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 교수 "대한민국 반역자 충격사례 많을 것...북한인권기록센터 예방효과도 기대”
[미디어펜=김소정 기자]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1970년대 말 북한으로 인도될 뻔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월맹에 억류됐던 한국 외교관 3명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협상이 진행되던 중 북한이 남한에 수감된 인사들과 1대7 조건으로 교환을 제안할 때 제시한 명단에 신영복 씨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재미 언론인 안치용 씨가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한국 외교부가 작성한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회담’이라는 비밀문서 내용을 공개하면서 처음 알려진 것을 1일 강규형 명지대학교 교수가 조선일보에 쓴 칼럼에서 재언급했다.

안치용 씨의 블로그에 따르면, 월남전 당시 사이공이 함락되자 교민 구출에 뛰어들었던 이대용 공사 등 한국 외교관 3명이 월맹 측에 억류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는 1970년대 말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협상이 진행됐고, 북한은 처음 우리 정부에 1대70의 조건을 제시했다가 나중에 1대7로 우리 외교관과 남한에 수감된 북 측 인사들의 교환을 요구했다. 

   
▲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가 공개한 당시 외교부 비밀문서의 일부. 아래 북한 측이 "보내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시크릿 오브 코리아' 블로그 캡처

즉 월맹 측에 억류된 우리 외교관 3명을 빼내줄 테니 남한에 수감된 북 측 인사 21명을 넘기라는 것이다. 이때 북한이 인도를 요구한 인사 명단에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역으로 무기징역형을 살던 신영복 교수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안 씨는 신영복 교수 등의 이름이 있는 공식문서도 자신의 블로그에 함께 올렸다. 

교환 대상자를 둘러싸고 남북이 줄다리기를 하던 중에도 북한이 마지막까지 인도해달라고 요구한 8명 명단에도 신영복 씨는 포함됐다. 북한 출신 인사와 남한 출신이지만 북한에 처자를 둔 사람 외 통혁당사건 무기수인 신영복, 이재학 씨를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끝까지 비록 재소자라 하더라도 남한 출신 불가원칙을 고수했고, 베트남 억류 외교관 석방협상은 결렬됐다. 이후 중국·베트남 분쟁과 북한의 친중노선에 분노한 베트남이 세 외교관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면서 사건은 막을 내렸다. 

이런 내용을 언급하며 강 교수는 “북한이 왜 그의 인도를 요구했는지, 그 명단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역사의 진실은 의외로 빨리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통일 후 우리는 더 완연한 모습으로 그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날 칼럼에서 “지금 한국 사회는 냉전시대, 분단 체제의 정리와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과 거꾸로 가는 일이 많다”며 “한반도는 냉전 체제의 마지막 장소로서 인류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공산 전체주의 시대의 종언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과거 한국의 좌파와 운동권에서 북한정권과 연계를 갖는 NL(민족해방)계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사실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의 길로 갔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훨씬 더 많고, 충격적인 사례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11년만에야 국회에서 통과돼 9월4일부터 시행될 북한인권법에 따라 설치될 북한인권기록센터는 서독의 동독인권기록보존소를 선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독 사민당 브란트 정권 시절 잘츠기터에 동독인권기록보존소를 세우자 동독 관료들은 여기에 본인들 이름이 기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예방 효과가 생겨났고, 실제로 이 기록에 근거해 통일 후 많은 동독 인사가 기소됐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훗날 북한이 개방될 때 나올 엄청난 증거들은 한국 현대사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충격을 줄 것이다.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에 기생했던 남한 내 일부 인사의 민낯도 제대로 조사되고 기록돼야 할 것”이라면서 “북한인권기록센터와 보존소는 보복이나 단죄의 목적보다는 어두웠던 한 시대를 정리하고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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