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사상전쟁…민주화 탈 쓴 사회주의 혁명투쟁·진보 용어 내세운 진지전
   
▲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우익은 죽었는가? 그 후 30년

1. 1988년, 서울, 양동안

나는 1982년부터 우리 사회에서 진행 중인 혁명적 좌익세력의 동향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해왔다. 1984년부터 대학생들이 뿌린 유인물의 내용을 보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세력이 좌익혁명세력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1986년 학생들이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자기들의 당면 목표로 설정한 것을 보면서 학생운동의 핵심부는 좌익혁명세력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87년 좌익혁명세력이 6·10항쟁을 주도하고, 그해 7~9월 과격한 노동자 대투쟁을 이끄는 것을 보면서 좌익세력의 위력을 실감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차질 없는 개최를 위해 정부의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자, 좌익세력은 그 틈을 이용해 이른바 ‘조국통일투쟁’을 전면에 내 걸고 군중집회와 시위를 한 층 강화했다.

그들은 ‘올림픽 공동개최’와 ‘반전반핵’을 외쳐대며 대한민국의 정상적 기능을 마비시키려고 달려들었다. 그해 6월 10일 6·10항쟁 1주년을 맞이하여 좌익은 남북학생회담 실현을 주장하며 서울 서북부지역과 판문점으로 가는 도로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좌익이 주도하는 대학생들의 판문점행은 저지되었다. 판문점으로 가려는 대학생시위대의 큰 규모와 격렬함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필자에게 보다 큰 충격을 준 것은 좌익의 시위에 대한 시민들과 야당의 반응이었다.

TV화면에 비친 시민들은 “학생들이 판문점 가겠다고 하면 가게 하지 왜 못 가게 해”라며 시위대의 판문점 행을 저지하는 공권력행사를 비난했다. 야당들은 좌익이 주도한 그런 군중투쟁을 방조적 태도로 침묵했다. 시민들과 야당들의 그런 태도를 보면서 나는 ‘큰 일 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젠 공권력만으로는 좌익세력의 혁명투쟁을 제압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좌익의 체제전복 투쟁을 저지하려면 민간인들의 건전한 우익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논설문을 작성하게 만들었다. 6월 하순에 탈고하여 신생 월간지 『現代公論』에 넘겼고, 7월 하순에 배포된 『現代公論』 8월호에 게재되었다. 「우익은 죽었는가?」의 요지는 “정부나 언론매체가 좌경세력이라고 부르는 세력은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는 좌익세력이고, 그들은 민족주의세력이나 민주주의세력으로 위장하여 각 분야에 침투해서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으며, 우익이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동안의 무기력과 오류를 반성·궐기해서 좌익세력을 제압·제거하지 않으면 머지 않은 장래에, 좌익세력과 제휴한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 다음에는 좌익세력이 주도하는 연합정권이 들어서고, 그 다음엔 완전한 좌익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지인들은 그 글이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 전에는 그 글을 읽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글’이라고 호평했다. 이러한 평가가 점차 확산되어 일부 각료들과 여당 간부들이 읽게 되었다. 이 글의 영향을 받아서 김용갑 총무처 장관은 8월 13일 “학생들의 좌경화 주장이 확산되고 이를 부추기는 상황이 계속되면 정부는 올림픽 후에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끝까지 수호할 것이냐, 아니면 무력하게 학생들의 주장에 끌려가 좌경을 허용할 것이냐를 두고 국민의 선택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정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내무부에서는 나에게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이 글을 별쇄본으로 대량 제작하여 지방행정기관과 산하단체에 배포했다.

8월 26일 한겨레신문과 동아일보가 내무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기사를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은 이 날부터 시작하여 무려 1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익은 죽었는가?」의 내용과 나에 대해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기사, 사설, 칼럼, 가십, 만평, 단신 등을 게재했다. 놀랍게도 동아일보도 며칠 동안 비판적 기사 사설 칼럼 등을 연속 게재했다. 특히 논설주간 김진현씨는 긴 칼럼을 통해 ‘정부가 그런 쓰레기 같은 글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는 반민주적 잘못을 범했다’고 욕했다.

