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보다 종묘가 더 중요했던 왕실…중국 속국으로 자생력을 잃어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조선은 회생 가능성이 있던 나라였는가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율곡이 올린 상소문이다. 왕에게 감히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나라가 아니라고 했으니 당신 역시 왕이 아니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율곡은 10만 양병론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쓴 비문에만 남아있다. 그는 생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율곡이 건의한 건 양감기수(量感基數)다. 군사의 수를 줄이라는 말이니 스승과 제자의 말이 엇갈린다. 물론 사기는 제자다. 전쟁을 원하면 군사의 수를 줄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나라간의 굴욕적인 사대관계를 율곡이 몰랐을 리 없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이래 망하나 저래 망하나 어차피 망할 것 차라리 군사의 수를 줄여 군량미를 감하고 그 인력을 생산현장에 투입하여 민생을 손톱만큼이라도 낫게 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생산 가능한 토지에서 나올 수 있는 총 곡물생산량은 5백만 석 미만이었다. 이중 60만석 정도가 세입이 된다. 60만석으로 정부 운영, 녹봉 지급, 군대 유지를 해야 하는데 군사 10만 명을 먹여 살리려면 연간 최소 76만석이 들어간다.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얘기였다. 이 쇠망의 길은 계속 이어진다. 망할 듯 말 듯 버티던 조선은 결국 왜란 300년 후 전격적으로 일본의 차지가 된다.       
   
붉은 산은 조선을 설명하는 또 다른 말이다. 세종 시기 명나라 영락제의 사신이 남긴 글에도 조선의 붉은 풍경이 나온다. 붉은 산은 미곡 생산 감소로 이어지고 이를 최종적으로 받는 것이 국가적 재분재경제인 환곡(還穀)이다. 환곡에 구멍이 뚫리면서 민란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망하든 망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이 상황에 제국주의의 시대가 겹치면서 조선은 숨통이 끊어진다. 조선의 왕은 지도를 보지 않았다. 자기가 왕으로 있는 나라가 어떤 운명으로 가게 될지 까맣게 몰랐다. 적이란 적은 다 불러 들여 그들의 입맛에 맞춰 조약을 체결해 줬다. 어차피 왕실만 살면 그만인 왕이었고 왕실이었다. 가급적 좋은 조건으로 노예가 되자, 가 왕가의 보이지 않는 가훈이었다. 

   
▲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종 어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정치세력은 친중파, 친일파, 친러파로 갈렸다. 임오군란 직후 밀려났던 대원군을 청군이 납치해 간다. 군란이 나자 김윤식은 이홍장에게 부탁하여 벌어진 일이다. 이날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헤드라인은 '대원군(大院君)이 천진(天津)으로 행차(行次)하였다.’ 여기에 황제의 명을 받고 조선의 사변을 처리하던 마건충, 오장경, 정여창, 위윤선의 설명을 붙여 놓았다. 설명은 이렇다.

“황제께서 먼저 대원군을 중국에 들어오게 하여 일의 진상을 직접 물으시고 한편으로 죄인들을 잡은 뒤에는 엄하게 징벌하되 그 수괴는 처단하고 추종한 자는 석방하여 법을 정확히 준수하도록 하였다...(중략) ...너희 대원군에게는 반드시 대단한 추궁을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행차가 갑자기 있었으므로 혹시 너희들 상하 신민(上下臣民)들이 이 뜻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원나라에서 고려의 충선왕(忠宣王)과 충혜왕(忠惠王)을 잡아간 전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황제의 높고 깊은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밖에 지난번 난을 일으킨 무리들이 혹시 다시 음모를 꾸민다면, 지금 대군이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출한 것이 벌써 20개 영(營)이나 되니 너희들은 화와 복을 깊이 생각하고 일찌감치 해산할 것이며 그릇된 악감을 고집하여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지 말라. 아! 대국과 너희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므로 정의(情誼)가 한 집안과 같다. 본 제독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으니, 곧 황제의 지극히 어진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군중(軍中)의 규율이다. 이것을 믿을 것이다. 특별히 절절하게 타이른다.”

실록 기록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원군의 납치를 행차라고 적었는지 모르겠다.  
 
이후 정국은 갑신정변, 동학, 청일전쟁으로 이어진다.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종의 준결승전이었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세우지만 허약한 기반의 이 정권은 민비 시해라는 최악의 이벤트로 민심을 완전히 잃는다. 그래도 대세는 일본이었다. 결승전인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마친 일본은 마침내 미국, 영국,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에는 병합으로 통치권까지 빼앗는다.

고종은 어쩔 수 없는, 1392년 창건한 '조선’의 왕이었다. 그에게는 사직(社稷)보다 종묘(宗廟)가 더 중요했다(억지로 나누어보자면). 고종이 트인 군주여서 조선을 입헌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제대로 된 근대를 열었더라면 사정은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나라가 연명하는 기한이 조금 늘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누군가에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오면서 조선은 자생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체질로 굳어진지 오래였다. 당연히 시야도 좁았다. 성리학이라는 안경은 유연성과 현실감각을 떨어뜨리는 데는 최고였다. 한 나라의 유연성과 생존력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국제 체제 안에서 단련될 때만이 갖춰질 수 있다.

임란이 일어났던 세기의 유럽 대륙은 주요 5개국 사이의 전쟁으로 1백 년 간 단 한 해도 평화를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나라도 망하지 않았다. 망하지 않으려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도자도 백성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사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대한제국 황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과 그 부인인 이방자(李方子)를 중심으로 고종과 순종(純宗)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고종은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사진=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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