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한강기적'은 자립 국가경제 건설 "비전과 전략 마련 절실"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대한민국 세계시장 자립경제 향한 '경제건국'  절실


1963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경제는 연평균 9% 전후의 고도성장을 거듭하였다. 그 시대의 주역들은 우리도 서독의 '라인강변의 기적’에 비견할만한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하였다고 자부하였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이 나라가 오늘날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 GDP 규모 14위에, 수출입 무역규모 7위에 놓이게 된 것을 '기적’이라고 불러서 큰 잘못이 없을 듯하다. 그 점은 고도성장의 정치에 저항했던 '민주화세력’도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인정하고 있다.

 '한강변의 기적’은 오늘날 한국인을 지탱하는 국민적 자존심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 잡고 있다. 나도 지난 10년간 그러한 담론을 전파하는 데 남 못지않게 열심이었다. 

최근 나는 이 같은 생각을 수정하였다. 당초 고도성장의 개시와 더불어 내걸린 '자립적 국가경제의 건설’이란 목표가 절반의 성취밖에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한강의 기적 재조명…경쟁력 후퇴의 현주소

한국은행이 주기적으로 작성하는 산업연관표에서 국가경제의 효율성이나 자립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1997년의 위기를 전환점으로 하여 지금까지 계속 하락해 왔다. 예컨대 중간재 투입계수는 1963년 이래 1980년까지 조립형공업화의 특질에 구애되어 계속 상승하였지만(0.3855→0.6036), 1970년대 중반에 착수된 중화학공업화의 효과로 1995년까지 꾸준하게 감소하였다(0.5534).

그랬던 것이 이후 2013년의 0.6379로까지 다시 상승하였다. 수입중간재의 투입계수도 마찬가지 추이이다. 1980년의 0.1424가 1995년의 0.1087로 낮아졌다가 2013년의 0.1599로 높아졌다. 다시 말해 2013년 한국경제의 효율성과 자립도의 수준은 1980년의 그것보다 못한 실정이다.

1997년 이후 감속 추세나마 경제 성장을 지탱한 것은 수출이다. 2011∼2012년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110%를 초과하였다. GDP의 규모가 비슷한 다른 나라에 비해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수출의 부가가치유발계수는 1995년의 0.698을 정점으로 하여 2013년의 0.541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OECD가 행한 국제적 비교에 의하면 한국의 수출부가가치율은 OECD 34개국 가운데 31위이다. 한국은 여전히 주요 중간재, 부품, 기계, 장치를 선진국에서 수입하여 가공, 조립하는 유형의 산업구조를 탈피하고 있지 못하다.

 국가경제의 규모가 일층 커지고, 조립이 첨단화하고, 몇몇 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구가하는 통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정부나 국제기구가 생산하는 제반 지표는 그 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수출의 고용유발계수도 1995년의 22.2에서 2013년의 5.8로 일관되게 낮아져 왔다. 수출산업의 중심이 자본·기술집약적인 전기·전자공업, 석유·화학공업, 기계공업, 자동차공업 등으로 옮겨간 추세의 당연한 결과이다.

중소기업의 수출기여율은 2000년대 전반만 해도 40% 이상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이후 급속하게 낮아져 2013년의 그것은 17%에 불과하다.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소기업의 국제경쟁력은 거의 소멸하였다. 1993∼2012년에 걸쳐 제조업의 사업체 수는 28만여 개에서 36만여 개로 증가하지만, 종업원 300명 이상의 대기업은 1,223개에서 687개로 크게 줄었다. 그 대신 종업원 1∼50명의 영세 중소기업이 27만여 개에서 35만여 개로 증가하였다.

제조업을 넘어 전 산업에 걸쳐서도 동일한 추세가 관찰된다. 오늘날 한국경제는 전기·전자, 석유·화학, 기계, 자동차 공업에 종사하는 소수 대기업의 투자와 수출로 성장세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좁은 국내시장을 무대로 해서는 국제경쟁력을 결여한 수많은 영세 중소기업이 비생산적인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이 같은 국가경제의 구조에서 저성장, 청년실업, 양극화와 같은 문제가 불거짐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앞에는 시련의 긴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 주요 국가의 무역 장벽이 높아지면 한국경제에 미치는 타격은 치명적이다.

