 벗어나는 모습들을 늘 지적 받는다./자료사진=서울대학교 브로셔


동아시아에서 서양의 개항 요구가 불어오던 19세기, 서양의 지성을 접한 후쿠자와 유기치, 루쉰 같은 동양의 선각자적 지성인들이 주저 없이 유교를 버리고 유교의 청산을 외쳤던 이유는 고대 제정일치 체제인 주나라로의 문화적 복귀를 통한 정적인 질서 회복과 이것의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유교가 개인과 사회를 구속하고 질식시키며 비합리성과 불투명성 등의 여러 폐해를 유발하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개인들로 구성된 거대한 질서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작동시키는 문화에 대해 그 문화가 시대에 맞는지,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개개인의 지속적인 성찰과 자기 점검이 없는 사회의 질은 살 가치가 없는 인생처럼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우리 것에 대해 냉정해질 때가 되었다. /황성훈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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