   
▲ 좌익세력이 좌경세력과 결합하여 자기들의 사상적 정체를 감추고서 각 분야, 각 진지에 파고들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지만, 좌익세력이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이 명백히 노출되면 우리 국민의 심리저변에 있는 반공의식이 자극되어 그들의 헤게모니는 조만간 와해될 수 있다./사진=연합뉴스


언론의 반응과 관련하여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조선일보 등 오늘날 ‘보수 신문’으로 분류되는 신문들도 나를 비판하는 글들을 게재했다는 점이다. 그런 신문들이 나를 비판하는 내용은 “우도 좌도 모르는 자가 국민을 좌·우익으로 편 갈라 싸우게 하고 있다”, “양동안은 민주화세력을 좌익세력으로 모는 극우 파시스트이며, 그의 우익 궐기 주장은 민주화를 저해하기 위한 주장이다”, “이론가는 이론으로, 조직가는 조직으로, 재력가는 재력으로, 완력가는 완력으로 좌익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반공폭력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필자가 경제문제는 민간주도의 자유경쟁원리의 적용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며, 정치의 많은 문제는 대중의 기호에 따른 다수결원리에만 의해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필자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분자임을 뜻한다” 등이다. 이런 비평을 쓴 저명한 언론인들은 짐작컨대 내 글을 완독하지 않고 건성으로 비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에 보도된 나를 지원한 칼럼은 서울신문 논설위원인 송정숙 선생님이 쓴 칼럼이 유일한 것이었다. 송 선생님도 글의 내용에는 언급하지 않고 글의 말미에 붙인 ‘후기’의 비장한 각오를 거론하며 피해를 입을 각오하면서 자기의 소신을 밝힌 것을 두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해 비판할 것이 있으면 이론적으로 비판하면 되지 그를 인신공격한다든지 직장에서 몰아내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나마도 고맙기 그지없는 지원사격이었다. 내 글의 내용을 옹호하는 글은 어느 일간지에도, 어느 월간지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과 동아일보가 비판기사를 보도한 그날부터 정신문화연구원 박사과정협의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져서 나를 비방하고 교수직 사퇴를 요구했다. 그들은 한겨레신문과 내통 공동보조를 취했다. 기묘한 현상이었다.

한겨레신문과 동아일보의 첫 보도가 있은 다음날인 27일 야당들이 공격에 나섰다. 김대중 편민당 총재는 내무부가 양동안 교수의 글을 복사해 만든 우익 총궐기 책자에 대해 “학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적 피해망상증 환자가 썼다고 생각되는 글을 국가예산을 가지고 복사해 뿌렸다는 것은 오홍근 부장 테러사건보다 더 위험스런 일”이라고 주장했다.

서청원 민주당(YS당) 대변인은 우익총궐기 책자 배포에 관한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한국판 메카시즘의 악령을 되살려 좌우익의 극한적 대립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군사문화를 존치하려는 획책”이라면서 “올림픽 뒤 위기설 및 좌우익 대립 등을 유포하여 국민의 불안감을 조장하는 세력에 대해 강력 경고한다”고 말했다.

8월 28일 평민당은 정신문화연구원 양교수의 책자를 내무부가 제작 배포한 것과 관련 정부시정조치가 미흡할 경우 이춘구 내무장관의 해임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8월 31일 정문연 노조 및 대학원 동문회, 석박사과정 협의회 등이 합동회의를 갖고, 양동안씨의 교수직 사퇴를 촉구했다. 이들 가운데 1백여명은 이날 오후 4시 광화문 네거리, 성남시내에서 양동안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살포했다. 

이후 정문연 노조와 학생들은 안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양동안에게 사퇴압력을 가하고, 평민당은 밖에서 양동안을 사퇴시키라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김대중씨가 직접 나의 해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평민당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교육부장관은 교육부의 정문연 담당관을 내게 보내서 국내외에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테니 정문연을 떠나라고 부탁했다. 나는 내가 이 시점에서 정문연을 떠난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9월3일 KBS-TV 심야토론 프로그램 ‘민주화시대의 이념문제’에 양동안이 출연했다. 이 토론을 계기로 시청자들 중에는 양동안이라는 사람이 극우 파시스트가 아니며, 좌익세력이 큰 규모로 존재한다는 양동안의 주장이 근거 있는 말임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방송을 고비로 국민들의 좌익에 대한 우려가 확대되면서 양동안에 대한 공격도 완화되었다. 

야당과 한겨레 등이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양동안과 권부 간에 아무런 연결도 발견되지 않고, 글의 내용이 평소 양동안이 주장하는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양동안과 정부기관을 연관시켜 비판할 수 없게 되었다. 우익은 죽었는가의 내용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자 신문들은 더 이상 양동안에 대한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비판기사를 보도하는 것이 양동안을 홍보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양동안-우익은 죽었는가」 사건은 10월 들어 양동안이 5년 전에 「88년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준비 연구」에 참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다시 시끄러워졌다. 양동안 사퇴요구가 다시 거세졌다. 정문연 원장과 간부들은 양동안에게 사임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징계위를 열어 해임하기로 내정했다.
 
