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산타령 이창배 노력으로 68년 문화재 지정…놀량사거리는 우여곡절
본지 낚시전문대기자이자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하응백씨가 국악계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의 선후 문제와 문화재종목 사유화에 대한 의견이 담긴 글을 기고했다. 이에 본지는 3회에 걸쳐 하응백씨의 특별기고를 전재한다. [편집자 주] 

1. 글을 열며

   
▲ 하응백 문학평론가
2016년 6월16일 소월아트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 19호 경기선소리산타령 발표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 프로그램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 19호 예능보유자인 황용주 명창(이하 존칭 생략)은 "이 선소리 산타령이 국가 무형문화재 제 19호로 경기선소리산타령과 서도선소리산타령이 아울러 지정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진술 중 "서도선소리산타령이 아울러 지정"되었다는 것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자신만의 자의적 주장이다.
 
또한 이 프로그램에 축사를 쓴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는 "1927년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는 경기산타령은 불규칙 리듬이 많고 비교적 느리고 매끈한 반면, 서도산타령은 규칙적이며 템포가 빠르고 요성이 격렬하다는 점을 들면서 '서도산타령은 경기산타령의 변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 어디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
국악계의 발전과 정화와 사회적 정의를 위해, 그리고 문헌의 자의적 해석과 문화재 종목 이기주의와 종목 사유화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필자는 서도산타령(놀량사거리)과 경기산타령 문화재 지정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선후관계가 어떠한지 살펴볼 것이다.
 
필자의 글에 오류가 있거나 진실과 어긋난 점이 있다면 누구와도, 언제, 어느 장소에서건 공개 토론에 임할 수 있음도 아울러 밝힌다. 

2. 산타령의 명칭과 유래

우리 민요 중에 발림을 섞어가며 서서 부르는 노래를 입창이라 한다. 입창의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놀량이다. 놀량은 산타령, 판염불 등의 다른 명칭으로도 불렸다.
 
신재효가 정리한 박타령에서 놀부가 박을 타는 장면에서 "너희들 장기대로 염불이나 잘하거라. 사당의 거사 좋아라고, 거사들은 소고치고, 사당의 절차대로 연계사당이 먼저 나서 발림을 곱게 하고, 산천초목이 다 성림한데 구경가기 즐겁도다" 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재효의 변강쇠가에도 거의 흡사한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마당은 1870년대 초반에 정리된 것이기에 1870년대에는 현행의 놀량사거리가 현대와 같은 형태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놀량사거리를 연희한 담당층은 사당패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되는 바, 조선 말기 진주목사를 지냈던 정진석이 1872년 편찬한 『교방가요』에도 잡요(雜徭)편에 놀량을 "산타령, 놀량, 방아타령, 화초타령"이라고 하면서 "이것들은 걸사나 사당이 부르는 것이다. 모두 노랫말이 음란하고 비루하다. 지금 거리의 아이들과 종 녀석들까지도 이 노래를 잘 따라 부를 줄 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성무경 역  『교방가요』, p.227)
 