요컨대 1960년대 초에 내걸린 '자립적 국가경제의 건설’이란 목표는 절반의 성취를 이루었을 뿐이다. 1997년의 위기 이후 국가경제의 생산성이나 자립도는 1970년대의 수준으로 후퇴하였다. 결국 '한강변의 기적’은 1960년대 고도성장을 유발한 역사적 요인과 환경이 과잉 결정한 잠간의 경과적 현상이지 않았을까.

   
▲ 한국적 국가혁신체제의 구축과 운영은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정치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그로 인해 그것이 거둔 성공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저항도 거세지는 모순이 빚어졌다. 박정희 자신은 누구보다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 점에서 그의 정신세계는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이승만정부 하에서 언급이 금기시되어 온, 대한민국의 건국에 한사코 저항했던, 김구를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


국가혁신체제의 해체 '후폭풍'

기업이든 국가든 선발 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제 나름의 혁신체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선발 주자의 개발 방식이나 발전 경로를 뒤따르기만 해서는 아무래도 추격과 추월에 성공할 수 없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는 그 자신의 경제, 사회, 문화의 역사에 뒷받침된 나름의 혁신체제가 있었다. 이 혁신체제 하에서 정부, 기업, 종업원은 상호유인의 행동원리를 공유하고 협동하였다. 

대개 1960년대에 걸쳐 성립한 한국적 국가혁신체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질을 지녔다.  

첫째, 개발의 거시적, 미시적 목표는 구체적 행동계획이 뒷받침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형태로 설정되었다.

둘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정부, 기업, 민간 상호간에 기민하게 작동한 협동과 조정의 체제가 성립하였다.

셋째, 정부가 조성한 국내외 자본은 국제적 수준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대기업에 우선 배분되었다. 기업은 소기의 실적으로 정부의 지원에 보답해야 했다.

넷째, 민족주의 이념이 정치적 통합과 국민적 동원의 역할을 맡았다. 정부는 숙련노동자를 육성했으며, 기업은 생산성 상승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급하였다. 노동자들은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개발체제에서 그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인과 기회를 발견하고 적극 참여하였다. 

정부가 은행을 통해 조성한 자금을 대기업에 배분하여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민족주의의 깃발을 높이 드는 것은 독일, 러시아, 일본과 같은 후발국의 산업혁명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A. 거센크론이 종합한 바 있는 그 같은 내용의 후발국 산업혁명의 논리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통해 다시 한 번 훌륭하게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적 국가혁신체제는 거센크론 모델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며, 그 이상의 혁신성을 과시하였다. 그 핵심은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국제적 수준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여 성공시켰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의 특별한 성공은 정부-기업-노동자가 호혜적 협동체제 하에서 강인하게 추구된 세계경영의 선물이었다.  

한국적 국가혁신체제는 1993년 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전 32년간 지속되어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중단되었다. 그를 통해 실현되어 온 정부와 민간의 협동체제가 붕괴하였다. 경제정책의 경험이 없는 폴리페서 경제학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점하였다.

그들은 '신경제’, '세계화’, '창의성과 활력이 넘치는 21세기 국가경제’ 등을 대안의 정책으로 제시하였지만, 목표의 구체적, 정합성, 지속성을 상실하였다. 1993년부터 금융시장이 무리한 속도로 개방되었다.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위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국가혁신체제의 해체를 제1의 원인으로 하였다.

구제금융을 빌미로 한국경제를 통제한 IMF는 지나치게 과격한 금융긴축을 강요함으로써 기업 부문에 너무 많은 피해를 안기는 실수를 범하였다. IMF가 통화·금융정책을 넘어 산업·기업정책에까지, 심지어 무역정책에까지 깊이 개입한 것은 일종의 내정간섭이었다. IMF의 지나친 개입과 통제에 한국의 정치와 관료집단은 저항하지 않았다.

위기의 와중에서 들어선 김대중정부는 오히려 외세의 개입을 개혁의 호기로 환영하였다. 위기의 초래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관료들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큰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영미형의 시장경제를 한국이 지향할 선진적인 체제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선배 세대가 구축한 개발체제에 냉소적이었다. 그 개발체제를 업그레이드함에 있어서 자율화와 개방은 올바른 방향이지만, 그 목적지가 영미형 시스템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위와 현실 사이에는 쉽게 바뀌지 않는 제도와 문화의 역사적 경로성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영미형에 포획되어 있었다.

