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예술세계 다룬 명작…2011년 이후 5번째 재연
[미디어펜=이원우 기자]"니체 없이는 잭슨 폴락을 논할 수 없어. 니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논할 수 없지."

연극 '레드'의 대사 일부다. 사실 '레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도 니체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읽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어려우니까 우선은 '레드'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요점만 정리해 보자.

니체는 비극(悲劇)의 기원을 태양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공생에서 찾았다. 통제와 절제와 이성의 신 아폴론, 그리고 과잉과 흐트러짐과 감성의 상징 디오니소스. 이 둘의 에너지는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이름이 바로 '삶'이다. 여기까지만 알고 가도 '레드'를 이해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 신시컴퍼니

'레드'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그의 조수인 켄의 2인극이다. 나오는 사람이 둘 밖에 없는데도 무대의 분위기는 연신 팽팽하다. 총 다섯 개의 막으로 구성된 작품 내내 두 사람은 서로를 들볶고 헐뜯으며 긴장 관계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처음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켄은 극이 진행될수록 마크 로스코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켄의 눈에 로스코는 거대한 모순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텅 빈 캔버스에 지옥의 문 같은 사각형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몇 달을 고뇌하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마크 로스코. 하지만 동시에 그는 대기업 씨그램이 신축하는 건물 레스토랑을 장식하기 위해 연작을 준비하는 자본주의적(?) 행보를 보인다.

자연광이라고는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 안에서 두 사람은 치열하게 예술에 대해 논쟁한다. 관객들은 미학과 강의실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유명 작가 존 로건(John Logan)이 쓴 이 작품은 2010년 개최된 제64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무려 6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마크 로스코 역할은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소화하고 있다. 강신일과 한명구다. 두 남자가 연기하는 마크 로스코는 똑같은 대사를 소화하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둘 중에서 외적으로 리얼한 쪽은 한명구다. 실제 마크 로스코가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냉소와 예민함을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덜 친절하고 덜 유머러스하다. 대사를 일방적으로 뱉는다. 켄의 말을 강압적으로 막아버리고 가벼운 손찌검을 하기도 한다. 관객들을 향해 '강의'를 할 때만 조금 친절해진다. 아폴론의 세계에 발을 디딘 채 디오니소스가 있는 쪽으로 점프하려는 느낌이다.

TV나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다 익숙한 강신일이 연기하는 로스코는 좀 더 '한국적'이다. 문장 끝에 "이눔아"를 붙이는, 된장찌개 같은 푸근함이 있는 마크 로스코다. 그는 청중들이 웃을 수 있는 틈을 주며, 덩어리를 만들어 대사를 날린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등을 댄 채 아폴론 방향으로 팔을 벌리고 선 느낌이다.

둘 중에서 누구의 무대를 택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결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어느 쪽이든 매력적인 대사가 연신 이어지며 귀를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2011년 한국에서 초연된 '레드'가 객석 점유율 90% 이상을 기록하며 매년 돌아오는 이유도 대사 자체가 주는 흡입력에 있다.

"런던에 내셔널 갤러리에 가면 램브란트가 그린 '벨사살의 만찬'이라는 그림이 있어. 바빌론의 왕 벨사살은 만찬을 베풀고 신을 모독해. 그래서 신의 손이 나타나 경고의 의미로 벽에 히브리어로 몇 자 적어. 메네 메네 테켈 우바르신(Mene Mene Tekel Upharsin). 왕을 저울에 달아봤더니, 부족하더라. 블랙이 나한테 그래. 너에겐 뭐가 그렇지?"

적어도 이 연극은 부족하지 않다. 공연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7월 1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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