11월 22일 양동안은 김철준 정문연원장(전 서울대 역사학과교수)을 집무실로 찾아가, 자기의 사임문제 놓고 토론했다. “우익은 죽었는가, 정권교체 준비연구에 관해 설명하고, 그 내용에 내가 직장을 사임해야 할 만한 과오가 있으면 지적해 달라.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사임을 요구하든 징계하든 하라. 그런 근거도 없이 나를 해임하면, 법률이 살아있는 한 나는 재판을 통해 복직될 것이고, 선생님만 학자적 양심을 버리고 시류에 편승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나도 반공적이야. 앞으로 당분간 외부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약속하게. 그러면 내가 자네를 보호하겠네” 라고 말했다. 나는 당분간 외부에 글을 쓰지 않기로 약속하고 원장실을 나왔다. 

그 무렵, 국회 5공 청문회에서도 평화적 정권교체 준비 연구 문제가 거론되고 그 연구에서 양동안의 주장내용이 안정된 민주화를 위해 이런저런 민주화조치를 점진적 선제적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음이 알려져 그 연구에 대한 양동안의 참여는 문제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토론과정에서 양동안의 참여에 대해 ‘문제 없네’라는 판정을 해준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의원이었다.

지금 네이버에 양동안을 검색하면, 양동안 관련 신문기사로 4건이 나온다. 그 4건은 동아일보 88년 8월 30일자 ‘우익은 죽었는가’로 정계파문 단신, 한겨레 9월1일자 정문연노조와 학생들이 양동안 사퇴촉구 단신, 동아일보 11월 26일자 양동안 정문연 교수 사퇴의사 천명, 한겨레 11월 29일자 양동안 교수 사퇴천명 등이다. 양동안은 사퇴의사를 말해본 적이 없는데, 그들은 사퇴를 천명했다고 오보했다. 이 명백한 오보 기사를 양동안에 관련된 대표적 신문기사로 게재한 네이버의 의도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 우리 국민의 사회심리 밑바닥에는 반공정서가 존재한다. 북한 공산정권이 저토록 엉터리로 통치하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대해 각별한 원한이 없다면, 반공태도를 아니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이 기저적 반공정서가 내가 기대하는 마지막 희망의 단서이다./사진=연합뉴스


2. 미미한 충격

내가 「우익은 죽었는가?」를 쓴 것은 우경 성향의 정치 엘리트, 지식인,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10년 내외에 한국에서 사회주의혁명 혹은 그에 가까운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혁명 비슷한 사태가 초래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행히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동구 공산국가들의 붕괴라는 엄청난 요인이 돌발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글은 우경 성향의 인구들에게는 미미한 충격밖에 주지 못했다. 고작 대응책으로 마련된 것이 경찰 산하에 공안문제연구소를 만든 것과 일부 기업가들이 추렴하여 『한국논단』이라는 잡지를 창간한 정도였다. 내가 유력인사들을 만나 제안한 것은 좌익동향 및 대응책을 연구하는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가진 민간인연구소와 좌익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이론적 월간지였다. 만들어진 결과는 경찰 내의 연구소이고 『한국논단』은 양호민 주필, 이영희(양호민 제자) 편집장으로 하는 중도-사민주의 지향적인 잡지였다. 호국청년연합회라는 완력가들의 단체 등장도 그 반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우경인구를 각성시키려는 나의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한 셈이다. 2가지 원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우경인구가 좌익의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이었다. 좌익은 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전개하면서 그것을 민주화투쟁이라고 명명했다. 공산주의세력인 그들은 정부가 그들을 용공세력이라고 지칭하면 자기들은 민주화세력이지 용공분자들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면서 ‘용공조작하지 말라’고 외쳐댔다. 그들은 반미투쟁을 전개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은 반미가 아니라고 거짓 선전했다. 일반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과 공무원들까지도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다른 하나는 좌익세력의 팽창과 공세에 대한 나의 경고를 믿고 싶지 않은 대중심리 때문이었다. 당시 대중과 지식인 공무원들은 ‘남한 땅에 사회주의혁명세력이 이렇게 큰 규모로 존재한다면 국가에 재난이 초래될 것’이라고 크게 걱정하여, 그런 재난이 다가온다는 불안에 떨기보다는 좌익혁명세력의 거짓말을 사실로 믿는 편이 낮다는 심리적 태도를 가졌다. 