관료들은 대규모 기업집단(이른바 재벌)에게 중복된 사업부문을 교환하거나 통합하도록 압박하였다. 그 과정에서 1999년 “신흥국 출신 세계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떠올랐던 대우그룹이 해체되었다. 자산가치가 적어도 100억 달러 이상인 대우자동차는 단돈 10억 달러에 미국의 GM에 넘겨졌다.

대우그룹의 해체는 당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파산”으로 기록되었다. 한국적 국가혁신체제의 한편의 주역으로 역할한 대규모 기업집단은 정치와 관료사회의 헤게모니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34년을 이어온 고도성장의 드라마는 쓸쓸히 종막을 고하였다. 

이후 앞서 소개한 한국경제의 불량 구조가 서서히 대두하였다. 정부와 기업은 갈등 관계로 변질되었으며, 정부는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다. 새로운 사업과 기술개발에 대한 기업의 투자는 점점 소극적으로 되었다. 투자의 위험성을 공유했던 국가혁신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급 부품과 중간재는 손쉽게 일본에서 수입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을 제한하는 산업·무역정책이 부재한 가운데 개발을 위한 중소기업과의 협력이 더 큰 부담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아가 5년마다 교체되는 대통령은 동일 정당 출신이라 해도 예외 없이 이전 대통령의 정책을 부정하고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였다. 정책이 담보할 지속성과 안정성은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1997년 위기 이후의 한국경제는 어느 나라가 경제주체 간의 공유하는 목표와 상호유인적 행동원리를 상실한 채 세계경제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어떠한 비용을 치르게 되는지를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다.

   
▲ 박정희의 한국적 근대 인간 추구와 그를 위한 사회공학 노력은 1988년 이른바 민주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하나씩 부정되어 갔다. 새마을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전국의 마을은 이전과 같은 낮은 수준의 질서로 회귀하였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사실상 폐기되었다./사진=연합뉴스

한국적 근대 추구의 허와 실

한국적 국가혁신체제의 구축과 운영은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정치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그로 인해 그것이 거둔 성공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저항도 거세지는 모순이 빚어졌다.  권력의 공평한 배분을 약속하는 민주정치는 그것의 현실적 귀결과 무관하게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대중들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향유하면서 그것을 이끈 정치체제에 대한 지지에는 인색하였다. 한국적 국가혁신체제가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둔 보다 유연한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 구축되지 못한 것은 민주주의, 산업화, 지성의 전통이 일천한 한국사의 객관적 조건에서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박정희는 그 같은 모순을 한국인의 강한 민족주의 정서로 보완, 대체코자 하였다. 박정희 자신은 누구보다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 점에서 그의 정신세계는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이승만정부 하에서 언급이 금기시되어 온, 대한민국의 건국에 한사코 저항했던, 김구를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 그는 남산의 요지에 김구의 동상을 세우고 그를 추도하는 광장을 조성하였다. 일본에 머물던 조선왕실의 영친왕 부처를 환국시키고 우대하였다. 이어서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민족의 성군과 영웅으로 현창하는 기념사업을 벌였다. 그렇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육성한 민족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이후 그가 구축한 국가혁신체제를 부정하였다. 

16∼18세기 서유럽에서 발생한 민족주의는 중세문명이 해체된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들이 지방어를 단위로 하여 새롭게 발견한 '상상의 공동체’이다.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형성을 촉진하고 국민적 통합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불행하게도 20세기에 들어 한국인들이 발견한 민족주의에는 그러한 근대적 요소와 지향이 미약하였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전통사회로부터 물려받은 풍수지리와 샤마니즘의 문화적 토대에서 국토를 하나로 신체로 감각하거나 국민을 하나의 혈족으로 의제하는 집단정서를 주요 질료로 하였다. 그 위에 전통문화를 억압하고 근대문명을 이식한 일본에 대한 부족주의적 적대감을 기본 속성으로 삼았다. 그 점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와 달리 처음부터 반근대의 지향을 강하게 안고 있었다.  

전통 사회와 문화에 대한 박정희의 비판은 누구보다 강렬하였다. 그는 투철한 근대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인의 근대적 개조를 추구하였다. 1968년 그는 국민교육헌장을 공포하였다. 흔히들 오해되고 있지만, 그 헌장은 그의 권위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도 아닐뿐더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매몰된 것도 아니었다.

