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2차 상봉자들이 242시간여 동안 비공개 개별상봉을 가졌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데 대해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우리측 357, 북측 88명의 이산가족들은 이날 오전 9시께부터 11시까지 약 2시간 동안 금강산호텔에서 비공개 개별상봉을 가졌다.
 
   
▲ 2014 남북이산가족 2차 단체상봉이 열린 23일 오후 북한 금강산 남북이산가족 면회소에서 지난 1965년 헤어진 북측의 아버지 남궁렬(오른쪽) 씨와 딸 남궁봉자 씨가 서로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뉴시스
 
개별상봉을 마치고 나온 남측의 한 가족은 "벽에도 귀가 있고 천장에도 눈이 있다고들 하는데 무슨 깊은 이야기를할 수 있겠나""북에서 하는 일은 뭔지, 다들 똑같이 입고 온 양복은 누가 맞춰준 건지 그런 걸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있나"라고 한탄했다.
 
이 가족은 또 "그저 순 옛날 얘기, 친척 얘기나 하고 또 했지 뭐"라며 "또 다시 볼 수도 없겠지만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몸 건강히 살아계신 거나 확인했으니 그만 됐고, 이젠 만나도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어"라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형 신덕균(86)씨를 만난 남동생 신선균(83)씨는 "형님이 통 말을 안 혀"라며 안타까워했다.
 
신씨는 "형이 여태껏 제 나이도 모르고 산 모양이다. 81살로 돼 있는데 내가 83이거든. 그래서 내가 형님께 '형이 내 형이여? 아우여?' 하니까 세 살 아래 아우 맞다고 그러잖아"라며 씁쓸해했다.
 
역시 의용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된 형 김병문(83)씨를 만난 남동생 김병룡씨는 "이제 기회가 없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서운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형님께 아버지 사진을 보여드리니 붙잡고 한참을 우시더라"라며 "북쪽에서 형님이 날 찾아서 봤는데 이제는 내가 신청해도 못 볼 것 아니냐"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전쟁 때 헤어진 후 60여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오빠 전영의(84) 씨를 만나러 온 여동생 김경숙(81·) 씨는 오빠를 위해 준비한 소중한 옷가지들을 비공개 개별상봉 때 하나하나 풀어 보여줬다.
 
"오빠 살아계실 때, 이것도 입어보시고, 저것도 입어보시고" 그러자 전영의 씨는 큰 소리로 성을 내며 "너희가 아무리 잘 산다 해도 이게 뭐냐!"라고 야단을 쳤다. 보다 못한 전 씨의 북측 아들이 "아버지 그만하시라요"라고 말렸다.
 
여동생은 "우리가 오빠 한 번만 만나보려고 기다렸어요. 그렇게 만난 오빠에게 우리가 가진 것 다 드려도 부족한데"라며 오열했다.
 
김경숙씨는 이 일을 전하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는 현실이, 우리가 헤어진 시간, 이 현실이 서럽고 비참해서 눈물이 난다"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공동중식 시간 오빠 전영의씨가 가족 테이블에 나타났고 오빠가 앉자마자 두 여동생은 다시 오빠 손을 부여잡고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내 울었다.
 
제주 4·3사건 때 학교에 갔다가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형 리종성(84)씨를 만난 동생 이종신(74)씨는 개별상봉 때 "몸은 마르셨는데 발이 퉁퉁 부은 것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종신씨는 개별상봉 후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에 인원이 많아 형 리종성씨가 계단으로 내려가자 "형님을 내가 업어서 데려가게 하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