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노동 이분법 도그마, 경제민주화 천민민주주의 악영향
   
▲ 조동근 명지대 교수

김수행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해 7월 31일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자였다. 서울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쳤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완역하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이데올로기를 고수했다.

그의 공산주의 경제학은 좌파 경제학자들과 좌파시민단체, 야당의 경제민주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죽기직전까지 그는 화석화한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수행은 자본주의에 대해 자본가계급의 이윤획득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강변했다.

그가 2008년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탓으로 돌린 것도 본질에서 멀다. 금융위기는 반시장적인 분배와 평등주의가 파생시켰다. 시장원리에 충실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집을 주자는 포퓰리즘적 정책이 위기를 초래했다.

김수행 사망 1주기를 맞아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의 글을 소개한다.

조교수는 김교수가 사망할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교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지금도 좌파경제학자들의 왜곡된 시각을 꿰뚫어보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

그는 자본과 노동으로 나눈 김교수의 도그마부터 문제삼고 있다. 현대사회는 신분제가 해체됐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의 봉건적 이분법은 무의미해진 것. 인적 자본은 이제 자본과 노동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조교수는 현대사회의 희소한 자원에 대해 아이디어와 지식, 비즈니스 모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인류의 삶을 바꾼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자본의 생산성인 이자보다 노동의 생산성인 임금이 더 높은 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억대연봉을 받는 근로자 임금은 생산성보다는 '머리띠'와 '어깨띠'에서 나온다고 한 분석은 핵심을 찌른다.  

20대 여소야대 국회에서도 반시장적 경제민주화 프레임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조교수의 1년전 김수행 비판은 새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왜 중요한 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편집자주)
 
고인(김수행)의 명복을 빈다. 생각이 다르기에 다른 생각을 적는다.

일각에서는 지금도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말하고 있다. 중세 같은 신분사회가 아닌 현대사회에서 계급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우선 용어 사용부터 순화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 계급 대 노동자 계급의 2분법은 적절한가? 투쟁과 선동으로 경제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 계급이 힘이 세다면, 자본가 계급이 갖고 있는 자본의 가격으로서의 이자율이 당연히 높아야 하는 건 아닌가? 노동의 가격인 임금은 한 없이 싸져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은 다르다. 이자율은 낮고 임금은 높다. 임금이 생산성(생산성의 범위 내에서)에 의해 결정되는가?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망하는 기업은 없어야 한다. 억대 연봉을 받는 생산직 근로자의 경우, 그 임금이 생산성에서 나왔다고 믿는가? 그 연봉은 '머리띠와 어깨띠'에서 나온 것이다.

노동조합에 의해 과보호된 노동자 계층이 있기 때문에, 저임 노동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노동자'가 '조직되지 않는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이분법은 적절한가? 산업혁명 시대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근육노동'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자본가 계층이 설치한 '장치 및 설비' 덕분에 노동생산성이 높아져 임금이 상승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적자본(human capital)은 노동인가 자본인가? 어느 쪽으로 분류되든, 노동과 자본의 이분법이 오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자본이 흔해진 지금 희소한 자원은 '아이디어와 지식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이다.

미국의 스티브 잡스를 세계적인 부호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은, 스마트 폰에 대한 그의 독창적 아이디어다. 아이디어가 돈을 가져온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자본 대 노동의 2분법에서 헤맬 것인가?

김수행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은연중에 등치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몰락했다면, 지금도 미국경제는 헤매야 한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견실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경기회복의 기저에는 주택가격과 주식가격의 회복이 자리 잡고 있다. 자산시장이 정상화됨으로써 소비와 투자가 늘고 고용이 증가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가 실패해서 촉발된 것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저변에는 "모든 사람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인기에 영합한 평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출을 해줘서는 안 될 계층까지 대출해 준, 즉 '서브프라임(sub-prime) 모기지'가 일을 낸 것이다. 여기에 금융당국의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불비도 한 몫 거들었다.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는 정책실패가 초래한 것이다. 시장의 탐욕, 자본의 권력 등 견강부회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정치든, 경제든 민주화를 위해 계속 싸워야 한다"는 김수행 교수가 한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민주화는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식의 민주화는 그 자체가 이미 독이다. 그리스가 이를 웅변하고 있지 않는가? 국부는 '투표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천민민주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김수행 교수는 '국부론'을 달리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제대로 해석됐다. 스미스는 당시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국부의 성질과 그 원천'을 규명한 사상가였다. 지금 식으로 해석하면 그는 시장경제주의자였다.

그는 국부를 "분배를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로서 국내총생산"으로 본 것이다. 스미스를 은연중에 마르크스 쪽으로 이동시킬 이유는 없다. 그는 어디에도 자본가 계급의 착취란 말을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에서 정녕 아무것도 성찰하지 않으련가? /조동근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미디어펜=편집국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