헌장 그 자체는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70여 명의 합작품이었다. 헌장의 구절구절은 1949년 이승만정부가 제정한 교육법에 기초하였다. 교육법은 신생국의 교육 목표를 신체건전, 애국애족, 민족문화, 과학정신, 자유시민, 예술정서, 근검노작의 7가지로 제시하였다. 그것들은 한국인이 자신의 전통과 문화에 입각하여 모색한 근대 인간의 훌륭한 모범이었다. 우리는 교육법과 국민교육헌장의 연속성에서 결국 이승만의 시대와 박정희의 시대는 그 정신적 지향을 공유했음을 확인한다. 

뒤이어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에 착수하였다. 근검, 자조, 협동의 슬로건 아래 전국의 모든 마을이 주민의 공동재산과 공동사업을 위한 공동체로 재편성되었다. 이 엄청난 사회공학은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일대 변화를 초래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중앙권력이 말단의 사회조직에 정치적 위신재를 공급할 때 그 성원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 우리 앞에는 시련의 긴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 주요 국가의 무역 장벽이 높아지면 한국경제에 미치는 타격은 치명적이다. 요컨대 1960년대 초에 내걸린 '자립적 국가경제의 건설’이란 목표는 절반의 성취를 이루었을 뿐이다. 1997년의 위기 이후 국가경제의 생산성이나 자립도는 1970년대의 수준으로 후퇴하였다./사진=미디어펜

◆ 고도성장 '시련과 후유증, 그리고 역경'

그렇지만 한국적 근대 인간의 추구와 그를 위한 사회공학의 노력은 1988년 이른바 민주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하나씩 부정되어 갔다. 새마을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전국의 마을은 이전과 같은 낮은 수준의 질서로 회귀하였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사실상 폐기되었다. 외환위기 한창인 1997년 12월 국회는 기존의 교육법을 폐지하고 교육기본법을 제정하였다. 교육법이 표방한 7가지 교육가치도 더불어 폐기되었다. 교육기본법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창의성 계발과 인성 함양’이었다. 이를 위해 교육의 분권화와 민주화가 추진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근 20년간 한국의 교육은 더 없이 황폐해졌다. 그로 인해 한국사회가 지불한 비용은 단언컨대 1997년 말의 경제위기에 따른 그것보다 적지 않을 터이다. 무엇보다 근대문명의 보편적 가치로서 개인의 자유와 독립이 제반 교육과정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행 초·중등 교과서 어디에도 그 가치와 이념을 교육하는 장절을 찾아볼 수 없다. 성실, 책임, 창의성(끼), 박애, 비폭력 등이, 자유와 독립으로부터 파생하는 덕목들이, 공교육 12년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주입되고 있을 뿐이다.  

커다란 정신적 공백을 채운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였다. 1988년 민주화시대를 연 정치세력의 정신세계는 한국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저급한 수준의 문화와 가치로 충일하였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사실상 부정하였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친일 반민족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외세 미국의 후원으로 세운 그들만의 단체였을 뿐이다.

반민족세력의 장기집권, 부정부패, 대외종속에 저항하여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이 펼쳐졌다. 드디어 집권에 성공한 민주화세력은 북한과의 평화공존과 연합을 추구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국민국가는 민족의 통일과 함께 성취된다고 하였다. 

1980년대 이래 이 같은 역사인식이 학계, 문화계, 정치계, 교육계를 차례로 장악하였다. 1997년 '창의성 계발과 인성 함양’을 내건 새로운 교육과정이 펼쳐졌을 때, 그 실제의 효과는 위와 같은 역사의식이 여러 사회과 교과서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여기서 1948년 건국과 함께 추구되어 온 국민만들기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를 고하였다. 이래 지금까지 근 20년간 한국인들은 동일 국적의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현저하게 상이한 가치와 이념의 두 집단으로 분열하였다. 국가혁신체제의 해체에 따른 사회·경제의 정체가 그러한 추세를 부채질하였다.

   
▲ 커다란 정신적 공백을 채운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였다. 1988년 민주화시대를 연 정치세력의 정신세계는 한국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저급한 수준의 문화와 가치로 충일하였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사실상 부정하였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친일 반민족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외세 미국의 후원으로 세운 그들만의 단체였을 뿐이다./사진=연합뉴스

◆ 세계시장 '우뚝' 경제자립의 길 "있다"

건국 이후의 68년간을 포함하여 19세기 후반부터 개시된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은 상이한 두 문명이 접합하는 장기적 역사의 초반부에 해당할 터이다. 그 역사는 앞으로 백년도 더 뻗칠 것이다. 접합의 결과 볼만한 순접의 새로운 문명이 창출될지, 아니면 심한 어긋남의 탈구가 고착될지는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 섣부른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모두 금물이다. 

