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리더십
자유경제원은 2014년 하반기부터 기업가연구회를 통해 우리나라와 세계를 호령한 기업인들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고 발표해왔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지난 25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열린 기업가연구회 5기에서 삼성을 세계적 기업집단으로 만든 이건희 회장에 관해 발표했다. 김인영 교수는 삼성의 과거와 현재에서 드러난 이건희 회장의 업적과 기업가정신을 밝혔다. 미디어펜은 김인영 교수의 발제문을 3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아래 글은 두 번째 연재다. [편집자주]


   
▲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이건희
전자, 반도체, 스마트폰으로 세계를 매혹하다 [중]

3. 경영의 신(神)13) - 일류로의 변화 유도와 최고의 기회 선점과 스피드 경영

이건희의 첫 사업은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였다. 수차례 아버지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지고 했으나 아버지가 거절하자 본인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돈으로만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의 한국 지분 50%를 인수하였다. 이건희의 생각에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고 한다. 또 아버지 이병철이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 가운데 전자산업을 선택한 이유가 전자가 자동차보다 부가가치가 몇 배나 큰 사업이라는 점이 핵심이었고,14) 그 전자산업의 제품 가운데 가장 큰 부가가치를 보이는 것은 반도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반도체는 초기 단계의 집적회로를 사용해서 숫자 표시 전자 손목시계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이건희가 인수한 한국반도체가 기술 장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적자가 계속되자 이병철은 삼성전자의 김광호 이사를 시켜 사업을 정상화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김광호 이사는 “시계칩 시장을 집중 공략해 (한국반도체의) 전 세계 시계칩 시장의 점유율을 60%로 올려 흑자 회사로” 만들어 버린다. 이건희의 첫 사업은 반도체였지만 좌절 그 자체였다.15) 

이후 이건희는 책임을 지는 자리는 아니고 ‘부’의 직함으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경영 수업을 하게 된다. 이건희 특유의 과묵함과 재능을 본 이병철은 1970년대 중반부터 삼남에게 삼성을 맡길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장남 이맹희와 둘째 이창희가 아버지의 눈 밖에 벗어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결정된 측면도 있지만, 이건희의 경영 능력이 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측면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판단된다.  

1987년 11월 이병철 사후 이건희는 회장으로 취임하며 본격적인 자기 경영을 시작한다. 취임사에서 이건희는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19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고 선언했다, 곧바로 아버지의 영향력을 탈피하고 구세대 경영방식을 벗어나기 위해 비서실을 개편하고, 비서실의 감사 권한을 줄이는 대신 각 계열사사 실패에 대한 부담을 덜고 새로운 사업에 적극 도전하도록 ‘자율 경영’ 시스템으로 전환한다. 

이후 경영 성과가 나아져 회장 취임 첫해 1988년 그룹 총매출 20조 1000억원, 총 세후 이익 3,411억원에서 1992년에는 총매출액 38조 21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수출액 역시 1987년 11.25억 달러에서 1992년에는 18.6억 달러로 증가한다.16) 

