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세계화에 신자유주의 비판…민주주의 남용하는 '평등주의' 선동
다큐같은 픽션, 〈EBS‘픽션’프라임 민주주의〉를 고발한다 4탄

■ 방송개요 

● 매체: EBS
● 프로그램명 : EBS다큐프라임 '민주주의’ 5부 민주주의의 미래
● 제작자 : 유규오 PD
● 5부 방송 일자: 2016년 05월 31일 (화) 저녁 9시 50분

5부작 다큐멘터리 "민주주의"의 키워드를 종합하자면 시민권력, 불평등, 자본주의, 세계화 논쟁, 反신자유주의 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그 목표는 검증받지 못한 평등주의로 귀결된다. 5편의 다큐를 모두 분석한 결과 떠오른 키워드는 결국 反세계화, 신자유주의 비판 이라는 것이다. 5부작 중 5부인 “민주주의의 미래”를 살펴보자.

EBS는 유럽과 미국의 차이를 구별도 못(안)하나?

공신력 넘치는 타이틀의 대학교수들이 줄줄이도 나오지만, 실상은 소세지 없는 핫도그이다. 방송에 출연한 필립 페팃(Philip Pettit)교수의 이론 중 하나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시킨 것처럼 기업을 국가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가 왔다는 듯한 지론을 펼친다. 필립 교수 역시도 이것을 대단한 금과옥조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장담한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의 탄생은 유럽의 경직된 교황권력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과 17세기 초 통상을 절실히 원하는 영국,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상인들을 비롯해 라틴왕가들의 지원을 받은 신흥자본가들의 활동에 의해서였다. 그것도 장장 200년 넘는 기간 동안 대서양을 중심으로 벌어진 통상무역의 결과물 이었지 시작부터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건국을 목표로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건국초기부터 카톨릭과 입헌군주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바탕위에 자유주의 이념을 기본으로 한 시장경제를 택한 결과가 오늘날의 미국이다. 물론 개신교적 가치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사회적 영역이었지, 종교적 이념을 경제정책에 반영한다는 발상조차가 금기시 되었다. 미국역사에서 종교적 이념이 경제정책에 반영이 된 유일한 사례가 있다면 1930년대 동부지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대거 정계로 진출해 만든 금주법이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금주법 시대에 나온 지하자금들이 미국이 관광산업과 같은 3차 산업으로 넘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긍정적 결과물을 이해시키기에 EBS방송 제작진들의 경제를 이해하는 시각과 역사적 지식들은 많이도 떨어진다. 건국 초기부터 제왕적 권력과 종교적 이념이 경제활동과 같은 실무영역의 이권에 개입하는 것을 사전에 봉쇄한 국가가 인류에 몇 개나 되나? 미국 민주주의가 성공한 바탕과 이면에는 기업가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왜곡하지 말자.

   
▲ EBS 다큐프라임의 목표는 검증받지 못한 평등주의로 귀결된다. 하지만 나치, 공산주의, 이슬람국가, 김일성 주체사상 모두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으로 출발했고 결과는 모두들 잘 알고 있다./사진=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위축시켰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도 역사적 사실과 경제적 상식에 한참은 벗어나 있다. 제이콥 해커 교수가 말했던 “7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정부의 과도한 세금에 있다”라는 이론은 마치 신자유주의자들은 극도의 친기업 정서를 통해 세금을 간면 시킨 인물들로 폄하된다. 그러나 70년대의 영국은 고질병인 “노동조합들의 정치세력화”가 정점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은 쏙 빼놓았으며 70년대 자유진영은 이미 냉전의 해체를 예상하고 정책을 짰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 역시도 배제한 채 신자유주의는 결국 부자들과 기업들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기존의 분배이론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이론을 내놓는다.

상투적 격언 : 민주주의를 남용 말라

이러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상투적으로 느껴지기 까지 하는 방송사의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이하의 해석과 이해이다. 이런 종류의 모든 방송의 결론은 결국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이 평등이고 어디서부터가 공정한 사회일까?

