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 '5·18특법법' 입법 또 다른 의혹만 키워
지난 달 내내 쟁점이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합창-제창 논란과 법제화 문제가 어정쩡한 봉합상태인 상황에서 사고가 터졌다. 국민의당 원내대표 박지원이 5.18특별법 입법을 밝히며, 이를 둘러싸고 전운이 감돌고 있다. 그 직전 성역화된 5.18에 이의를 제기해온 논객 지만원 박사가 5.18유족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사람들은 예민하다. 그 이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 당시 소설가 황석영도 입을 열었는데, 그 바람에 새롭게 짚어볼 쟁점이 몇 개 드러났다. 이 상황에서 미디어펜은 3부작 칼럼 '광주5.18의 진실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5.18이 한국현대사의 축복이었던가, 악의 꽃인가를 점검하는 작업인데, 1)지식인에 대한 테러는 결코 안 된다, 2)반역 소설가 황석영은 자중하라, 3)5.18의 진실, 지역 자존심 걸고 광주가 규명하라 등의 순서로 싣는다. 이번이 세 번째 글인데, 조우석은 보너스 칼럼 '제주4.3, 여순사건 그리고 광주5.18'을 바로 이어서 내보낼 계획이다. [편집자]

3부작 칼럼 '광주5.18의 진실을 찾아서'-제3회

   
▲ 조우석 주필
지난 글에서 문제의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했다는 이른바 집단발포의 진상을 밝혔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하는 광주시민을 향해 군(軍)이 일제사격을 했다는 것 자체가 완전 사실무근이다. 그날 하루 민간인 사망자가 무려 61명이니 '광주사태=양민학살'이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위해 또 다른 진실 하나를 필자는 밝혔다.
 
정확한 통계에 따르면, 그날 M16(계엄군의 소총)으로 인한 도청 앞의 총상 사망자 민간인은 4명이 전부이며, 그 이외 다른 사람들은 광주 시내 제3의 장소에서 다른 원인 때문에 죽었다. 오인(誤認)사격 피해 등을 추론할 수 있고 전혀 다른 요인도 가정할 수 있지만, 계엄군에 의한 총상 사망자는 4명이란 사실은 요지부동이다.
 
이렇게 자신하는 건 2004년 이후 신기원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대법원이 5.18관련 수사자료를 일반에게 공개키로 결정한 뒤 그 무성했던 유언비어와 헛소문, 그걸 토대로 한 황석영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죽음을 넘어> 등에 담긴 정보란 엉터리라는 게 확인됐다.

서석구 변호사의 뒤늦은 후회

더구나 황석영 책이 북한책을 원전(原典)으로 짜깁기했으니 이적(利敵)표현물인데, 지금도 그런 걸 양심적인 기록물로 착각하는 이가 수두룩하지만  서석구 변호사도 그랬다. 국보법 위반 부림사건의 담당판사였고, 당시 온정적 판결을 내렸던 그도 옛날 읽었던 그 책을 믿었다. 지금은 황석영에게 속은 걸 분개하고 있고 그걸 전후해 애국우파로 돌아섰다.
 
실은 한국사회 모두가 속아왔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전두환과 신군부의 국가폭력이란 것 앞에 부르르 떨었고, 공권력을 미워했던 건 결코 정확한 사실에 기초했던 정당한 분노가 아니었다"라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광주5.18에 관한 기존 판결(1980년)을 뒤집었던 1997년도 '역사 바로 세우기'재판부를 사로잡았던 논리와 집단정서가 그쪽이었다. 당시 판결이 지금도 '광주5.18의 마패'로 통하며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고 있지만, 진위여부도 밝혀야 한다. 이런 얘기다. 1980년 재판 때는 광주시위대가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고 봤다.
 
때문에 5.18은 김대중에 의한 내란행위였다고 못 박았는데, 17년 뒤의 재판부가 이걸 뒤집은 것이다. 시위세력을 "헌법을 지키려 한 사실상의 준(準)헌법기관"으로까지 엄호했으니 180도 바뀐 것이다. 그런 논리 속에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당시 국가를 범죄자로 마구 몰고 갔다.
 
이후 모든 사람들이 전두환에게 돌을 던졌는데, 수사자료가 공개된 8년 전 이후 세상은 또 한 번 달라졌다. 정치색을 배제한 채 광주5.18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됐는데, 통계수치만 살펴봐도 그게 잘 드러난다. 즉 광주사태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166명이다.(수천 명이 도륙을 당했다고 믿는 황당한 소리와 달리 그게 팩트다.)

   
▲ 2007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 스틸 컷.

그들은 왜 광주교도소를 6차례나 공격했나

문제는 166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인데, 계엄군의 M16 소총으로 죽은 이는 36명이 전부다.(총알이 몸을 뚫고 나간 출구가 나팔꽃처럼 벌어져 금세 확인 가능함) 나머지 80명은 카빈총 등 무기고에서 탈취해 시민군이 가졌던 총에 의해 사망한 경우이고, 따라서 계엄군과 전혀 상관없다.
 
부상자 통계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게 주목할만한데, 부상자는 민간인 377명, 군경 265명으로 1.4대1의 구조다.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했고, 민간인은 당하기만 했다는 얘기란 완전 허구란 뜻이다. 장기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 재소자를 수용하고 있던 광주교도소를 시민군이 6차례나 집요하게 공격했던 대목도 실로 수상쩍다. 그런 게 민주화운동인가?
 
