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겉모양으로 '사회참여' 외치는 패션좌파…지적 사기의 전성기
예로부터 한 시대의 문제를 꼬집고 비판하는 문학작품은 대중의 환영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소시민적 슬픔이 담긴 시를 쓰던 김수영은 1960년 본격적으로 사회참여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름을 알린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일찍 등졌지만 그의 작품은 문단의 지지를 받으며 더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김수영의 사회참여시는 대중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자유경제원은 이에 '김수영 가짜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 문단권력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3일 리버티홀에서 열린 김수영 비판 연속세미나 종합 토론회 ‘시인 김수영 바로보기 - 누가 김수영을 이용하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는 “김수영은 사회참여파로 ‘보이고’ 싶어 했지만 실제론 그런 역할을 부담스러워 했고 이리저리 얼버무리며 피해나갔다”며 “대표작 시 ‘풀’ 등 그의 문학도 이 같은 작가적 태도에 수렴된다”고 지적했다. 이 평론가는 “김수영은 일종의 ‘트렌드’로서 참여시를, 그것도 표현의 제약에 없던 시대에 잠시 손댔던 작가에 불과하다”며 “내용도 유치하고 그저 표피적으로 여러 얘기를 두서없이 늘어놓고 사라졌다”고 밝혔다.

이어 이 평론가는 “이런 경향은 사실 비단 김수영과 김수영이 활동하던 시대에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라며 “강신주 등 지금도 각종 문화예술계에서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평론가는 “지금은 일종의 트렌드로서 소위 ‘사회참여파’들이 득세하는 시기”라며 “이데올로기적 지식이나 일관성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유’ ‘혁명’과 같은 ‘겉모양’만이 패션처럼 소비되며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 시장경제를 ‘악’으로 압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평론가는 “강신주와 김수영 붐으로 대표되는 패션좌파의 전성기는 곧 지적 사기의 전성기”라고 평했다. 아래 글은 이문원 평론가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김수영, 그리고 패션좌파의 본질에 대해

1967년에서 68년 사이에 김수영과 이어령 간 펼쳐진 ‘불온시’ 논쟁이란 게 있었다. 약 3개월여 동안 각각 사상계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벌어진 논쟁인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은 많이 거론되지 않고 사실상 잊혀졌다. 그러나 이 논쟁은 김수영이란 인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힌트를 주는 일화다.

이어령이 조선일보 1967년 12월28일자로 실은 칼럼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에 대해 김수영이 사상계 1968년 1월호에 ‘지식인의 사회참여’란 글을 실어 반박하면서 벌어진 이 논쟁은 김수영이 먼저 ‘불온시’ 문제를 거론하며 논의가 시작됐다. 다음은 김수영의 글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써놓기만 하고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생각하고 고무를 받고 있다. 또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응모 작품에 끼어 있던 ‘불온한’ 내용의 시도 생각난다. 나의 상식으로는 내 작품이나 ‘불온한’ 응모 작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어령의 비판은 매서웠다. 이어령은 김수영처럼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길 기대하며 불온한 시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는’ 태도를 보이는 시인이 과연 참여파 시인이 맞느냐고 지적했다. 이렇게 약점을 정통으로 맞은 김수영은 엉뚱한 대꾸로 논쟁을 얼버무리고 만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정치적 의미에서의 불온성을 얘기하다 갑자기 정통으로 얻어맞으니 순식간에 ‘불온’의 의미를 확대시켜 버리고 도망가 버린 셈이다.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 김수영의 문학적 행보 그 자체를 암시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김수영은 늘 그랬다. 사회참여파로 ‘보이고’ 싶어 했지만 실제론 그런 역할을 부담스러워 했고 이리저리 얼버무리며 피해나갔다.