난치병을 진단 받으면 환자들은 자기가 그 병에 걸린 것을 믿지 않으려는 반응을 보인다. 그와 비슷한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상전쟁과 좌익혁명세력 문제에 대한 이 나라 국민의 태도이다. 1988년에 내가 경고한 것처럼,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동지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좌익의 규모와 위력이 크다면, 이는 매우 골치 아픈 사태이다. 참담한 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저 사람들의 말이 진실이 아니고 저 사람들의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진실일 것으로 믿는 것이다. 난치병을 치료하려면 그 질병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극히 어려운 치료를 과감히 진행해야 하는데, 겁이 나서 그렇게 하기 싫은 것이다. 

반면에 내 글은 좌경인구를 많이 자극했고,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유도했다. 자극 받은 좌익은 제2, 제3의 양동안이 나타나면 국민이 진실을 깨닫고 좌익에 반격을 가하게 될 것이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양동안에 대해 무자비한 비난과 핍박을 가한 것이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자기들의 상황분석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난 것, 민주화에 도취된 행복감 등 때문에 나를 비판했다. 

과거에는 나와 어울리던 우경 지식인들도 나를 멀리하려 했다. 나와 가깝게 지내면 극우 파시스트로 낙인찍힐 것이 우려되어서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의 완고한 반공입장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들 중에는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다. 사상의 자유시장론과 냉전소멸론을 거론하면서... 사상의 자유시장론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등장하면 적용될 수 없는 아이디어이며, 냉전소멸론은 국가 간의 대결 양상이 지역에 따라 판이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구상유취한 소리다.

결국, ‘우익은 죽었는가’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나만 왕따 당하고 괴롭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구 민주화가 본격화되면서 남한 사회에서는 ‘이제 공산주의는 죽었다’는 타당치 않은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우리 사회의 좌익에 대한 나의 경고는 ‘재떨이 속의 불꽃을 보고 화재 났다고 호들갑 떠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나는 김영삼 정권에 좌익-좌경인사들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경고했다가 그 정권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취급되었다.

이 나라의 좌익세력은 1993-4년 무렵부터 진지전 위주로 전략을 바꾸었다. 좌익의 진지전 본격화는 좌익이 자신들의 사회적 명칭을 진보진영으로 내 세우기 시작한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진지침투는 매우 쉽게 진척되었다. 우경인구들이 좌익의 진지전에 반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동전과 달리 진지전은 사회적 소음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은 좌익의 조용한 진지침투를 사회적 평화의 도래쯤으로 착각하여 반기는 편이었다. 나아가서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좌익의 진지전을 반체제분자들이 체제 내화되는 현상으로 미화했다. 좌익의 진지전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좌익은 짧은 기간 내에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 침투하여 헤게모니 장악의 발판을 확보했다. 이것이 1990년대 후반까지의 상황이다.

   
▲ 대한민국의 우경국민은 좌익-좌경세력의 대한민국 지배를 저지할 마지막 순간에 몰려있다. 사정이 이렇게 다급해졌기 때문에, 나는 28년 전에 했던 우경국민에 대한 질책성 질문을 그 때보다 더욱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우익은 죽었는가?"/사진=연합뉴스


3. 1988년과 현재의 사상 상황 비교

우경인구의 사상 문제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고생하기보다는 아예 문제를 외면하려는 경향 때문에, 좌익세력의 위협에 대한 나 같은 사람들의 경고는 별 효과가 없었고, 좌익의 진지전 공세는 쉽게 성공을 거두었다. 좌익 내지 좌경분자들이 정권의 심장부까지 침투된 듯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그런 현상은 이미 YS정권 때부터 나타났다.              

YS정권 때 좌익-좌경분자의 정권침투 증후를 알리는 사례로 고영복 간첩사건을 들 수 있다. 고영복 교수는 정문연 세미나 때 특이한 언행을 했다. ‘주사파 과대평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약 2개월 후에 고교수는 간첩으로 체포되었다. 고교수의 특이한 언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교수 간첩혐의 수사는 정권 내 고위인사들의 압력과 청탁으로 방해 받아 제대로 수사 못했다. 

좌경정권들이 들어선 후 좌익분자들이 크게 굴기했다. 