신재효와 정진석은 1870년대 초반 거의 같은 진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만 해도 사당패가 전국적인 순회 활동을 하면서 놀량사거리를 불렀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놀량사거리와 사당패의 존재를 입증할 더 확실한 문헌도 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능화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에 이른바 사당패라는 것이 있다...(중략)...내가 나이 어릴 때 괴산 고을에서 사당패를 보았다. 패에는 남녀가 한데 있으니 남자를 남사당 혹은 거사라고 하고 여자를 여사당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를 모갑이라고 했다. 한 모갑의 통솔 밑에 남자가 8명 또는 9명에 여자가 한두 명씩은 있었으니 모두 묘령의 여자였다...(중략)...그 흥행에 있어 남자가 손에 소고를 잡고 무대 위에 벌려서고 여자가 마주서서 먼저 노래(시속의 잡가를 꺼내면 남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서 그 노래를 받는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능화가 1861년 출생이니 이능화가 어린 시절이면 대략 1870년대 초반일 것이다. 이능화의 글은 1870년 초반 실제 상황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당패는 1870년대 이후 점점 사라지게 되면서 20세기 초반에는 각 지역의 노래패 집단으로 정착하게 된다. 특히 서울 경기 지방과 평양 지방과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놀량사거리는 토착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토착화가 어느 정도 진행한 1910년대 놀량은 서울경기지방의 산타령, 평양 지역의 놀량사거리, 전라도 지방의 화초사거리로 각각 분화되기에 이른다.(김인숙, 『배뱅이굿 음악 연구』,pp.18∼22.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10년대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각종 잡기집의 명칭을 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평양에서 간행된 『신구잡가』에는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이라는 명칭이 각각 나오고, 같은 해 박춘재 구술로 서울에서 간행된  『신구시행잡가』에는 판염불,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이는 사당패 집단에서 토착화된 노래패 집단으로 놀량사거리 연희의 담당층 변이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며, 또한 평양 중심의 놀량사거리와 서울 경기 중심의 판염불계 산타령이 정착되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헌 자료 외에 고음반 자료를 살펴보는 것도 놀량사거리와 산타령의 전승과 변화 양상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놀량 음반은 양우석, 박월정, 표연월, 이진봉, 김옥엽, 박춘재, 문영수, 최섬홍, 이초선, 최순경, 김옥산, 이산옥, 김진명, 이영산홍, 김태운, 김칠성, 김옥희 등 17명의 녹음 자료가 남아 있다.
 
앞산타령 음반은 양우석, 박월정, 이진봉, 김옥엽, 박춘재, 문영수, 최순경, 김옥산, 이산옥, 김진명, 이영산홍, 김칠성, 김옥희, 김난홍, 김옥희, 민칠성, 이영자, 김연옥, 이금옥 등 19명의 음반이 남아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제 강점기 남아 있는 놀량과 산타령(앞산타령, 뒷산타령) 음반이 거의 모두 서도잡가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이다. 단 김태운이 부른 앞산타령만 경기잡가로 분류하고 있었다.

경기 명창의 대표적 인물인 박춘재의 음반에서조차 놀량을 서도잡가라고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음반을 녹음한다는 것은 일제강점기에는 특히 대중성이나 지명도가 있는 명창들에 한하는 것이었다. 놀량이나 앞산타령이 서도 명창들에 의해 대부분 녹음이 남겨졌다는 사실과 서도잡가로 분류했다는 사실은 서도 계열의 놀량이 일제 강점기 당시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행의 경기산타령이 서울과 과천 등에서 동네패들이 불렀던 노래였다면 서도의 놀량사거리는 명창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보급된 주류의 놀량이었던 것이다.
 
3. 경기산타령과 놀량사거리의 문화재 지정
 
일제 강점기의 음반은 국가의 도움과 같은 행위가 없음으로 해서 오히려 당시의 주류를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즉 팔려야만 하는 음반이었기에, 당대의 인기있는 명창들이 주로 녹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서도잡가로 분류된 놀량 혹은 산타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것은 당시 서도의 놀량사거리가 훨씬 더 많이 보급되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놀량사거리만을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명창은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놀량사거리가 기생보다도 더 천대받던 집단인 사당패가 불렀던 노래라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도의 명창들은 수심가나 관산융마나 초한가와 같은 좌창, 긴아리와 난봉가와 같은 민요를 주로 부르고 놀량사거리는 주요한 레퍼토리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경기산타령도 마찬가지였다. 이창배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집이 하왕십리였으므로 선소리 명창인 탁복만과는 이웃에서 살았고, 이명길도 상왕십리여서 놀러 다니다가 선소리 산타령을 배우게 되었다. 조선가무 연구회 발표시에는 필자도 선소리산타령으로 출연한 바 있다. 필자는 처음에 국악을 배울 때 선생과 선배들이 배우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을 무릅쓰고 배웠다."(이창배, 『한국가창대계』, p.323)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창배는 스승인 최경식에게서 시조, 가사, 곰보타령과 같은 휘몰이잡가를 배웠지만, 스승은 이창배에게 선소리 산타령은 배우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즉 서도의 놀량사거리건 경기산타령이건 간에 전문 소리꾼은 그것을 주요한 레퍼토리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정통의 명창들은 산타령을 멸시 혹은 무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배는 동네 형이었던 탁복만, 이명길 등에게서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이 점이 바로 이창배의 선견지명이고 탁월한 점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전쟁을 거치면서 세상은 바뀌어 갔다. 세상이 변해버린 것이다. 1961년 5.16으로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가동했고, 이 최고회의에서 문화재보호법을 제정 시행하기에 이른다. 1962년 발효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무형문화재를 지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종묘제례악을 필두로 차례로 무형문화제가 지정되어 갔다. 당시 이창배는 일찍부터 무형문화재 제도의 중요성을 파악하였고, 또 사당패와 같은 기층민중들이 불렀던 선소리 산타령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음악분야에서 중요무형문화재는 종묘제례악을 필두로 다음 표와 같이 지정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이 표를 보면 선소리산타령은 그 중요도에 비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창배는 "1968년에 성경린, 장사훈 두 분의 조사로 경기입창 <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김태봉·정득만·김순태·유개동과 필자가 각각 지정을 받았다."(이창배, 『한국가창대계』, p.321. 강조는 필자)라고 하고 있다. 제자인 황용주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스승인 이창배가 자신의 저서에서 분명히 자신은 경기산타령으로 문화재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조사보고서는 1966년 8월에 작성되었고(<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 30호>, 문화재관리국)문화재 지정은 2년이 지난 68년에 이루어졌다.
 