   
▲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이병철 창업주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2세대 기업인으로 꼽힌다.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 이건희 회장은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서 제품의 ‘품질’을 높일 것을 주문한다. 소위 '품질 경영‘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1993년 1월 LA에서 임원들과 함께 가전제품 매장을 둘러보던 중 GE, 월풀, 필립스, 소니, 도시바 등 세계 일류 제품들과는 달리 매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삼성 제품은 Macy’s나 Bloomingdale's 등의 미국 백화점의 주요 매대 보다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싸구려 제품으로 인식되었다. 국내에서는 일류라고 인정받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메인 라인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른바 ‘LA 회의'에서 이건희는 임원들 앞에서 직접 삼성 제품과 경쟁사 제품을 뜯어 분해하고 기능과 부품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지적했다. 부끄러운 임원들이 스스로 변화하게 유도했던 것이고 거기에 세계 제일이 아니면 앞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한국 시장에 안주하는 삼성을 깨워 세계의 삼성으로 만들도록 한 단계 도약하는 변화를 실천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류 선진국 회사 제품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게 방향을 제시하는 회의는 일본 동경 아키하바라를 돌아 본 후 계속되었다. 품질과 기술을 중시하는 삼성으로의 조직 변화를 유도해 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93년 6월에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있게 된다. 1993년 6월 4일 동경 출장에서 삼성전자의 일본인 고문 후쿠다로부터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받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보고서에는 “(삼성은) 개인은 다 훌륭하지만 연구한 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현재 자신들이 제일이란 자만에 빠져서 창조적 도전을 하지 않는다. 한국 기업은 미리 대비하지 않고 문제가 터진 후에 돈을 쓴다. 삼성의 관리자들은 너무 급하고 실적과 결과만 평가한다. 일본의 근로자는 살아남기 위해 일벌레처럼 일을 하고 연구소엔 밤이 새도록 불이 켜져 있는데 삼성은 안 그렇다.”는 내용이었다.17) 이에 격노한 이건희 회장은 독일 쾨니히슈타인의 켐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로 불러 삼성의 변화를 촉구하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게 된다.18)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과 핵심 임원을 부른 이유는 통독 이후의 변화와 유럽연합(EU) 체제로의 변화를 느끼며 미래의 삼성을 구상하는 것으로 그 핵심에는 국내 최고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최고로 업그레이드 하라는 변화의 주문이었다. 그곳에서 “불량 생산은 범죄입니다.”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경영을 과감히 버리고 질 위주로 갑니다.” “앞으로 21세기에는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습니다.” 등 안주하지 말고 계속 변화하여 세계의 흐름을 따라 잡으라는, 그리고 일류의 사고를 하고 최고 일류의 제품을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이는 물론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의 위치 선정이 아니고 국내 1위를 세계의 톱 랭킹에 들여 놓기 위해 임직원의 사고 전환을 유도하는 전략이었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이재용 부회장.


이러한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식 ‘바꿔 간담회’는 68일간 계속되었다. 이건희는 1800명과 350시간 대화했고 사장단과 800시간 토의했다. 본인 스스로가 ‘신경영 대장정’의 목적을 “구조적인 문제는 그 근본부터 해결해야 하고 그 근본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설명하고 있다.19) 

이건희는 사람을 바꾸고 긴장시키기 위하여 매우 자주 삼성 위기론을 주장한다. ‘진짜 위기’ 또는 ‘암 2기’, ‘진짜 위기는 자만,’ “변해야 살아 남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식의 위기 인식과 대처가 삼성을 일류로 존속시키는 메기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20) 

이건희의 투자의 성공은 '선택과 집중, 사활을 건 도전'에서 찾을 수 있다. 1992년 64메가 D램 세계 최초 개발, 1994년 다시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1996년 1기가 D램 세계 최초 개발로 3세대 연속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한 발 앞선 개발로 선두로 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의 D램 회사에 비교하여 30% 수준이었다. 차세대 4메가 D램에 크게 투자하여 앞서 가려던 일본은 세계 시장이 최첨단 제품으로 값이 비싼 4메가 D램에서 실용적인 1메가 D램으로 수요가 확대되자 삼성에게 세계의 수요를 빼앗기게 된다. 첨단 기술로만 이기려 한 일본 기업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삼성에 패배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 기업이 기진맥진 해 있을 때 이건희 회장은 마지막 승부수로 미래를 대비한 투자를 대폭 증대하고 세계 최초로 4기가 D램을 개발하는 등 일본 기업을 기술과 투자 규모에서 앞서게 된다.21)

D램으로 일본 반도체와 싸우면서 1997년 세계 최초로 액정화면의 기판 사이즈를 600 x 720mm로 키워 생산하고, 또 세계 최초로 30인치 초대형 TFT-LCD를 개발하여 기술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샤프를 꺾고 세계 1위의 선두로 나가게 된다. 그 동안 LCD는 일본이 세계의 절대 강자였지만 그리고 삼성에게 기술이 넘어가지 않도록 LCD 관련 기술을 정부가 철저히 차단했지만 삼성은 악조건 속에서 기술로 세계 1위로 올라서게 된다.22)