인류가 실험해 본 모든 종류의 정책들이 가져온 결과는 때로는 획기적이었고, 때로는 섬뜩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는 결국 인종청소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고, 냉전시기 형성된 사회주의 진영의 “계급 없는 사회(Classless Society)” 만들기는 역설적이게도 “극도의 계급사회(Absolute Class Society)”를 만들어 스스로 붕괴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서 미래를 찾자면 인간의 활동영역을 도덕적 가치로만 통제하기는 매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세계적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가 주는 메시지는 매우 명확하다. 한국어 해석에서 Selfish Gene을 이기적 유전자라고 해석 했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확대 지향적 유전자”다. 

도킨스의 이론은 인간뿐만이 아닌 모든 생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활동을 하게 되고 그것은 생명이 유지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여기에 사회-경제적 시각을 대입해 본다면, 공산주의가 주창한 위대한 실험(The Great Experiment)이 뜬구름 잡는 연극에 지나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이었다는 것을 모든 인류가 경험을 했다. 오늘날 벌어지는 이슬람 국가(IS)와 북한의 컬트적인 잔인성이 유지되는 거대한 명분은 결국 시민 권력과 종교적 권위의 도그마가 가져온 잘못된 명분이다.

나치, 공산주의, 이슬람국가, 주체사상 모두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으로 출발 했고, 결과는 모두들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언론과 일부학자들이 떠드는 자본주의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며 빈곤한 자들을 밟고 만들어 지는 것인가? 왜 이러한 질문에 개인의 경제활동의 결과물을 인정한 다는 단순한 결론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의 활동을 도덕적 준거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도덕성적인 결과만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고, 도킨스의 이론은 그 “위선에 대한 증거”를 생물학자의 시각으로 말 하는 듯하다.

   
▲ EBS 다큐프라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도 역사적 사실과 경제적 상식에 한참 벗어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이하의 해석과 이해도 문제다./사진=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령'에게나 헌정할 방송

그토록 민주주의 미래가 걱정이라면 사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지 말고 뚜렷한 방법을 제시하기 바란다. 물론 더 발전된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한다는 사명(?)으로 방송을 제작한 의도 자체를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추오도 없고, 아무리 세계적인 석학일지라도 민주주의의 미래와 자본주의의 미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니 그것은 어쩌면 신의 영역 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계화라는 거시적 명분이 어떻게 기존의 선진국들에게만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는지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종교적 도그마에 찌든 제3세계, 냉전시기 계획경제를 반강제적으로 시행했던 사회주의 국가들 모두 자본주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수혜를 주었던 모델과 대상은 다름 아닌 세계화였다. 

생산의 인프라가 깔려있지 않은 3세계 국가들의 자본주의 이행에 필요한 기반은 당연히 생산 인프라일 것이며 그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히 기존의 선진국 들이다. 방송에서 언급한 금융세계화가 낳은 불평등 이론은 이 다큐멘터리의 경제학적 오류의 정점을 찍는데, 그 이유는 제3세계 국가들은 아직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 농업경제의 초기단계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인프라에서 금융시장의 불평등을 갖다 붙이는 것은, 마치 7살 유치원생에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고 중상주의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해 논문을 써보라는 상식이하의 요구사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생긴다. 20세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정치경제 이론이 “대안적 세계화”였고 그것은 곧장 “21세기의 신사회주의”로 귀결되었으며 이번 EBS의 5부작 다큐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결론이 결국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경제 모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실제로 국가정책으로 승화시켜 “권위적 포퓰리즘”으로 완벽한 실패국가의 사례가 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대중권력과 분배정책이라는 달콤한 말과 정책으로 포장되어 실제로 실천한 하는 개인과 국가의 결론이야 어찌됐든 “도덕성”이라는 모호한 모양새를 보이며 대중의 눈을 가릴 것이지만, 대중의 권력이 금과옥조가 될 수는 없고 인기영합 주의가 가져오는 경제정책을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경제는 드라마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 활동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듯, 정치역시도 올바른 민주주의란 대중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송기획자들은 깨닫기 바란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언론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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