이창배의 노력으로 경기산타령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반면 서도입창인 놀량사거리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경기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968년 12월 또 하나의 조사보고서가 작성되는 바, 그 조사자는 경기산타령 조사자였던 장사훈이었다. 장사훈은 이 조사보고서에서 서도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기에, 지정할 것을 문화재관리국에 권고하였다.(<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 51호>, 1968.12) 만약 당시 이창배가 경기산타령과 동시에 서도산타령으로 문화재로 지정받았다면 같은 조사자 장사훈이 또 서도산타령 조사보고서를 작성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창배가 경기산타령으로 문화재가 되었으므로 단연히 서도산타령 역시 전승자가 있다면 조사를 했어야 했었다. 1968년 당시 장사훈 보고서의 전승자는 김정연과 오복녀였다.
 
하지만 이 조사보고서에도 불구하고 김정연과 오복녀는 놀량사거리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지 못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1969년 9월 2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 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었던 서도소리 명창 장학선이 1년만인 1970년 9월 5일 타계하고 말았다. 통산 조사보고서가 나오고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에는 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바, 김정연과 오복녀가 장사훈의 조사보고서대로 놀량사거리로 문화재를 지정받기 직전으로 추측되는 1970년에 장학선이 타계함으로 인해 제 29호 서도소리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해방 이전 기라성 같았던 서도소리 명창들은 광복과 전쟁과 분단 이후 거의 사라지고, 1970년 무렵 생존해 있으면서 명창 반열에 있었던 분들은 장학선, 이반도화, 이정렬, 김정연, 오복녀, 김죽사 정도였다. 이 중 장학선은 1970년에, 이반도화는 1973년 타계했고, 이정렬은 아들을 따라 도미(渡美)하고 말았다.(이창배, 『한국가창대계』,P.273) 이렇게 되자 서도소리나 놀량사거리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정도의 실력과 연륜을 갖춘 명창은 김죽사, 김정연, 오복녀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중에 김죽사는 김정연의 친언니로 개인적 욕심이 없었고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어 했다(제자 한명순의 증언). 때문에 장학선의 타계로 공석이 된 제 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1971년 1월 8일 김정연과 오복녀가 자연스럽게 지정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놀량사거리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는 종목이었으나, 김정연과 오복녀가 제 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공백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연은 놀량사거리를 한국민속예술축전과 같은 데에 한명순, 이문주 등의 제자들을 데리고 여러 번 출품하면서 그 전승을 이어 나가다가 1987년 타계하였다.
 
김정연의 사후 이문주와 한명순은 놀량사거리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그리하여 아주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2009년 이북5도 위원회는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 3호로 놀량사거리를 지정하였다. 이 종목의 예능보유자는 당연히 김정연의 맥을 잇는 이문주와 한명순이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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