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40) -침착하게 후퇴하는 것도 용기 
플라톤(BC 427~347) 『라케스』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당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으로 도시국가 간에 전쟁이 잦았다. 불가피하게 젊은이들은 중장 보병 또는 기병으로 전투에 자주 참전해야 했다. 특히 자유시민이 주축이 되어 편성된 중장 보병으로 참전했다. 따라서 호플리테스(hoplites)라 불리는 중장 보병의 전투 능력은 병사들의 생존에 직결되었다. 

청년들은 평시에도 중무장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숙련하려고 노력했다. 전투 대형이나 무술을 가르치는 전문 교관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라케스>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아테네의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가 아들들에게 중무장술을 교육시켜야 할지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면서 진행된다. ​

주요 대담자는 장군으로 전투를 이끈 경험이 있는 당시 실존인물인 니키아스와 라케스이다. 니키아스는 BC423년과 421년의 평화협약, 즉 '니키아스 평화협정'을 이끌어내어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을 휴전하게 했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훗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원정 사령관에 임명되어 전투에 나섰다가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키고 자신도 죽게 되는 실패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는 유능한 전략가였지만, 시칠리아 전선에서는 지나치게 소심하게 대처한 탓에 패배하고 말았다. 라케스 역시 군인으로 전투 중에 생을 마친 사람이다.

이들의 담화에 소크라테스가 조언자로 참여한다. ​논의 주제는 2가지다. 중무장 전투술의 교육적 가치와 청년들에게 필요한 '용기가 무엇인가'이다. 두 주제에 대해 장군 출신인 니키아스와 라케스의 의견은 대립한다. 첫 번째 주제인 중무장 전투술의 교육 가치에 대해서 니키아스는 기마술과 중무장 전투술이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배울 거리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

반면 라케스는 특별히 중무장 전투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중무장술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실제 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또 배운 사람이 조그만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오히려 비방만 더 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중무장술 교관이던 스테실레오스가 해전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창피를 당한 사례를 들고 있다. 

아무튼 니키아스는 군사이론가적 특성을 보이고, 라케스는 실전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둘 다 부분적으로 옳은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답게 두 장군이 주도하는 전투술에 대한 논의를 교육 전반의 문제로 능숙하게 확장시킨다. 청년들의 교육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중무장 전투술에 요구되는 덕목 중의 하나인 '용기'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이끈다. 병사에게 용맹함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

니키아스는 용기를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정의한다. 전쟁에서든 다른 모든 상황에서 이를 분별할 줄 아는 것에서 용기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반면 라케스는 "대오를 지키면서 적들을 막아 내고자 하고 도망치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정의한다. ​중장 보병의 전투술에서 중요한 덕목을 용기의 잣대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두 사람이 내린 정의 모두 일정부분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니키아스의 정의는 주지주의적 입장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또 라케스의 정의 역시 도망치면서도 용기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용기가 발휘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각 용기의 본성에 대해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

사실 소크라테스 역시 여러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대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고집불통의 철학자로만 인식하는데, 그 역시 아테네 자유민으로서 40대 후반까지 중장 보병으로 활약한 전사이기도 했다.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향연>에는 소크라테스가 포티다이아 전투의 후퇴 과정에서 침착하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는 알키비아데스의 목격담이 기술되고 있기도 하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때론 적과의 대적을 회피하고 후퇴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것도, 또 공격할 때와 후퇴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위인지를 체험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두 사람이 주장하는 용기에 대한 부분적 정의에 동의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

니키아스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할 상황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니키아스는 용기를 "영혼의 인내"라는 차원으로 보고 적을 대적하면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버텨내는 실전적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용기에 대한 두 사람의 정의 모두 용기의 본성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더 이상의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두 사람의 견해가 용기의 본성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난다. 

플라톤의 초기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아포리아(Aporia, 난관)로 끝맺음으로써 플라톤은 독자들에게 용기의 본성에 대해 더 탐구해 나갈 과제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용기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더 진전시켰다면 어떻게 결론지었을까. 결론을 낼 수는 있었을까. 용기를 영혼의 측면에서의 앎과 육체적 측면에서의 행동이 동시에 교호적으로 발동되는 어떤 양태로 정의해 내지 않았을까.​

하지 말아야 될 것과 해야 될 것, 또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야 용기 있는 판단과 행위가 되고, 또 어떤 경우에 비겁한 판단과 행위로 지탄받게 될지는 현실에서 빚어지는 무수히 많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듯싶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습성으로 볼 때 전쟁터에서의 상황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숱한 선택의 순간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로 확장해서 용기를 정의하려 들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무한 확장된 상황에서의 용기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을 미룬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싶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라케스》, 플라톤 지음, 한경자 옮김, 숲(2014),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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