68년 전 이 나라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기초 이념으로 하여 건립되었다. 당시 한국인의 대다수는 성리학의 윤리로 통합된 소농사회에 소속하였다. 그들에게 '개인의 근본적 자유’는 무척이나 생소한 박래품이었다. 잘 조직된 건국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건국은 일본제국을 해체한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국제적 협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5·10 총선거를 실시한 것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었다.

이 땅의 주민집단은 물론, 독립운동에 종사한 명망가 정치세력조차 건국의 주체는 아니었다. 그들은 건국의 조력자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미국이 세워준 나라를 인도받았을 뿐이다. 19세기 이래의 한국사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이 건국의 과정을 그렇게 규정하였다. 

그렇게 넘겨받은 나라의 권력을 두고 정치 엘리트들은 곧바로 분열하였다. 1950년대를 관통한 정쟁은 정부형태를 둘러싼 것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의 대통령중심제를 선호하고 관철하였다. 그에 반해 야당세력은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를 주장하였다. 이를 둘러싼 근본주의적 대립은 결국 두 정치세력의 공도를 초래하였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이승만이 고수한 대통령중심제가 정당했음을 보여주었다. 

1963년에 들어선 박정희정부는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을 사실상 폐기하고 새로 작성하였다. 나라만들기의 역사에 깊은 단절이 발생하였다. 집권 18년간 박정희 대통령은 전임 이승만 대통령이 이룩한 건국과 나라만들기의 공적을 단 한 차례도 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철권을 휘두른 대통령중심제 정부형태는 초대 대통령이 더없이 가열한 내외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만든 작품이었다. 수출주도형 공업화의 초기를 이끈 면방직, 철강, 합판 공업은 이승만시대의 유산이었다. 박정희는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이룬 성공만큼이나 커다란 역사인식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박정희 시대에 걸쳐 야당과 비판세력은 '대중경제론’과 '대중민주주의’라는 나라만들기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동일한 발상의 개발은 예외 없이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살아남았고, 민주화시대의 열림과 더불어 지배적 프로그램으로 정착하였다.

그것을 도운 세력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를 위시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미국식의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인이 추구할 가치로 신봉하였다. '대중경제론’과 '대중민주주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창의성과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그럴듯하게 탈바꿈하였다. 그리고선 이전의 시대가 구축한 모든 것은 소리도 나지 않게 조금씩 허물어버렸다.

결국 역사를 이끄는 것은 사회에 쌓인 지식의 양과 질이다. 무엇보다 엘리트집단이 보유한 지식이 중요하다. 지금부터 대략 20년 전, 그러니까 지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나서는 젊은이들이 태어난 그 때부터 기존의 국가혁신체제를 세계경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량했다고 상상해보자. 해외시장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나라 자체를 세계시장의 일부로 개방하는 방향이다.

초등학교부터 영어가 모국어와 동등한 비중으로 교육되고, 나아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일본어와 중국어의 능숙한 구사가 장려되고, 중학교 졸업생에게 다양한 경력 개발의 교육과정이 제공되고, 일본과의 역사전쟁을 중단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제안한 적이 있는 한일해저터널을 뚫고, 도쿄에서 출발한 아시안하이웨이 1호선이 후쿠오카, 부산, 서울,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뻗어가고(서울과 베이징이 어떻게 연결될지는 정말 흥미로운 질문이다), 일본 및 중국과의 시장을 통합하고,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부품·중간재·기계·장치의 공장들이 일본과 미국에서 건너오고, 외국인 전문가가 중앙정부의 각료로 고용되고, 젊은이들이 일본·중국·베트남·싱가포르에서 직장을 구하고, 지금보다 몇 배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고 치자.

활짝 개방해 버리면, 전쟁의 위협은 저절로 사라진다. 별 특별히 새롭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선진국들이 죄다 하고 있는 일들이다. 20년 전, 아니 30년 전부터 그렇게 가자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리더십을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의 난국이 초래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열려 있는 길이다.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미래 성장엔진이 멈춰버린 듯한 건국 68주년. 이 시대 오피니언 리더는 향후 세계경제시장에서 대한민국이 우뚝설 수 있는  '경제 건국'의 전략 재설정과 실천궁행에 진력할 때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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