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햇볕정책·이념 갈등 틈새 북한 미사일 핵공격 엄포 빌미
   
▲ 이철영 굿소사이어티 이사·전 경희대 객원교수
올해는 6.25가 발발한 지 만 66년이 되는 해이다. 6.25 이후 남북간 교류는 1971년 8월 대한적십자사가 북한적십자회 측에 남북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회담을 제의하면서 처음 물꼬를 텄다. 그러나 그 후 수 차례의 회담에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행사가 최초로 성사되면서 남북교류가 본격화했다.

그 후 6.25 발발 50주년이던 지난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간 첫 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두 달 뒤인 2000년 8월 제1차 남북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졌다. 2007년 10월에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지난 2015년 10월 제 20차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졌듯이 외견 상으로는 남북교류가 크게 개선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이 걸핏하면 생트집을 잡아 가족상봉 행사를 정치적 흥정거리로 쥐고 흔들며 '개방'을 구실로 경제적 실리를 챙기면서 2016년 1월 6일 제4차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군사력 강화에만 총력을 기울여왔다. 북한과의 대화, 교류, 지원으로 얻은 대가가 고작 '핵무기 공포'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게 남북관계의 현주소이다.

작년 8월 북한의 지뢰도발 사건 이후 우리 군은 한동안 중단해왔던 대북방송을 즉각 재개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북한의 사과를 받아내겠다던 정부는 의미가 모호한 북한의 '유감' 표명을 명분으로 대북방송을 다시 중단했다. 그러고 나서 4개월 여 뒤인 올 1월 6일 북한은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하여 남북관계에 다시 찬물을 끼얹었고, 한 달 뒤인 2월 7일 다시 장거리로켓 발사실험을 하여 한국은 물론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에 끓는 물을 퍼부었다. 핵실험 직후 정부는 대북방송을 재개하고 로켓발사실험 사흘 후인 2월 10일 개성공단 폐쇄를 결정했다.

   
▲ 지난 5월 4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통일공원에서 열린 6.25전쟁 육탄10용사 제67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육탄10용사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사진=국가보훈처 홍보마당

북한은 대화와 교류를 내세워 경제적 이득만을 챙겨가면서 6.25 전쟁을 벌인지 60여 년이 지나도록 호전적인 도발의 수위를 계속 높여왔다. 2차에 걸친 양국정상회담 이후에도 제2차 연평해전(2002. 6. 29), 대청해전(2009. 11. 10.), 천안함 격침사건(2010. 3. 26) 등 도발의 수법이나 강도를 계속 높이다가 급기야는 2010년 11월 23일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토에 직접 포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2006년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쳐 핵실험을 하면서 군사적 도발의 위협을 최고조로 높이고 있다.

이처럼 북한이 무력도발을 계속하며 핵개발을 강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국민 중에 6.25가 북한의 남침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집단들이 공공연히 목청을 높이고 있다. 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 말할 수 없다는 사람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우선, '6.25가 남침'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사람들로부터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고 잘못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이런 불행한 현실을 바로잡는데 앞장서야 할 대다수 우리 국민들을 위해 6.25 전쟁에 관한 진실을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해 재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방한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은 용산 미군기지를 방문해 60년 전 6.25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언급하며 미군 장병들을 격려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문 속에는 "한국전쟁이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이 시작된 곳에서 끝났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곳에서 싸운 사람들의 희생을 빗대어 '무승부를 위해 죽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서 약동하는 민주주의와 고마움과 희망으로 가득 찬 이 나라 국민들을 둘러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합니다: 이것은 무승부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승리였습니다. 그때에도 승리였고, 오늘도 승리인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Because the Korean War ended where it began geographically, some used the phrase 'Die for a Tie' to describe the sacrifice of those who fought here. But as we look around at this thriving democracy and its grateful, hopeful citizens, one thing is clear: This was no tie. This was a victory. It was a victory then, and it is a victory today.")