이건희의 사활을 건 도전은 지극히 전략적이었기에 성공이 가능했다. 기술에만 안주하지 않고 또 기존 제품의 개선이나 신기술 적용에 그치지 않고 제품에 새로운 개념을 부과하는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명품 TV' 개발을 위해 삼성코닝, 삼성전관, 삼성전기 등 관련 계열사의 관련 분야가 동시에 참여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는 ‘동시공학’ 개념으로 제품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제품의 완성도와  참신함을 높이는 시너지를 창출하였던 것이다.23) 

휴대전화의 세계 정복 역시 전략의 성공이었다. 경쟁자인 일본이 ‘소형화 기술’에 집중하는 동안 삼성은 ‘세계 표준방식’으로 세계 시장을 넓히는 전략을 택하여 성장해나갔다. 즉, 이건희 회장은 휴대전화의 승패가 ‘표준방식’에 있음을 꿰뚫고 일본이 국내 시장에 머물 때 미국의 표준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고, 유럽의 표준방식으로 유럽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키워나갔다.24) 

   
▲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1일 취임 당시 연간 매출액이 13조5000억 원 정도에 불과했던 삼성그룹을 20여 년 만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취임 25년인 2012년에는 그룹 매출이 383조원으로 커져 취임 당시보다 28.3배 성장했으며, 그룹의 자산총액은 255.7조원으로 성장했다. 시가 총액으로 비교해 본다면 1987년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2년 303조2천억원으로 303배 커졌다./사진=연합뉴스


종합하면 이건희 회장의 투자 전략, 판매 전략, 기술 전략의 적중이 반도체, LCD, 명품 TV, 휴대전화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특히 휴대폰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형성될 것을 예측하고 빠르게 생산을 전환한 전략적 선택은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국내 시장이 커서 국내 시장을 우선시 하는 일본과 달리 시장이 좁은 한국은 시작부터 국제적 시장 개척을 위한 국제적 기준 채택이 생존 방식인데 이건희 회장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는 혜안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세계 최강 기업 삼성이 두렵다』를 낸 기타오카 도시아키(北岡俊明)와 일본디베이트연구협회는 “반도체, 휴대폰, LCD(액정화면)의 ‘삼각편대’를 내세운 삼성이 도시바, 히타치, 소니 등 일본 9대(大) 전자 기업의 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이유를 삼성 이건희 회장의 뛰어난 경영철학에 주목했다. 일본 기업들이 공존공영과 공생을 최우선으로 일본 시장 점유율에 집착한 반면 삼성은 “기회 선점, 스피드 경영”으로 세계를 공략하고 세계 초일류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25) 모든 경영인의 기회 선점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계 초일류를 목표로 한다고 모든 회사가 그 목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게 조직을 끌고 간 이건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은 감히 ‘경영의 신(神)’으로 지칭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3) 경영 능력으로만 평가한다면 ‘신의 경지’으로 보인다. 인간의 어떤 능력을 ‘신의 경지’라고 칭찬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다. 하지만 경영 성과로만 볼 때 현재까지 어떤 경영자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룬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논쟁적일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14) 당시 전자는 생산품 1그램당 부가가치가 17원인데 자동차는 1그램당 3원 몇 십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15)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134.

16) 이경식, 『이건의 스토리』, p. 235.

17)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261.

18) 켐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의 테라스에서 프랑크푸르트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19)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242.

20)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은 그의 자만하지 않는 겸손함과 막내로서 삼성그룹의 승계자로 살아온 삶의 무게감 때문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21)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서울: 경영자료사, 2014, pp. 312-322.

22)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pp. 322-326.

23)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p. 327.

24)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p. 331.

25) 이인열, “일본이 두려워하던 한국,” 『조선일보』, 2016년 7월 23일,  A30; 기타오카 도시아키(北岡俊明)·일본디베이트연구협회, 『세계 최강 기업 삼성이 두렵다』, 책보출판사, 2006. 일본에서 위 책이 출판된 것이 2005년이니 벌써 11년이 지났다. 삼성이 추격자 소니를 얼마나 더 앞서 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속단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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