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라는 허울 좋은 명분…언론 자유 빙자 권력 남용과 오용 판쳐
언론 자유에 대한 오도된 남용과 오용이 판치는 현실에서 언론 자유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를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다시 회자해 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표현의 자유라는 허울 좋은 명분아래 자행되고 있는 욕망의 발산, 언론 자유를 빙자한 언론 권력의 남용과 오용이 판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도된 언론의 자유 이면에는 언론사상과 철학에 대한 깊은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무엇이 언론의 자유이고, 무엇이 언론 자유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비판인가? 이 단순한 물음이 개인마다, 언론사마다, 또는 정치 집단마다 언론 자유에 대한 철학적 규범이 다르다면 이것들은 각 개인들의 편견들을 초월하는 보편적 규범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현실적인 편견들을 비판하면서도 사회의 조화와 통일을 끌어내는 것이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언론에 대한 개별 판단은 언론 자유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 철학을 기반으로 한 규범이나 실천이 특정 사회적 맥락에 얼마나 적합한지 살펴야 한다. 본 칼럼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함께 언론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효시”로 규정되는 “존 밀턴”의 언론 자유사상에 대해 고찰하므로 현재 자행되는 언론의 무책임한 패거리 행태를 분석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성과 사상의 자유시장

밀턴의 언론 자유를 논하면서 이성에 대한 이해 없이 그의 언론 자유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이성에 의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며 이러한 능력을 행사 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사고에 제한 없이 접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턴은 언론 자유사상에 있어서 그의 주된 관념 혹은 원리는 “기독교적인 원죄의식과 자연권으로서의 인간이성과 자율성” 이라고 언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언어를 사용하여 어떤 현상과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서 인과적으로 반사하고 유추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것들을 추상화하고 개념화하여, 그 상태에서 관계를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은 이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정해진 원칙, 규범, 규칙 등에 따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인식하고 그것의 진리를 찾아 설명하며,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을 펴는 능력, 분석적 논리나 감각적 경험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와 사유가 있는 것인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성개념으로 볼 때 이성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앎의 목적이 어떤 대상의 본질, 즉 진리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성이란 무엇이 진리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에게 내재된 본질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성의 개념은 진리의 개념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성은 언제나 진리를 위한 이성이며 이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진리를 향한 본질적인 능력인 이성이 밀턴에 의하면 하느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고,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밀턴의 ‘사상의 자유시장’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논쟁을 하도록 하면’ 결국 이성은 무엇이 진리고 허위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는 결코 불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1)

이성의 본질은 사유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인식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무한한 자기 반성적 능력에서 그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성은 기존의 것에 대한 순응적 이고 종속적 적응에 그치지 않고 반성적 일 때, 즉 기존의 기념, 규범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반성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신념과 새로운 규범을 제안할 수 있는 부단히 창조적인 힘, 즉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 우병우 민정수석 처가의 부동산 매매와 관련해 의혹 보도했던 조선일보. 언론의 자유를 빙자한 언론 권력 오용의 대표적 사례였다./사진=조선일보 활자판 캡처


존 밀턴의 엘리트주의와 사상의 자유

밀턴의 기본적인 이론은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평등하게 이성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진리주체의 이성인 ‘생각하는 나’는 직관적인 잣대에 따라 자신 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진리를 가려내기 위한 탐구를 자유롭게 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밀턴은 “진리는 자유롭고 자율적일 때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생각하는 나’로서의 활동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부정하고 있다. 이성의 활동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고 그 탐구 과정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할 때 이성의 활동에 대한 제한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악한 자들에 의해서 흩뿌려져 잇는 진리’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므로 진리를 찾는 과정에 대한 어떤 규제도 정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밀턴은 ‘출판의 자유를 인민의 생득권(生得權)’ 이라는 주장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밀턴은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절대적인 평등을 주장하였지만 ‘진리를 가려내는 필요한 능력’까지도 평등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평등한 이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분석하는 능력, 명제의 진위와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 어떤 것을 인식하고 그것의 진리를 믿고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담론을 펴는 능력, 분석적 논리나 감각적 경험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와 사유가 있음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관념을 창조하는 능력 등 진리를 가려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밀턴의 진리관은 플라톤의 진리관과 일치한다. 플라톤은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향유하도록 허용하고, 진리가 거짓을 이기고 덕이 악을 물리치도록 하는 청사진 아래 인간이 살아가도록 모든 조치를 다 취해 놓고 있다고 말한다. 2)밀턴은 신의 의지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 때문에 진리는 절대자 다음으로 강하다고 말하면서 ‘이성적 능력’에 대한 불평등을 기반한 논의는 귀족적 정치 철학을 견지한 영국의 우월주의라는 비판역시 동시에 받는다.

존 밀턴은 그가 이성적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이성적 불평등을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만큼은 “귀족주의적 엘리티즘”을 고수한다고 비판받을 수 있으므로 그가 말한 출판의 자유는 당시 문자를 소유하고 있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존 밀턴의 자유의지와 언론의 자유

존 밀턴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기독교 교리, 1656년』에서 “신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명령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유로운 행위자들의 힘에 맡겼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실락원, 1667년』에서도 “서 있는 자들도 자유롭게 서 있는 것이며 타락한 자도 그러하다.” 밀턴의 경우 이성은 무엇이 진리인지 아닌지 인식 가능한 능력으로서, 그것인 진리인식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밀턴의 경우 진리인식은 곧 자유의지와 결합되며, 이성에 의해서 인식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덕이고 진리를 거스르거나 이미 거짓이나 악으로 판명된 것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은 악덕이라 할 수 있다. 밀턴은 절제, 정의, 금욕을 명령하면서 우리 앞에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후하게 쏟아 놓고 우리의 마음이 그 한계와 포만의 단계를 넘어서서 배회할 수 있게 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욕망을 절제하고 이성적인 진리를 선택할 때 인간이 보상 받을 수 있는 권리와 절제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미덕을 시험하고 진실이 활동하도록 책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수단을 축소하는 것은 신이 허용한 영역과 자연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밀턴의 자유의지는 절제와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성적으로 사는 것을 곧 절제라는 의미이다. 

