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위대한 수령’, 북한주민이라면 당연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지칭할 때 반드시 습관처럼 붙이는 수식어이다. 이 수식어 때문에 해외에 파견된 북한 간부나 그 자녀들은 종종 조롱을 당한다. 

노골적으로 “‘위대한’이라는 말은 발명왕 에디슨 등 세계적인 위인에게나 어울리는 수식어인데 북한 지도자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이냐”는 말을 들었다는 전언도 있다. 

북한에서 파견돼 서구에 머물고 있는 북한주민들은 다른 체제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도 충격이지만 자신들의 수령에 대한 비아냥 소리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해외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자신들의 고국인 북한 체제가 다른 나라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눈 뜨게 마련이고, 그래서 탈출 여건만 마련되면 탈북을 꿈꾸게 된다. 

한마디로 ‘체제 피로 증후군’으로 탈북하는 사례가 이어지는 것으로 폐쇄적인 북한 내부에서 탈북하기는 힘들어도 해외에 나와 있어 탈출할 여건이 되는 북한주민들의 망명이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해졌다.

최근 귀순한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의 차남이 온라인게임을 하면서 사용한 아이디가 'North Korea is Best Korea'로 이는 서구에서 북한의 허무맹랑한 선전을 조롱할 때 자주 쓰는 반어적인 표현 문구라고 한다. 북한 간부 아버지를 둔 10대 청소년의 자괴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성장한 태 공사의 차남이 만약 북한으로 돌아갔다면 적응이 쉽지 않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영국에서 10년간 일했던 태 공사 부부도 이심전심으로 자녀의 미래를 걱정했기 때문에 일가족의 귀순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 공사의 부인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로 추앙받는 오백룡 집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북한으로 돌아가서 적응하지 못할 자식의 미래부터 걱정했다면 북한 체제가 보편적인 국제사회와 얼마나 다른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 5년간 엘리트 탈북이 이어진 첫 번째 이유가 체제 피로 증후군이라면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입국한 엘리트들의 안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 최근 귀순한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탈북한 배경에 자녀교육 문제가 중요한 요인이었던 점이 알려지면서 자녀 교육과 미래를 위한 ‘이민형 탈북’의 증가세가 주목받고 있다./연합뉴스

엘리트 탈북 러시의 시초로 볼 수 있는 2013년 초 귀순한 평양 간부 출신 한 탈북자는 “북한에서 간부를 지낸 사람도 남한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확산될수록 엘리트 탈북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북한 무역성 출신 선후배가 순차적으로 귀순한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엘리트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 일정 기간 조사를 마친 뒤 사회에 복귀하면 서로 만나볼 기회가 생긴다고 한다. 이들은 대체로 평양에서 알던 지인들 이름을 대면서 연결고리를 찾기도 하는데 당초 귀순한 선배의 소식을 듣고 뒤따라 귀순한 전 직장 동료가 있다는 것이다.

“태 공사를 포함해 올해 국내에 들어온 중견 간부 이상 탈북자가 3명에 달한다”고 밝힌 이 탈북자는 “그동안 귀순한 북한 엘리트 출신 탈북자는 대부분 공작원과 무역사업에 종사하는 외화벌이 일꾼이 많고 소수의 외교관 출신이 있다”고 했다. 이들은 평양 중앙기관 간부들로 해외에 나와 있었던 덕분에 탈북이 가능했다. 이미 고인이 된 황장엽 씨처럼 평양 중앙당 출신 탈북자는 3명 남짓으로 꼽을 수 있다고 한다.  

태 공사 일가족의 귀순 이후 북한 김정은은 해외 엘리트층의 망명을 막기 위해 ‘가족 소환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한 측 지역에는 지뢰도 매설한 것으로 지난 24일 확인됐다.

태 공사의 탈북을 막지 못한 이유로 현학봉 주영 북한대사가 북한으로 소환 조치됐고, 최근 하나원을 출소한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중 국경지대에 경비가 강화돼 두만강을 넘다가 발각된 탈북자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살명령도 내려져 있다고 한다.

북한당국이 태 공사 망명 사실을 북한 내부 매체에서는 일절 보도하고 있지 않지만 공교롭게 이달 그야말로 탈북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김정은정권 초기 탈북억제정책 때문에 감소하던 탈북자 수가 올 상반기 훌쩍 증가한 것과 무관치 않다.

태 공사를 비롯한 해외 주재 외교관은 물론 무역일꾼 등이 최근 5년동안 1년에 2명꼴씩 귀순해 현재 남한에만 10여명이 있다. 또 전체 탈북자는 올 상반기까지 현재 2만9543명을 기록해 탈북자 3만명 시대를 맞았다. 수치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김정은정권 들어 유독 엘리트 탈북이 많은 사실이다. 

북한의 수령으로 불리는 김 씨 일가의 공포정치는 김정은 때나 김정일 때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 초기부터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탈북억제정책을 강화한 김정은 시대에 유독 엘리트 탈북이 늘고 있는 것은 안정감 없는 북한 지도부와 연관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30대 초반 김정은이 김일성·김정일 때부터 개발해온 핵·미사일 실전배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엘리트 탈북이 이어질수록 북한 내부 고위층도 동요할 수밖에 없고, 결국 김정은이 체제변화든 정권붕괴든 갈림길에 설 날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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