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이전에 신학자였기에 볼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손'
신학자 애덤스미스만 보이는 ‘보이지 않는 손’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은 왜 신학에서 나왔을까. 왜 지금의 학문은 발전이 없을까.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이 되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아담스미스가 신학을 공부해서 성직자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소수일 것이다. 그가 대학에서 자연'신학'을 강의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의 전공이 도덕철학(신학)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정말 소수일 것이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하면 아담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떻게 발견 된 것인지 설명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독자께서 독자의 친구와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하나를 교환했다고 치자, 교환을 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돈이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교환자체는 눈에 보이는 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로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일 뿐이지 교환이라는 '행위'가 돈이라는 '물질'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1교환에서도 교환 '행위'는 돈이라는 '물질'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수 없이 많이 이뤄지는 시장에서의 거래도 거래가 '돈'으로 바뀐다는 생각은 관념적으로 하기 어렵다. 시장의 참여주체는 이 시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행위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기 어렵고, 시장 바깥의 관찰자는 시장에서 나타나는 돈이라는 것이 교환이라는 '행위'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빼앗은 것(사기)이라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 지금 경제 민주화나,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의 모든 근본 발상의 오류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교환이라는 '행위'가 돈이라는 '물질'로 변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 이전에 신학자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그 믿음이 전 세계를 뒤바꿔 놓았다. 고통과 질병, 타인으로부터 무한경쟁의 세계를 평화와 번영, 건강과 아름다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냈다.


아담스미스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그 '행위'가 '물질'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의 비밀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1:14). 신(神)이라는 존재는 이해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믿어야만 이해가 가능한 대상인데, 마치 수학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답이 있다는 것(혹 답 자체를 알고)을 알고 접근해 문제를 이해하는 것과 문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뒤 답을 내는 것은 답에 접근하는 데서 차이가 크다. 어떤 때에는 답의 가능성을 모르면 문제에 접근조차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스미스는 '말씀'이라는 형이상학적 질서가 '육신'이라는 형이하학적 실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랬기에 눈에 보이는 '물질'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와 '질서'를 읽을 수 있었고, 시장에 참여하지 않고 관찰을 통해서도 교환이라는 '행위'가 돈이라는 '실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어디서나 세상은 믿는 만큼, 그 자신이 볼 수 있는 차원만큼만 보인다.
 
그래서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혁신적인 개념으로 신의 섭리가 세상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스미스는 이렇게 세상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믿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질서들이었다.
  
분업도 마찬가지였다. 각자가 만들어야 하는 제품 하나의 생산과정을 분화시켜 서로 그 공정을 다시 '교환'한 것이다. 이런 작업의 '교환'과정이 계속 거쳐지면서 눈에보이는 '생산'량의 증가로 나타나는 것이다. 핀공장에서 분업 없이 핀을 만들면 하루에 20개도 만들기 어렵지만, 분업을 하면 하루 4,800개의 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눈에 보이는 세상을 꽃피게 한 것이다. 행위가 물질이 된 것이다. 그것이 유동성의 실체화, 돈이라는 것(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리얼리즘의 세계 속에는 무한 차원의 질서가 공존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지만, 질서를 보는 눈을 가지면 이 하나는 0으로 보이기도 하고 1로 보이기도 하고 영원(무한)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질서를 보려면 우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이 세계를 눈으로만 관찰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세상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뇌의 착각을 깨우려면 먼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을 확실히 믿고 나서야 공존하는 다른 세계의 질서가 보인다.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지만 이것을 다른 이들에게 증명할 수가 없다. 다른 이에게는 안 보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 자생적 질서와 같은 것들은 수치나 지표로 증명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 이치를 믿고 행해야 그 결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결과물이 나타난다. 왜 지금 사람들의 생산량이 감소하고 가난해 지는가? 바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세계관 속에서는 결코 번영할 수 없다. 이데아는 무한해서 물질로 나타 날 때도 무한하게 나타난다. 반대로 물질은 유한해서 이것을 제아무리 무한하게 하려해도 언제나 그것은 부족하다.
  
이를 다른 말로 '세상의 물건으로 사람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한 없이 부족하나, 서로가 서로의 만족을 위해 재화가 유통된다면 한 없이 작은 물건으로도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시장 바깥의 관찰자는 시장에서 나타나는 돈이라는 것이 교환이라는 '행위'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빼앗은 것(사기)이라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 지금 경제 민주화나,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의 모든 근본 발상의 오류는 여기에서 나타난다./사진=미디어펜

  
학문의 수준, 사회의 수준이 낮은 이유도 간단하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차원적 세계, 고차원의 질서는 이해하기 때문에 인정(믿음)하는 것이 아니다. 믿기 때문에 보이고, 보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수학문제를 풀 때 문제가 안 풀리면 풀이와 답을 외우고 연습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
 
초감각적 질서에 대해 내가 아무리 논해도 믿기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다만, 감각적 질서라는 것이 초감각적 질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각적 질서는 초감각적 질서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결코 나타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믿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아주 중요한 차이는 경제시스템의 차이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결과에 불과하다. 진짜 차이는 '유신론'이냐 '유물론'이냐다. 공산국가 치고 신을 인정하는 국가는 드물고, 자유국가 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국가도 드물다.
  
신에 대한, 고차원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학문은 결코 한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지금 보여주는 학문은 우리가 가장 멀리 나아갔던 학문의 세계 그 이하의 변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신론자, 유물론자가 국부론을 풀어쓰는 것은 대단히 웃긴 일이다. 보지도 믿지도 않는 세계를 자신의 지평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딱 맞게 풀어쓴 국부론'(저자 한정석)을 읽어보지도 않고 추천했던 이유도 저자가 유신론자이기 때문에 아담스미스가 본 지평을 충분히 보고 설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Liberalism(자유주의)에 대해 나와 다른 자유주의자들의 견해가 종종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사족을 더 붙이자면, 교환이라는 행위가 돈이 된 것처럼, 돈도 만족이라는 행위가 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조삼모사는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먼 미래나, 동일하게 인간 군상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이야기다. 그 질서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자유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무제한의 풍요로 이끌어 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의 도덕규칙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 이전에 신학자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그 믿음이 전 세계를 뒤바꿔 놓았다. 고통과 질병, 타인으로부터 무한경쟁의 세계를 평화와 번영, 건강과 아름다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냈다. /손경모 자유인문학회 회장

(이 글은 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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