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시스템에 자아도취 중국 vs 무역 확장 경쟁 뛰어든 서양
서양은 어떻게 동양을 따라잡았나

1270년 중국을 여행한 베니스의 용감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양쯔강을 통해 움직이는 거대한 교통량에 감명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양쯔강은 중국 대륙 중앙부를 횡단하는 거대한 수로의 일부다. 기원전 7세기에 건설되고 기원후 10세기에 아름다운 보대교를 갖춘 이 다리는 서양에서 온 여행가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양쯔강이 마치 바다와 같고, 이것을 글로 읽거나 전해 들은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을 것이라며 예찬했다. 14세기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도시는 역시 중국의 난징이었다. 몇 세기 동안 그곳은 비단과 면 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1420년 자금성이 완성되었을 때 명나라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문명을 뽐냈다.

반면 영국의 템스 강 주변의 풍경은 양쯔강의 그것에 비하면 조악안 돌덩이를 쌓아놓은 건축물에 불과했다. 물론 런던은 그 당시 주요한 항구도시로서 유럽 대륙과 각종 교역이 이루어지는 무역의 요충지었다. 하지만 중국의 대항해가 정화가 템스 강을 보았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템스 강의 다리는 보대교에 비하면 강바닥에 돌을 박아놓은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그 당시 중국인과 영국인 모두에게 템스 강에서 배가 출항하여 양쯔 강에서 정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했다. 배설물을 모아 도시 외곽의 논에 거름으로 썼던 중국과 달리, 런던은 하수도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렇게 정교화된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은 왜 서양의 발전에 무릎을 꿇었는가? 어떻게 서양은 대항해가 정화를 능가하는 탐험가를 배출할 수 있었나?

영락제가 숨을 거둔 후 중국은 정화의 항해를 즉각 중단시켰다. 특정 배의 제작을 금지시키고 항해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결정 뒤에 있을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유교 학자들이 정화가 들여온 신문물을 싫어해서였을까? 어되었든 서양은 중국과 아주 다른 방향의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두 문명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 1270년 중국을 여행한 베니스의 용감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양쯔강을 통해 움직이는 거대한 교통량에 감명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양쯔강은 중국 대륙 중앙부를 횡단하는 거대한 수로의 일부다. 당시 중국의 기술력과 거대함은 서양에서 온 여행가에게 놀라움을 주었던 것이다.


1497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바스코 다 가마에게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향신료를 찾는다’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비록 170명 규모로 아주 작았지만, 문명의 흐름을 바꾸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임무였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새로운 교역료를 찾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경쟁자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우월한 입지를 다지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였다. 아프리카 부족들의 조공 따위는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대항해와 달리 자신들의 영향력이나 기술력을 뽐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발견한 것은 예상치 못한 경쟁의 혜택이었다.

포르투갈을 필두로 다른 경쟁국가들 역시 해외 무역로 확장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에 아시아 전진기지를 건설했고, 1600년대 중반 네덜란드는 마침내 선박의 수나 수송량 모두에서 포르투갈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영국도 차례로 무역 확장 경쟁에 뛰어들었다. 

경쟁은 전쟁을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간 충돌은 유럽 전역에 또 다른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징세 방식의 발달이 그것이다. 각 국가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징세 방식을 체계적으로 발달시켰다. 1인당 세금으로 거둬들인 은의 그램 수를 기준으로, 1520년부터 163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왕은 중국 황제들의 조세 수입보다 훨씬 많은 양을 거뒀다. 

결국 서유럽이 중국을 집어삼킨 것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중국보다 더 치열하게 경쟁했기 때문이었다. 정체된 유교적 정치 시스템 아래에서 중국이 자아도취하고 있을 때, 유럽은 여러 분야에서 보다 나은 위치를 갖기위해 경쟁했다. 답은 간단하다. 경쟁이 서유럽과 중국의 거대한 간극을 만들었다 . 나보다 잘난 이웃을 보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자기계발에는 좋은 조건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치열하게 경쟁하자. 그것만이 우월한 경쟁력을 만든다. /정승범 단국대 중동학과

   
▲ 1497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바스코 다 가마에게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향신료를 찾는다’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비록 170명 규모로 아주 작았지만, 문명의 흐름을 바꾸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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