그의 문학도 당연히 이 같은 작가적 태도에 수렴된다. 대표작 시 ‘풀’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표적 ‘민중시’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배워온 이 ‘풀’은 당연히 의아함을 남긴다. 분명 1연에선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며 권력에 의해 탄압당하는 민중을 묘사하는 듯하면서도, 2연에선 갑자기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며 권력의 탄압이 오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먹은 민중을 묘사, 오히려 반민중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 우리는 '겉모양'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이기에 강신주와 김수영이, 다시 대중 '퍼포먼스'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자유 혁명과 같은 겉모양만이 패션처럼 소비되며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 시장경제를 악으로 압박하고 있다./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어딘가에선 갑자기 반문명적인 얘기를 꺼내다가도, 다시 “나는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사람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다시 자기 사변적인 얘기를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 김일성 만세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또 사라진다. 이에 대해 오세영 교수는 이렇게 진단하다.

“김수영 시의 또 다른 흐름인 참여시의 경우 4.19 이후 5.16 이전 표현의 제약이 거의 없던 시절에 쓰인 것이다. 시류를 탔던 것이며, ‘혁명을 잘 해보자’는 ‘어용시’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시의 고발 내용조차 관념적 추상적이다. ‘자유’ ‘혁명’이란 시어를 자주 썼지만 포즈(pose:겉모양)로서 쓴 것 같다. 그는 심지어 5.16 쿠데타도 ‘혁명’이라고 썼다.”

이제 김수영의 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일종의 ‘트렌드’로서 참여시를, 그것도 표현의 제약에 없던 시대에 잠시 손댔던 작가에 불과하다. 그 내용도 유치하고 그저 표피적으로만 여러 얘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사라진 작가다. 그저 ‘대중이 멋지고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방향’ 정확히 말하면 ‘시라는 장르를 소비하는 특정 소비층이 멋지고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뿐이라는 것이다.

패션좌파? 분명 그렇게 볼 수 있다. 좌익과 그 사상이 문화예술 콘텐츠를 주로 소비하는 젊은 층에 어떤 ‘이미지’로 비쳐질지 계산해 그런 스탠스를 취하고는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별다른 이데올로기적 경향성과 지식, 의지도 없는 예술가들이 바로 패션좌파의 중심에 서있는 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은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초기단계의 패션좌파 모델을 선보인 예술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경향은 사실 비단 김수영과 김수영이 활동하던 시대, 그리고 문학계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당장 지금도 영화, 음악 등 각종 문화예술계에서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 스탠스만 좌익 방향에 두고 있지, 실질적으론 별다른 사회참여를 하는 것도, 작품 속에서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예술가들 천지다.

   
▲ 강신주 등 김수영 붐으로 대표되는 패션좌파의 전성기는 곧 지적 사기의 전성기이기도 하다./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이제 왜 김수영이 다시 2016년 한복판에 다시 나타날 수 있었는 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지금이 바로 ‘패션좌파의 전성기’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트렌드로서 소위 ‘사회참여파’들이 득세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애초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이나 그 일관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유’ ‘혁명’과 같은 ‘겉모양’만이 패션처럼 소비되며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 시장경제를 ‘악’으로서 압박하고 있는 시점이다.

우리는 ‘겉모양’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이기에 강신주가, 그리고 김수영이, 다시 대중 ‘퍼포먼스’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수영은 많은 의미에서 ‘가벼운 반골’의 상징이다. 취하는 태도가 부드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사고의 깊이나 의지의 굳건함 차원에서 지극히 가볍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김수영이 좌익정치진영의 마스코트로서 활용되는 현실은 어떨까. 과연 그에게 좌익정치진영이 기대하는 ‘선동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의 시에 경도되는 젊은 세대가 과연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모습이 돼갈 지에 대해선 다시 오세영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으로 발제를 마친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왜 사변적으로 변했는지 압니까? 언어에 대한 인내심은커녕, 너무 사적인 이야기에 치우쳐 단 5행을 읽기 힘들어요. 그게 다 김수영의 영향이지요.”

김수영 붐으로 대표되는 패션좌파의 전성기는 곧 지적 사기의 전성기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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