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30) 공자 성인화에 기여한 유가(儒家)의 행적들
사마천(기원전 145?~86?)  『공자세가·중니제자열전』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공자(孔子)가 '포의(布衣)의 평범한 신분'에서 유가(儒家)의 성인(聖人)이자 사표(師表)로 숭상 받게 된 데에는 공자 자신의 탁월함과 제자들의 성인화(聖人化) 작업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중국 역사에 뚜렷하게 공자의 행적과 가르침을 명확히 드러내고 기려 준, 한 나라의 독존유술(獨尊儒術) 정책과 사마천(BC 145?~86?)의 공자전기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았나싶다. 

공자(BC 551~BC 479)는 사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 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책으로 묶을 생각을 한 것은 공자가 죽은 후 100년 정도 지난 때였다. 누가 편찬을 시작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공자와의 대화가 수집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 발굴된 어록을 기반으로 2~3백년 뒤에 뛰어난 승계자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秦始皇)이 460여명의 유자(儒者)를 생매장한 '갱유(坑儒)'이후 유가의 씨가 마를 상황에 처했다. 그러다가 사회 안정을 위한 통치이념이 필요했던 한 왕조에 의해 유가가 부활되고 공자가 존숭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업고 사마천은 공자의 전기를 써서 공자 성인화의 시발점을 다졌다. 『공자세가(孔子世家)』와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은 사마천이 쓴 130권의 『사기(史記)』중,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에 실린 것이다. 

사마천은 어떻게 자신보다 400여 년 전에 활동한 공자의 전기를 쓸 수 있었을까? 현대처럼 다양한 유형의 기록이 풍부한 시대에도 가까운 선대 인물조차 일대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더구나 난리가 일상처럼 벌어지던 춘추 전국시대를 거친 고대 중국 사회의 문헌과 자료의 소실은 매우 심각했을 것이니 전기 작가로서의 저술환경은 최악이었던 셈이다. 400여년이 흘렀으니 인간됨됨이를 알 수 있는 동시대 생존자의 생생한 구전(口傳)의 채록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당시까지 남아 전해 내려온 단편적 문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엉뚱한 의문 같지만 사마천은 『논어(論語)』는 읽어보았을까? 현대의 우리가 보는 형태로 편집된 『논어(論語)』 책을 사마천은 볼 수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사마천이 본 것은 공자 사후에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이 정리된 『논어』로 확정되기 이전의 것들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논(論)』, 『어(語)』, 『전(傳)』, 『기(記)』 등으로 불리던 분절된 어록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한계가 오히려 사마천의 작가적 상상력이 풍부하게 발휘되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은 사마천이 당시 전해진 『논어』의 각 편의 내용을 기본 뼈대로 하고 고사(古事)의 맛을 느낄 수 있게 실마리를 알 수 있도록 살을 붙여 기록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마천이 지극한 공자 숭배자였던 만큼,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여러 대화의 기록에서 공자의 위신과 명예를 최대한 지키는 방향으로, 때로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창작적 기술을 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작과 왜곡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예를 들면, 제나라 재상 안영이 제 경공(景公)이 공자를 기용하지 못하도록 비판한 내용의 진위 여부나, 공자가 벼슬을 구하러 간 위 나라에서 임금인 영공(靈公)보다 호색녀로 치맛바람의 권세를 부리던 부인 남자(南者)를 먼저 따로 만난 대목을 민망하지 않게 윤색한 내용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사마천이 공자의 여러 대담과 일화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우호적으로 기술한 측면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치국적 차원에서 유가(儒家) 부흥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한(漢) 왕조의 시대적 분위기를 감안해야 한다. 더구나 공자에 대한 기술은 『춘추(春秋)』처럼 사관(史官)으로서 기록하는 정부의 공식 기록이 아닌 만큼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기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런 사마천의 기록 덕분에 유교 계승자들의 애독은 물론 현세의 우리도 공자의 교훈과 에피소드를 즐거운 고사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원전에 해당하는 『논어』의 해당 대목들과 기술의 내용과 뉘앙스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중니제자열전』 역시, 『논어』등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과의 문답 사항 중심으로 77제자 중 31명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적을 짧게 기술하고 있다. 말미의 사평(史評)에 의하면, 공자 집안의 벽 속에서 나온 『논어제자적(論語弟子籍)』의 기록에 근거해서 기술했고 누구를 부풀리거나 왜곡하지 않고 제자들의 진면목을 보려고 노력했음을 밝히고 있다. 

제자열전 가운데 공자 사후에 공자 성인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자공(子貢) 단목사(端沐賜)에 대해 일화가 가장 인상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자공이 월왕 구천(句踐)을 도와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뒤흔들었으며, 오나라를 격파하고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들며 월나라를 패자(霸者)로 등극”시키는 다섯 나라에 큰 변화를 일으킨 공을 세운 고사이다. 이는 『논어』에 없는 부분이다.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의 말미에 각각 "태사공(太史公)이 말하였다"라며, 부친 사마담(史馬談)이 말한 것을 인용한 듯이 ‘사평(史評)’을 달고 있다. 여기서 공자를 "천자나 왕후에서부터 중국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자를 모범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성인"이라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이렇듯 사마천이 자신의 말이 아닌 돌아가신 부친의 말을 빌려 마무리한 것은 『사기』의 완성을 유언한 부친의 비원(悲願)을 풀어드리고자 한 또 다른 효심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사마천이 17년여의 준비와 저술 기간 동안 혼신을 다해 130편의 『사기』를 완성한 후, 책이름을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지었던 점이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사기』라고 불린 것은 사마천 사후 300년이 지나서였다. 이로써 사마천은 궁형(宮刑)의 치욕도 깨끗이 씻고 부친의 비원을 기어이 이룬 것이다.  

자신이 쓰고 부친의 '사평(史評)'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사기』는 결국 사마천 부자의 혼을 잇는 고심의 역작이 되었다. 2천년을 살아 숨 쉬는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공자세가․ 중니제자열전』, 사마천 지음, 김기주․황주원․이기훈 역주, 예문서원(2003).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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