김대중 정권의 좌경성 입증 사례: 장명국 우대.
노무현 정권의 좌경성 입증 사례: 일심회 사건 수사 방해(국가정보원장 교체)

두 좌경정권에서 좌익의 진지전은 크게 진척되어 많은 분야에서 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일부 부문에서는 헤게모니를 넘어 좌익의 지배가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는 좌익분자들에 대한 견제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그런 기대는 빗나갔다. 이명박 정권은 출범 초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취하겠다고 천명했다. 좌경정도가 상당히 진한 인사들을 청와대 요직에 임명하는가 하면 황석영을 대통령 해외여행에 동반시켰다. 이명박 정권은 민간 부문에서는 고사하고 공공부문에서조차도 좌익의 진지전에 반격을 가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어떤가? 현 정권은 좌익의 진지전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는 고사하고, 좌익의 진지전 그 자체를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든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한국 사상전 상황은 1988년보다 훨씬 우익에 불리하다. 88년에는 좌익이 우세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좌익이 우세한 것으로 판단된다.  

1988년에는 좌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부문은 대학가와 노동운동계뿐이었다. 그 외의 영역에서는 좌익이 상당히 많은 동조자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아직 헤게모니 장악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치권에는 ‘명확한 전향기록이 없는 좌익운동권출신’ 국회의원이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다. 공안기관 직원들은 좌익혁명세력 저지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 사회 대부분의 영역에서 좌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권만 놓고 보더라도 ‘명확한 전향기록이 없는 좌익운동권출신’ 국회의원은 약 70명에 이른다. 단일 인맥으로는 최대인맥이다. 운동권 출신에다 운동권 주변에서 빌붙어 왔던 인사들을 합하면 그 수가 엄청날 것이다. 그에 더하여 정당의 사무당원들이나 국회의원 보좌관들에 운동권출신이 매우 많다는 점을 고려하게 되면 정치권의 헤게모니는 ‘명확한 전향기록이 없는 좌익운동권출신’들의 손 안에 놓여있다고 말해도 크게 빗나간 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좌익-좌경세력의 헤게모니 밖에 있는 부문은 민간 자본가 사회나 일부 종교집단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회 각 부문에서의 좌익-좌경세력의 헤게모니가 곧 좌익-좌경세력의 대한민국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자 간에는 아직도 갭이 있다. 물론 그 갭이 메워지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우경국민은 좌익-좌경세력의 대한민국 지배를 저지할 마지막 순간에 몰려있다. 사정이 이렇게 다급해졌기 때문에, 나는 28년 전에 했던 우경국민에 대한 질책성 질문을 그 때보다 더욱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우익은 죽었는가?”  
    
   
▲ 지금 사회 대부분 영역에서 좌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정치권만 놓고 보더라도 '명확한 전향기록이 없는 좌익운동권출신' 국회의원은 70명에 이른다. 단일 인맥으로 최대인맥이다./사진=연합뉴스


4. 한 가닥 희망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가진 대한민국이 존립을 계속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가 판가름되는 이 마지막 순간에 그 방향선회가 성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단서가 아직은 있다. 그 단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계에 진출한 ‘분명한 전향기록이 없는 좌익운동권출신’들이 전향 증거를 보이지 않은 채 ‘남몰래 전향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남몰래 전향’했다면 그들은 사과처럼 겉으로만 좌익이고 속으로는 좌익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존하기엔 너무도 위험한 희망의 단서이다. 누가 ‘남몰래 전향’ 했는지 알 방법이 없고, 설사 ‘남몰래 전향’했다 하더라도 다시 ‘남몰래 역전향’하는 것도 쉽기 때문이다. 어차피 남몰래 하는 것이니, 전향하든 역전향하든 남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국민의 기저적 반공정서이다. 우리 국민의 사회심리 밑바닥에는 반공정서가 존재한다. 북한 공산정권이 저토록 엉터리로 통치하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대해 각별한 원한이 없다면, 반공태도를 아니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이 기저적 반공정서가 내가 기대하는 마지막 희망의 단서이다.

좌익세력이 좌경세력과 결합하여 자기들의 사상적 정체를 감추고서 각 분야, 각 진지에 파고들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지만, 좌익세력이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이 명백히 노출되면 우리 국민의 심리저변에 있는 반공의식이 자극되어 그들의 헤게모니는 조만간 와해될 수 있다. 

우익-애국세력이 그런 뒤집기를 해낼 가능성은 아주 없지는 않다. 나는 그 가능성 여부의 판단기준으로 최근 우익-애국진영에서 제기한 용어전쟁에서 우익의 조반공세가 성사되느냐 여부를 생각하고 있다. 용어전쟁에서의 뒤집기 성공은 다른 부문에서의 사상전쟁에서 우익이 승리할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용어전쟁에서 우익진영의 반격이 전개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면, 그것을 문화전쟁으로 확산하고, 거기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 정치권의 좌익 헤게모니도 무력해질 것이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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