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이상 저소득층 문화접근권 보장 매체로 변화

   
▲ 황근 선문대 교수
3박4일의 긴 설 명절이 지났다. 아직도 남은 명절음식 처리하느라고 아내가 고민하고 있다. 오늘 저녁도 역시 차례지내고 남은 전, 갈비, 나박김치, 만두 찐 것이 올라와 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이글거린다. 그런데 밥 먹으면서 생각해 보니, 고향이 인근 1시간 이내에 위치한 근교여서 그런지 명절기간 동안 딱히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매년 명절 때만 되면 은근 기다려지는 것이 바로 TV프로그램이다. 누구말대로 ‘즐거운 명절은 TV와 함께’라는 구호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전에는 주로 연예인들의 장기자랑 특집 프로그램이 유행했던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외국인 우리노래 부르기 경연대회 같은 특집프로그램들이 자주 편성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다문화가정이 늘어나서 그런지 아니면 대한민국이 글로벌화되어 그런지 이제 그런 프로그램도 좀처럼 보기 어려워졌다.
 

그나마 아직도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명절 특집영화가 아닌가 싶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추석이나 설명절 기간 동안 특집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던 외화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많은 시청자들이 고대하던 특별 선물 같은 것이었다. 70년대 ‘벤허’나 ‘십계’는 단골 명화였고, 80년대는 ‘취권’ 같은 코믹무협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백 투 더 퓨처’라든지 ‘인디아나 존스’ ‘나 홀로 집에’ 같은 외국영화들이 특집 단골영화였다(물론 이들 중에는 아직까지 방송되는 것들도 있다).
 

그러더니 90년대 한국영화 전성시대에 들어서면서, 특집영화도 많이 변했다. 90년대 ‘서편제’ ‘투캅스‘ 같은 영화에서부터 이제는 개봉한지 1~2년도 안된 방화들이 방송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아직도 “이번 명절에는 어떤 영화들이 편성되었나?” 궁금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설명절에 방송3사의 특집영화들이 무엇이 있나 살펴보니 재미있는 점이 하나있다.
 

KBS ‘연가시’ ‘7번방의 선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방화)’ MBC ‘베를린’ ‘감시자들’, SBS ‘은밀하게 위대하게’ ‘강철대오’ ‘타워’ ‘도둑들’. 이외에도 몇 개 외화가 더 편성되었지만 존재감이 없어 보이고, 최근 1~2년동안 개봉되었던 방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역시 1,000만명 관객 동원을 밥 먹듯이 하는 국산영화들이 대세라는 분위기를 충분히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박이 난 국산영화들이 대거 방송되는데도 도대체 기다려지지도 설레지도 않는다. 전 국민이 거의 한번 씩은 영화관에서 봤다는 대박영화들이라 신기성이 없어서일까?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이들 영화들이 케이블이나 IPTV, 위성방송 채널들을 통해 지난 일 년 동안 신물 나도록 봤기 때문 아닐까?
 

   
▲ 4일간의 설명절 연휴기간에 지상파방송들이 <7번방의 선물>,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영화관에서 히트한 작품을 비교적 많이 방송했다. 지상파의 설특집 영화는 이제 VOD수요 급증에 밀려 힘이 빠지고 있는 듯하다. 지상파는 그래도 50대이상의 저소득층을 위한 문화적 접근을 보장해주는 보편적 서비스매체로 변화하고 있다. 사진은 <7번방의 선물>의 한 장면

솔직히 어느 때나 TV를 켜고 채널만 몇 번 돌리면, 어떤 채널에선가 분명 이들 영화중에 한편이라도 방송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근자에는 영화관개봉과 동시에 유료방송 VOD로 제공되고 있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VOD 1회 시청료가 영화관람료와 거의 비슷한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최근 방송시장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유료방송사의 VOD 수입이 급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월 2,500원 수신료를 1,000원 인상하는데도 거세게 반대하는 것에 비추어보면 거의 1만원에 육박하는 VOD시청자가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상파 방송사들도 설특집 영화니 뭐니 하면서 대대적으로 광고하지 않는 느낌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마지못해 겨우 설특집이라는 명목으로 편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든다. 아마도 모름지기 그렇게 시청율도 높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상파 방송사가 역시 힘이 많이 빠졌구나’라는 것과 더불어 ‘이제 지상파방송이라는 것이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는 고품질 방송이 아니라 저가로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보편적 매체 즉, 기본 시청권을 보장해주는 매체일 뿐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아직까지 드라마나 일부 예능 프로그램들이 강세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지상파방송이 전국민에게 선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특히 고가의 시청료를 지불하고 고품질 콘텐츠를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에게 지상파방송은 이제 별로 매력적인 필수재가 아니다. 여기에 지상파방송 조차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시청하는 30대 이하의 젊은 층에게 지상파방송이 끼어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제 싫든 좋든 지상파방송은 50대 이상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문화적 평등권을 보장해주는 보편적 서비스(universal service) 매체라 할 수 있다. 개봉관에서 혹은 유료방송에서 별도의 고가의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저소득 소외계층들을 위한 방송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굳이 공영방송이니 상업방송이니 하는 어려운 논쟁을 하지 않더라도, 유료방송과 인터넷, 모바일이 활성화되면서 지상파방송은 자연히 ‘공영적 방송’으로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스마트 디지털방송시대에 지상파방송, 특히 공영적 지상파방송이 소멸될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 갈 것 하나. 그렇게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상파방송은 기본적으로 모든 국민들이 부담하는 수신료라는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누구나 별도의 추가 부담 없이 특히 저소득층 시청자들도 기본적인 방송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지상파방송은 지상파방송만 무료로 수신할 수 있는 별도의 완벽한 자체 네트워크를 완비하고 있지 못하다. 아니 네트워크가 있다 하더라도, 케이블TV, 위성방송, IPTV 등 유료방송에 가입해야만 지상파방송을 수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지난 40년 이상 지상파방송사들이 직접 수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보다 케이블TV 같은 유료방송 혹은 지역방송사들을 통해 편리하게 돈 안들이고 송신해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평균 8,000원 내외의 유료방송에 가입해야만 지상파방송을 수신할 수 있다. 지상파방송을 포함해서 20~40개정도의 채널만 볼 수 있는 아파트 공동수신 가입자들도 월 3,000~4,000원의 수신료를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이는 아파트관리비에 포함되어 있어 모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최첨단 HD 디지털유료방송 가입자들은 월 15,000원 정도의 수신료를 부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KBS수신료가 면제되는 것도 아니다. 전기요금에 부가되어 반강제적으로 내야만 한다.
 

결국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상파방송을 보기위해 이중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KBS를 비롯한 지상파방송사들은 전국적으로 난청지역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느 가정이 별도의 텔레비전 안테나를 설치해 놓고 TV를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또 실제 그렇게 하려도 해도 도시난청, 주택구조, 미관 등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지상파방송이 디지털방송을 완료해도 아날로그로 송출하고 있는 일부 케이블TV 때문에 디지털방송을 시청할 수 없는 가구가 적지 않다.
 

점점 지상파방송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번 설명절 영화처럼 지상파방송의 존재이유는 분명 있다. 그렇다고 유료방송사들과의 경쟁에서 밀린다고 광고확대, 상업화 같은 처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누구나 부담없이 양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해,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재의 이유를 인정받는 장기적인 정공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쳐있는 수신료 인상도 가능할 것이다. /황근 선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