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영웅'이자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기둥' 이규혁(36·서울시청)이 마지막 올림픽 남자 500m에서 18위에 그쳤다. 하지만 4년 전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 이규혁/뉴시스


이규혁은 10일(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해안 클러스터의 아들레르 아레나에서 열린 2014 소치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2차 레이스 합계 70초65를 기록, 18위에 머물렀다.

한때 남자 단거리 세계 무대를 호령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이규혁의 이날 성적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아직 올림픽 메달이 없는 그에게 10위권 내에 들지도 못한 것은 속상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 그는 레이스를 마치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4년 전인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이 슬펐다"며 눈물을 쏟아냈던 이규혁은 더 이상 없었다.

이규혁은 믹스트존에 들어서도 "올 시즌 너무 못해 불안한 부분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더 오래 지내면서 체력을 보강했고, 일찍 와서 적응 훈련을 해 좋은 느낌이다"며 웃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웃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도 나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밝게 인사했다"며 "4년간 운동해왔고, 올림픽은 그것을 인정받고 싶은 무대다. 지금도 '꼭 1등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다"며 "4년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 힘들었는데 지금은 즐겁다"고 밝혔다.

"의식적으로 즐기려고 하고 있다"는 이규혁은 "4년 전에는 메달에 집착해 힘들었다. 주변에서 '즐기고 오라'는 말을 많이 해 이번에는 노력하고 있다. 불안해하면서도 즐기고 있는데 '한쪽만 봐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에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규혁에게 이번 소치올림픽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 무대다. 동·하계를 통틀어 한국 선수 사상 최다인 6회 연속 올림픽 출전에 성공한 이규혁은 이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레이스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규혁은 12일 1000m에 출전한다.

'마지막 레이스'를 정리해달라는 말에 "없다"고 답한 이규혁은 "이번에 500m 레이스를 하면서 1000m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능성을 봤다"며 "원래 1000m에 초점을 맞춰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1000m는 자신감이 있고, 하고 싶은 스타일이 있다. 하고픈 스타일의 스케이팅을 하도록 하겠다"며 "초반에 승부를 내고 그 다음에는 버티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다. 이제 나이가 있어 체력 탓에 힘들지만 장점이니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이라고 각오를 드러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이번 대회 초반 성적이 좋지 않다. 밴쿠버올림픽에서 남자 5000m 은메달, 1만m 금메달을 딴 이승훈(26·대한항공)은 남자 5000m에서 12위에 머물렀고, 모태범도 메달을 따지 못했다.

이규혁은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 경기다. 정당하게 시합을 하는 것이다. 오늘 모태범도 그저 2월10일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며 "걱정을 하기보다 메달권이 아닌 선수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선수들이 더욱 힘을 내고 발전해 우리가 빙상 강국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규혁은 네덜란드가 남자 5000m와 500m 메달을 모두 쓸어담은 것에 대해서 "대표팀 선수들이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이 좋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선택을 하고, 정상에서 만난다"고 분석했다.

"이번에 나도 허리 부상이 있다고 어필해 컨디션 조절이 수월했다"고 말한 이규혁은 "선수들 나름대로 훈련을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강석도 조금 더 좋은 성적이 나왔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는 대표팀이 되면 일정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제 10위권 밖에 있는 선수이지만 이규혁은 다른 선수들에게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 이날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미셸 멀더(28·네덜란드)는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이규혁을 꼽고 있다.

이날 경기 후에도 이규혁은 다른 국가의 선수들과 서로 다독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규혁은 "현재 뛰는 선수들이 어릴 적부터 나를 봐왔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도 봤기에 대접하고, 존중해주는 것 같다"며 "다들 마지막 올림픽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응원을 받는 것 같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규혁은 "정말 이 종목을 선택하기를 잘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은 후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미디어펜=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