즉 절제란 욕망과 욕구를 이성의 지도 아래 두어 통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밀턴에 따르면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면서 그 의지가 이성적인 것, 즉 진리를 선택 할 수 있도록 절제하도록 했다. 자유의지를 절제 하에 사용하는 경우, 진리에 따라 이성적으로 사는 경우 ‘보상받을 권리’와 ‘칭찬받을 권리’를 하느님이 주었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것과 反이성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다. 밀턴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면서 절제를 명한 것은 윤리적인 명령이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악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反하느님적인 것으로 당연히 근절되어야 한다. 

존 밀턴이 『아레오파지티카, 1644년』에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이유는 막중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각자 별견한 진리를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함으로서 청교도인들의 진정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3)이렇게 볼 때 밀턴의 진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진리, 즉 ‘지난 날 신성한 구세주와 함께 완전한 모습으로 온’ 진리의 조각들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자유는 참된 자기에 의한 자기지배(Self-direction)로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면서,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향유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신은 일정한 계획과 방향 아래 만물을 창조하면서 진리가 거짓을 이기고 덕이 모든 조치를 취해놓고, 세세한 부분은 인간이 해야 할 일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의 이론이나 존 밀턴의 자유의지 모두 “절제”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의 선택 가능성을 넓혀준다.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확정적이지 않듯이, 밀턴에게는 진리가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어 그중 어떤 진리에 따라 살던, 이성에 따라 절제하는 사람이 선택하는 삶의 약식과 이성의 방향도 다양할 수 있으므로 밀턴과 플라톤은 절제하의 모든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것으로서 참다운 자유이다.

   
▲ 오늘날 대한민국 언론은 지식정보의 유통을 넘어 사실 왜곡을 통한 언론단체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다./사진=뉴스타파 페이스북 페이지


존 밀턴의 언론 자유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 언론

밀턴의 경우 무엇이 진리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내재적인 능력인 이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사상의 자유시장과 자유조정기능은 작동할 수 없다. 또한 이성에 의해 파악된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이 없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밀턴은 이성에 의해서 파악된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지식을 제공할 것을 주장하면서 절제를 강조하고 있다. 

결국 존 밀턴은 진리를 선택하는 절제 하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역으로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가장 잘 활동할 수 있도록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이성에 의해서 파악된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지식이 자유로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언론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존 밀턴의 자유언론 사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본 토론문의 취지이자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어둡게 늪으로 밀어 넣어 대한민국을 안락사 시키고 있는 언론의 행태이다. 그것은 즉 인간을 비롯한 언론사와 같은 특정단체 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의지”다. 전 세계 어떤 단체, 심지어 종교단체도 궁극적 존립근거에는 권력의지가 깔려있다. 

20세기 인류가 2차례 세계대전, 냉전과 탈냉전을 경험하면서 문제시 되던 이익단체의 변호를 통한 언론의 세력 키우기가 문제가 되었다면, 작금의 대한민국 언론은 민중권력 이라는 도그마에 단단히 취해 특정인물에 대한 조작은 물론 사실 전파에 대한 방향성마저 잃어버린 듯하다. 

존 밀턴에게 있어 이성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의 발견에 있었다. 이성이 진리의 발견을 지향하는 한 진리는 결코 여러 가지일 수가 없다는 매우 원초적인 진실을 17세기 영국은 출판의 자유를 통한 지식정보의 일반화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언론은 지식정보의 유통을 넘어 사실 왜곡을 통한 언론단체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존 밀턴이 이성에 의해 발견된 진리를 절대적 규범으로 여겼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언론의 권력지향성은 마치 “유아기적 배덕감”을 보는듯한 생각마저 든다. 유아기적 배덕감은 프로이트가 말한 거창한 이론이 아니다. 타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자기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결과물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고 흠집을 내려는 발상이다. 

이러한 시각을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국력팽창에 모든 것을 던졌던 산업화 세력과 그것에 대해 여전히 분노를 삭히지(?)못하고 있는 전체주의 세력과 자칭 민주화 세력들을 동일시 해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타인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분명 그것을 창조내지는 시간을 들여 쌓아놓은 결과물이 자신의 소유 안에서 활용되지 못한다면 그 가치를 향해 실컷 난도질을 해 놓고 자신의 존재를 투영시키려는 굉장히 非도덕적이고도 위험한 발상이 최근에 보수와 좌파언론 모두에게서 보이는 태도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가진 특유의 나태함이라고도 평가된다. 활동적이지 못한 인격은 활동적인 인격을 정상적인 시각으로 보는 눈이 없다. 거기에 언론이라는 특정권력이 지닌 非생산성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비정상적 권력의 규모를 가늠해 본다면, 탁상공론과 필력을 통한 집단적 권력 투영은 지적수준이 높은 단체나 개인이 만들어낸 생산적인 결과물이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얼마만큼 긍정적인 시각으로 대중에게 투영되고 인식되는지 다시금 생각해 봐야하는 요즘이 아닐 수 없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


1) 김용환(2001). 표현의 자유와 관용. 그리스도 철학연구소 『현대사회와 자유』

2) 서병훈(2000) 『자유의 미학』, 서울 : 나남

3) 박상익(1999)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 서울 : 소나무


(이 글은 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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