미국 대통령이 6.25 전쟁을 일컬어 "이것은 승리. 그때에도 승리, 오늘도 승리."라고 표현한 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닌다. 만일 6.25가 남한이 북진통일을 하기 위해 북한을 침략한(북침) 전쟁이었고 미군이 이 침략전쟁에 참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침략전쟁을 시작했던 국경에서 휴전을 한 것을 두고 승리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도 승리"라는 표현은 당시 공산침략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영토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에는 "우리 국민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전혀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명령에 따른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만일 6.25가 남한이 벌인 침략전쟁이었다면 "지킨다(defend)"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6.25 전쟁에는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전투병력과 5개국의 의료지원팀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40개국이 물자와 수송을 지원했고 6개국이 전후 복구를 지원하는 등 총 67개국이 6.25 전쟁에서 우리를 지원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한 세계기록으로 공식 인정되어 기네스북에 등록되기까지 했다. 1953년 당시의 총 60개국에 불과했던 UN회원국 중 52개국과 교황청을 포함한 비회원국 15개국이 남한을 지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세계적인 참전과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공산침략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수호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6.25가 남한에 의한 침략전쟁이었다고 주장하려면 무슨 목적과 명분으로 거의 모든 UN회원국들과 교황청을 비롯한 15개국의 나라들이 이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의 침략전쟁에 참전했었는지를 먼저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25와 관련한 여러 문서와 기록들, 그리고 해방 이후 남북한과 인근 국가들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은 차치하고 단순히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따져보더라도 6.25는 북한에 의한 남침임이 명백하다. 당시 북한군은 6.25 침략 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기습공격에 쫓기던 우리 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의 유일한 교량이었던 한강교를 폭파했다.

전쟁 발발 다음날 우리나라의 요청으로 UN안전보장이사회가 급히 소집되었고, 뒤이어 우리나라의 파병 요청에 따라 UN회원국 16개국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전쟁 발발 6일 뒤인 7월 1일에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이 처음으로 부산항에 도착하여 7월 5일에 오산 부근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후퇴했다. 우리측 군대는 결국 7월 20일 대전을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8월 초에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지원하면서 이념적 갈등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북한은 공공연히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면서 이제는 세계를 상대로 핵공격 엄포를 놓고 있다. 사진은 사진은 2012년 12월 북한의 은하3호 발사장면.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6.25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우리측의 참담한 퇴각으로 일관했던 전쟁이다. 이세상에 한 치의 진격은 고사하고 후퇴로 시작하는 침략전쟁은 없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6.25 북침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6.25 당시의 남북한의 전력을 비교해 보더라도 남한이 북한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시 북한은 T-34 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남한은 단 1대의 전차도 보유하지 않았고, 북한이 전투기 등 170대의 군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남한은 단지 연습기 20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북한군은 중국내전을 통한 전투경험과 소련제 전차 등 최신예 장비로 중무장을 갖춘 막강한 전투인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우리 국군은 전차나 대전차화기가 전무하고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노후화된 경장비 위주로 무장된 채 공비토벌 등의 임무로 체계적인 전술훈련조차 받지 못한 상태라서 전력 면에서 북한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쟁을 벌이기 전에 미리 미국과 기타 UN회원국들의 지원을 받아 놓았을 것이 당연하다. 상식적으로도 맨손으로 하루 아침에 패퇴할 전쟁을 벌이는 나라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6.25전쟁은 북한이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남한을 기습 침공한 계획된 남침전쟁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서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친북집단들이 온갖 황당한 논리와 주장으로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을 현혹시키고 세뇌시키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천안함피격 조사 결과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하고 대북 쌀 지원이나 금강산관광 재개가 마치 평화적 대화의 전제조건인 양 떠들더니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로켓발사실험 직후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자 이를 맹렬히 비난했다.

우리가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지원하면서 이념적 갈등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북한은 공공연히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면서 이제는 세계를 상대로 핵공격 엄포를 놓고 있다. 북한을 규탄하고 응징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서 이념적 갈등과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조성해 온 집단들이 뒤늦게나마 남북간의 현실과 진실을 직시하고 반성토록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철영 굿소사이어티 이사·전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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