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지호 기자]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은행을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혜택을 몰아줬습니다. 방카슈랑스(은행에서 보험상품 판매)로 보험권 업무를 넘겼고, 펀드와 (신탁형)주가연계증권(ELS) 등도 판매가 가능하게 해줬죠. 그런데 증권사 법인 지급결제는 신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허용하지 않고 있죠. 저축은행, 새마을금고 등에까지 다 할 수 있게 했으면서 자기자본이 몇 조원이 되는 증권사를 못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한 대형 증권사 고위관계자는 아직도 증권사에 대한 법인지급 결제가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은행권이 증권사에 법인 지급결제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명분은 전혀 없다.

   
▲ 사진=연합뉴스

이미 10여년 전인 2007년 7월 자본시장법 제정으로 법적으로 증권사는 개인과 법인에게 모두 지급결제를 할 수 있게 됐다. 증권사들은 금융결제원에 특별참가금 3375억원까지 납부했지만 아직도 법인 지급결제 업무를 못하고 있다. 증권사들이 규모가 작아서도 아니다. 대규모 부실 사태를 일으켰던 저축은행이나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등도 모두 법인 지급결제 업무를 하고 있다.

현재 증권사 법인 지급결제 업무를 막고 있는 것은 금융결제원의 내부 규약뿐이다. 금융결제원은 법인 지급결제를 위한 소액결제시스템을 운영하는 독점적 기관으로 은행들의 필요에 따라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사단법인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은행 부총재보 출신이 원장으로 내려가고 KDB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사원으로 있지만 공공기관이나 정부부처가 아닌 일종의 은행권 이익단체로 보면 된다. 증권사에 법인 지급결제가 허용되면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까 두려워 은행권이 금융결제원 규약을 내세워 문을 틀어잠그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은 “금융결제원이 정부부처나 공공기관이 아니어서 직권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손을 놓고 있다.

물론 금융결제원 쪽에서도 할 말은 있다. 자본시장법 제정 당시 국회에서 한국은행 등 관련 주체가 증권사에는 먼저 개인에 대한 지급결제만 허용하기로 합의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합의가 있었더라도 자본시장법 제정이 10년이 다된 지금에도 증권사에 법인지급 결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업권 이기주의’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증권사 법인지급 결제가 허용되지 않으면서 국민에 대한 금융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증권산업의 경쟁력도 뒤쳐지고 있다. 일반 회사들이 증권사 계좌를 통해 다른 법인에 대한 이체가 불가능하다보니 기업에 대한 증권사의 영향력이 미약한 상황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올 1분기 국내 증권사 투자은행(IB) 사업 쪽에서 인수합병(M&A)이 차지하는 비중은 1.9조원으로 전체 IB 규모의 8.6%에 불과했다. IB 핵심 업무인 M&A보다는 채권(18.4조원, 80.6%), 주식(2.4조원, 10.6%) 등에 지나치게 쏠려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기업 등 법인에 대한 증권사의 존재감이 어떤 수준인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글로벌 IB는 몸집인 자기자본만 불린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그에 맞는 옷을 입혀주는 정책적 뒷받침도 따라줘야 한다. 증권사 법인 지급결제는 빠른 시일 내에 허용돼야 한다. 은행권에 증권사 고유업무로 여겨졌던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열어주던 그 신속함을 정부, 국회와 금융당국이 다시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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