또 있다. 시민군들은 5월21일 광주-전남지역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북한책에는 44개로 되어있는데, 이게 정확할 듯)를 단 네 시간 만에(낮1시~5시) 털고 자체 무장에 나섰다. 군사작전 뺨치는 그런 행동이란 거의 조직적인 전투행위가 아닐까? 1997년 판결이 이런 요인을 눈여겨보지 못했던 건 물론이다.
 
그리고 이 모든 디테일은 2004년 말까지 창고에 꼭꼭 갇혀있었던 사실들인데, 막상 열어보니 유언비어로 나돌던, 계엄군이 휘둘렀다는 "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은 흔적도 없었다. 시위 진압 때 계엄군이 술에 환각제를 타서 마셨으며, 화염방사기가 동원됐고 헬기에 의한 기총소사까지 있었다는 따위란 몽땅 악성 마타도어라는 게 새삼 드러났다.
 
전라도 사람 씨 말리기 위해 경상도 군인만 뽑았다는 것도 거짓말, 유독 광주에 가장 많은 병력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이 모두 북한 책에 등장하며, 황석영 책에도 반복되지만, 어불성설이다. 일테면 5월18일 그날 서울의 고려대-동국대에는 각각 4개 대대, 3개 대대의 공수부대가 파견됐다.

5월27일 도청 진압작전 계엄군은 실로 신중했다

그에 비해 전남대-조선대에는 각각 1개 대대만 투입됐다는 게 정확한 사실이다. 더구나 전남대에 파견된 부대는 전북 금마에 있던 제7공수여단 소속인데, 호남 출신이 40%나 된다. 이런 상황이니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윤이상-황석영이 만들어 김일성에게 바친 북한영화 '님을 향한 교향시'에 그 끔찍한 장면이 등장하고, 그 영화를 의무관람했던 북한사람들 모두가  치를 떨었지만 모두가 속은 셈이다.(광주사태 때 시민군에 주먹밥을 나르던 임신부 최미애씨가 사망한 사실은 있지만, 그는 머리에 입은 총상으로 희생됐으며 그것도 계엄군이 아닌 제3의 손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최근 규명된 또 다른 결정적 사실 하나. 광주사태가 극적으로 종결된 5월27일 새벽 도청 진압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계엄군은 시민이든 누구든 단 한 명도 사살한 바 없다. 그게 명백한 진실이다. 그날 16명이 죽은 건 사실이지만, 모두 시민군의 오인사격에 따른 비극이었다.
 
그 사실은 김대령의 신간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규명되는데, 그만큼 계엄군은 극도의 조심스럽게 대응했고, 진입작전을 전개했다. 개탄스럽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말대로 거짓말도 100번을 반복하면 사람들은 믿기 마련이다. 그런 선전선동술에서 암시를 받았을까?
 
북한의 음험한 대남공작이 가세한 탓도 있지만, 이후 광주5.18은 '헛소문-과장-거짓의 바벨탑'으로 변해왔고, 5.18유족들은 권력집단 비슷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건 안 된다. 이유는 광주5.18의 실체적 진실을 찾는 게 광주사태 이후 펼쳐진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일테면 김대령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보면 썩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1979년 10월 이전부터 광주5.18 같은 대규모 국가전복음모를 꾸며온 남민전 조직은 주체사상을 신봉한 자생적 붉은 조직인데, 그들이 사람을 끌어 모을 때는 은어(隱語)를 즐겨 썼다.

   
▲ 성역화된 5.18에 의의를 제기해온 논객 지만원 박사가 5.18유족 수십 명으로부터 지난달 19일 집단폭행을 당했다. 현대사 갈등이 테러행위로 번진 중차대한 사건인데, 누가 하나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민주화항쟁 맞다! 그러나 魔가 끼었다

"주체사상 공부하실래요?"란 말을 써야 할 때는 "사회과학 공부하실래요?"란 말로 에둘러댔다. 그 이후 1980년대 대학가가 어떠했던가? 온통 해방전후사 공부를 포함한 사회과학에 빠져든 시기인데, 내용적으론 주체사상을 공부했고, 이른바 NL(민족해방)정서를 내면화했다. 그게 우연일까? 
 
문제의 광주5.18이 1980년대 대학가 풍토와 한국사회 전체를 기형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후 36년, 우리는 옛 상처를 치유 못했다. 국민의당 원내대표 박지원이 5.18특별법 입법을 밝히며,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며, 성역화된 5.18에 이의를 제기해온 논객 지만원 박사가 5.18유족 수십 명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던 일도 생생하다. 정말 물어야 하는 건 언제까지 과거사를 가지고 소모전을 거듭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평소 개진해왔던 '광주 5.18 문제 해법 3원칙'을 이 자리에서 천명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현명한 제안인데, 첫째가 36년 전 광주5.18은 숭고한 민주화항쟁이 맞으며, 광주-호남지역의 민주화 열망이 가장 높았음을 대한민국 모두가 인정하자는 것이다.
 
둘째, 그런 숭고한 민주화항쟁에 일부 국가전복 기도 등이 있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럼 해법은 무엇인가? 그걸 세 번째 원칙에 담았는데, 5.18의 진실을 광주지역 사람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밝히라는 점이다. 박지원처럼 타지역 사람들이 입을 열 경우 징역형을 때리려 하는 것은 하지하(下之下)의 술책일 뿐이다. 명심하길 바란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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