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들, 지역균형 선발 요구전 기업 필요한 인재키우고 있는지 성찰을

   
▲ 조동근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명지대 교수
삼성의 이른바 총장추천제 사원채용계획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좌초됐다. 대학별로 추천인원을 할당하자 “삼성에 줄을 서라는 것”이냐는 힐난이 일었다. “대학 위에 군림하는 삼성, 오만한 삼성”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어떤 지방 국립대 총장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추천 제도를 즉각 폐지하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통한 지역균형발전 과제 수행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면서 비판의 날을 세웠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비판은 늘 따르게 돼있다. 하지만 비판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자기 경험에 의존한다. 그리고 상당부분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따라서 보편적 논거에 근거한 비판이기 어렵다. 자기 경험의 특수성이 받아들여지는 데서 겸손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하다. 우리 사회에 소통이 강조되면서 역설적으로 소통이 힘들어지고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모두 불통인 것이다. 불통인 사회의 치명적 결함은 중지(衆智)를 모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단지성’이 작동할 겨를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학위의 삼성, 오만한 삼성,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추천제도”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고 한다. 이는 사람을 뽑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전형요소를 아무리 다듬고 다단계 전형을 한다손 치더라도 소위 ‘제 1종 오류’(type I error)를 피할 수는 없다. 합격시켜야 할 지망생을 떨어뜨리고 불합격시켜야 할 지망생을 합격시키는 오류를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와 닿아 있다.

보다 일반화시켜 보자. 사람을 뽑기 어려운 것은.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y of information) 때문이다. 쉽게 말해 뽑는 쪽(기업)에서 보면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목이 타는 쪽은 ‘뽑히는’ 지망생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입사하면 경쟁자들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는 데, 상대방(기업)이 이런 사실을 몰라준다”고 아쉬워한다. 정보는 자유재가 아니기 때문에, 정보우위주체(informed agent)인 ‘나’(지망생)는 정보열위주체(uninformed agent)인 ‘기업’에게 “나는 경쟁자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득해야만 한다. 일종의 ‘신호발송’(signalling)인 것이다. 취업지망생이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열심히 쌓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을 알리는 ‘신호발송’인 것이다. 하지만 신호발송 수단이 제한되다보니 차별적인 신호발송이 어렵다. 불필요한 과당경쟁이 생기는 것이다. 사회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 삼성이 총장추천제를 폐지했다. 서울및 수도권과 지방대학에서 고른 인재 등용을 목표로 추진된 총장추천제에 대해 일부 지방대 총장들이 민간기업이 수용할 수 없는 지역균형선발을 요구하고, 정치권에서도 대학서열화등의 편향논리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일부 지방대총장의 불만은 오히려 제자들의 삼성입사를 더욱 어렵게 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볼 일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지망생의 인력 풀(pool)이 넓기 때문에 적합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 “수백대 일”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 인재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엉뚱한 사람이 선발될 수도 있다. 소문만 요란하고 먹을 것 없는 잔치일 수도 있다. 전형요소를 세밀하게 설계하더라도 지원자의 ‘숨은 특성’(hidden traits)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잠깐의 관찰’로 사람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해법은 생각 밖으로 쉬울 수 있다. 피(被)선발자를 “오랜 기간 동안 지근거리에서 관찰”해온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추천제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추천제가 정착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신뢰구축’이다. 추천할 만한 사람을 추천하고 또 이를 신뢰하는 것이다. 추천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같은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한국적 현실에서 삼성의 총장추천제는 진일보한 시도로 존중되었어야 했다.

삼성의 총장추천제에 대한 비판은 ‘줄 세우기’로 집약된다. 하지만 성균관대 출신을 서울대, 연·고대 출신보다 많이 뽑고, 한양대에 서울대와 같은 수를 배정한 것이야말로 대학서열화 파괴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균관대에 많은 인원을 배정한 것은 ‘반도체 인력확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삼성은 성균관대에 투자하고 있다. 성균관대에 많은 인원을 배정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삼성은 수지를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민간기업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을 어느 기준에 따라 선발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인가는 삼성이 제일 잘 안다. 삼성은 그동안 나름의 기준에 따라 “수도권, 충청권, 경상권, 전라권” 대학에서 인재를 선발해 왔다. 이번의 총장추천제도 ‘과거’의 지역별 채용상황 등을 감안했을 것이다. 따라서 총장추천제에 대해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지금 문제라면 과거에도 문제가 됐어야 한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삼성의 채용에 대해 불공정 시비가 제기된 적은 없다.

따라서 삼성이 특정 대학에 인원을 적게 배정한 것은 특정대학이 삼성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 데 대한 평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해당대학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민간 기업이 나름의 기준에 의거 배정한 인원을 놓고 ‘지역차별’ 시비를 거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민간 기업에게 “고른 인재 등용을 통한 지역균형 발전”에 동참하라는 주문은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삼성이 대학위에 군림하는 가? 그렇지 않다. 현실을 비틀어서 얻을 것은 없다. 삼성은 기업일 뿐이다. 졸업생을 배출하고 배출된 졸업생을 선발하는 입장에서 보면, 기업과 대학은 ‘갑을관계’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기능적 관계일 뿐이다. 삼성이 대학위에 군림했다면, 대학은 고등학교 위에 군림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삼성의 총장추천제도가 사실상 폐기된 만큼 '삼성고시' 소리를 듣던 기존의 공채제도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학생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삼성적성검사를 봐야 한다. 이것이 총장추천제보다 더 낳은 제도인가? 추천권의 오남용이 우려되기에, 총장추천 배정인원을 비밀로 지키지 못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허수아비를 공격할 이유는 없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사자는 “삼성과 삼성입사를 희망하는 지망생”이라는 사실이다. 총장은 제3자일뿐이다. 삼성에 졸업생을 추천하기 싫으면 추천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제3자가 지역균형발전 운운하며 판을 깰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총장은 대한민국의 지성 아닌가?/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