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외면하는 선동·저급언론…감성팔이로 나라 망치고 있어
   
▲ 박한명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19세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던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2013년 성수역, 2015년 강남역, 그리고 2016년 이번엔 구의역이다. 같은 사고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비극이고 그때마다 지적을 해도 되풀이되는 어리석은 인재(人災)라는 점에서 희극이다. 더 큰 비극은 이런 사고를 대하는 우리 언론의 변함없는 태도다.

서울메트로에 책임을 묻고 정치인들을 질책하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데 언론의 책임은 없나. 2015년 강남역에서 사고가 났을 때 한 언론은 이런 기사를 썼다. "스크린도어, 28살 청년 노동자를 삼키다-28살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 그는 이날 퇴근한 뒤 무엇이 먹고 싶었을까?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은 무엇이 남았을까?(한겨레신문)" 2016년 구의역 사고에서 언론은 또 어땠나. "지하철 진입할 때 나는 굉음이 너의 비명소리처럼 들려 가슴이 아프다. 그곳에선 컵라면 말고 고기 먹어.(경향신문)" 같은 사고가 반복될 때 언론도 같은 보도를 반복했다.

끼니를 제때 챙기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일했던 청년 김군의 사연엔 대한민국 국민 누구라도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김군 가방 속에 컵라면이 들었고 구의역에 추모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나붙었다며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만 몰두한다고 사고재발을 막을 수 있나. 정치인 누가누가 현장을 찾았다는 사연을 보도한다고 비극의 재연을 막을 수 있나.

좌파언론은 비정규직 하청의 문제, 업무 외주화의 문제를 따진다. 시민단체들은 몰려가 사회적 타살이니 정부의 책임이니 비판하기 바쁘다. 위험 업무 직군을 직접 고용해 하청을 없애고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그런 세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좌파언론이 김군 같은 비극적인 케이스를 막고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정말로 원한다면 가방 속 컵라면이나 포스트잇 추모글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권리보호에 거대한 장벽인 정규직들의 기득권을 비판해야 옳다.

반복된 사고, 본질 간과한 언론의 책임

한국노총 민주노총과 같은 거대 귀족노조 그들이 자기 것은 양보하지 않고 투쟁하면 할수록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더 공고해진다는 역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잊을만하면 생기는 스크린도어 사고가 반복되는 데에는 서울메트로가 은성PSD와 같은 외주사와 맺은 불공정 거래가 원인으로 꼽힌다. 핵심은 서울메트로 정규직들이 용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비정규직에 몰린 젊은 청년들의 죽음과 박탈감을 자극하면서 좌파언론이 언제 이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기나 했나. 그저 비정규직 타파만 외친다고 사고를 막을 수 있나. 하청업체, 외주사의 비정규직 어린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를 받고 장시간 온갖 역의 수리보수 업무를 홀로 커버해야 하는 현실에는 서울메트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은퇴 후 자리보장과 안락함을 위함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개입돼 있다는 점을 잊어선 곤란하다. 언론이 김군의 죽음과 추모에만 꽂혀서는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없다.

   
▲ 한국청년연대 등 청년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 인근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숨진 김모 씨 사고와 관련,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 씨는 지난 28일 오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중 승강장으로 진입하던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숨졌다./사진=연합뉴스

언론과 미디어가 보도해야 할 것은 보도하지 않고 눈물 콧물이나 빼는 기사로 사회를 망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자주 겪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대책마련을 위해 공론을 모으기보다 불필요한 감성보도로 민심을 자극하고 정치선동에 이용해 국론을 분열시켰던 언론은 스크린도어 사망사고가 끊임없이 재발하는데 과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나.

지난 번 강남역 묻지마 살인을 여혐남혐 논쟁으로 기어코 끌고가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는데 앞장섰던 언론의 보도 추태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을 여성혐오 사건으로 선동하던 언론이 대한민국 젊은 남녀가 싸우는데 얼마나 혁혁한 공로를 세웠나.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니 정신질환자를 매도하는 것이냐 발끈하던 바보같은 기사들은 또 얼마나 황당한가. 애초에 병적 증상이 발현된 살인을 여성혐오 범죄로 본다는 것 자체가 억지인데 언론은 얼마나 지독히 선동했었나. 이 땅의 젊은 청춘들은 그런 엉터리 기사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춤추고 헛된 분노에 에너지를 쏟느라 인생을 얼마나 낭비했나.

진짜 '헬조선' 만드는 언론의 삽질, 각성이 필요하다

언론의 한심한 짓들이 어디 그 뿐인가.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을 썼다는 학생 사연이 SNS를 흔드니 언론이 또 여지없이 떠들어 댔다. 가난으로 생리대를 사기 힘든 청소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문제로 곤란을 겪는 청소년들이 약 10만명 정도 될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이걸 보도하고 사회문제로 지적해서 개선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신발 깔창을 사용한 극히 극단적인 경우를 전부의 문제로 지나치게 과장하고 강조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당장 SNS를 보더라도 생리대 무상공급 논란이 지자체 특정 정치인들의 홍보 소재로 이용되는 듯한 모습이다. 맹목적인 정부 비판, 대통령 비난거리가 된다. 생리대 문제는 무조건 이 사회가 싫다는 ‘헬조선’ 원망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언론이 이런 것들을 기사화해 곱씹는 것은 과연 문제가 없나. 저소득층 학생들의 문제가 오직 생리대 문제뿐인가.

저소득층 학업 취업 생계 등등 숱한 난제가 산더미처럼 쌓인 복지에서 깔창 생리대는 극히 극단의 경우에 불과하다. 출처도 사실 확인도 불분명한 SNS 사연 하나를 콕 집어 마치 문제의 전체인양 기사를 쏟아내서 지자체들이 생리대 무상공급한다고 재정복지 문제를 포퓰리즘으로 운영하도록 언론이 유도해서는 안 된다.

언론의 밑도 끝도 없는 감성팔이 선동의 역기능은 이제 한계에까지 왔다. 언론이 그 호들갑을 떨고도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청년들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엉터리 보도로 남녀가 서로 증오하고 분노하도록 갈등만 더 키웠다. 신발 깔창 하나에 꽂혀서 우르르 기사를 써대면서 지자체의 복지포퓰리즘을 부추기고 있다. 이 정도면 언론이 공기가 아니라 사회의 공적이다.

이 나라의 정의로운 지팡이를 자처하는 언론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는데 불의에 분노하는 국민과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 그 책임에는 사회지도층과 가진자 만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로 지적하지 못하는 언론, 분노만 부추기는 선동 언론,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질낮은 언론의 책임이 없지 않다. 언론미디어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한명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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