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A선수는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2년 남자 쇼트트랙 국가대표가 됐다. 하지만 대표선발전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 B감독이 그해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그의 천재성과 가능성을 간파, 부상 결원이 생긴 대표팀에 파격적으로 발탁했다. 이 과정에서 별도의 선발전도, 부상 선수의 다음 차례를 당연히 기다리고 있었을 예비 선수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 안현수/뉴시스


< 사례2> 2005년 쇼트트랙 대표팀에서 코치 선임 파문이 두 차례 일어났다. 4월에는 스타 선수 출신 E코치의 선임에 대표팀 주축인 A, C(여) 선수를 제외한 G(남) 등 다른 선수들이 반발하며 입촌을 거부했다. 2004년 10월 자기 부친 회사의 스케이트화를 신도록 강요한 사실이 미국 전지훈련 과정에서 불거져 사퇴했던 코치의 복귀는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과거 대표팀 코치 시절 특정 선수를 편애해 특정 선수가 메달을 독식하도록 다른 선수들은 들러리 역할을 강요헸던 코치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특정선수는 A선수를 의미했다.

< 사례3> 뒤이어 7월에는 A, C 등 선수들의 반대로 D코치의 대표팀 코치 선임이 좌절됐다. 2005인스부르크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의 선수 간 폭행과 승부조작 시도를 방조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코치가 재선임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A선수는 이 대회에서 선배 G 선수의 승부조작 요구를 거절하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 사례4> 2006년 2월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A선수는 남자대표팀이 아닌 여자대표팀에서 훈련을 해야 했다. 여자대표팀의 몇몇 선수는 거꾸로 남자대표팀에서 훈련했다. 한체대파-비한체대파 간의 파벌 싸움 때문이다. A선수는 한체대에 재학 중이었고, 여자대표팀 코치는 한체대 출신, 남자대표팀 코치는 비한체대 출신이었다.

< 사례5> 2006년 4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귀국행사에서 이 대회 남자 개인종합 4연패를 차지한 A선수의 부친이 공항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A선수의 부친은 이 대회에서 A선수의 1000m, 3000m 우승을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 대표팀의 코치와 선수들의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 사례6> 2006토리노올림픽 3관왕 등 화려한 선수 생활을 하던 A선수는 2008년 대표팀 훈련 중 펜스에 부딪히며 무릎슬개골이 파열되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4차례의 수술과 2년에 걸친 오랜 재활 기간을 보낸 A선수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A선수는 밴쿠버올림픽 후 2010년 9월 대표 선발전을 치렀으나 역시 고배를 들었다. 이를 두고 A선수측은 예정대로 그해 4월에 대표 선발전이 치러졌다면 선발될 수 있었으나 빙상연맹이 그 시기에 불거진 짬짜미 파문 수습을 이유로 대표 선발전을 9월로 연기하면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반발했다. 즉 A선수가 토리노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받게 된 병역특례 혜택에 따라 5월에 군사훈련을 받게 되면서 컨디션 조절이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그간의 수상 실적이나 대표팀 훈련에서 부상을 당해 선수 생명에 위협을 받았던 만큼 배려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A선수를 탈락시키기 위해 빙상경기연맹이 일부러 연기했다는 음모론도 등장했다.

◇ 빅토르 안 사태, 한국에서 스포츠를 넘어 사회 문제화

위에 거론된 A선수는 바로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황제' 빅토르 안(29·한국명 안현수)이다.

빅토르 안은 지난달 24일(한국시간) 폐막한 2014소치동계올림픽에서 새 조국 러시아에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안겨주며 소치올림픽 개최국 러시아의 종합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반면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71명)을 파견해 3회 연속 톱10 진입을 노렸던 한국은 기대와 달리 금3·은3·동2의 저조한 메달 수로 13위로 대회를 끝마쳤다.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전통적인 메달밭인 쇼트트랙 탓이 컸다. 금2·은1·동2개를 일군 여자 쇼트트랙은 체면치레를 했다고 해도 노메달에 그친 남자 쇼트트랙의 성적표는 '최악'이었다.

이같은 참담한 성적을 배경으로 안현수가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빅토르 안이 화려하게 부활해 자신을 버린 빙상연맹을 응징하는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성공기와 어우러져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쇼트트랙 대표 선발 과정이 최근 공정성·투명성을 지상과제로 삼고 대표 선발전 성적만으로 대표선수를 뽑게 되면서 평소 잘하던 선수들이라도 당일 컨디션이 좋지 못하면 선발되지 못하게 되고, 과거 A선수처럼 특별 선발도 불가능해지면서 남자 대표의 경우 실력있는 선수들이 대거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속사정은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 한국 스포츠계, 비정상의 정상화 이뤄지나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은 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달 13일 2014년 교육·문화 업무보고 자리에서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와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 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선수들이 실력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심판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 체육비리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문체부가 소치올림픽 폐막 이후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한 전면 감사를 예고하고, 감사원까지 거들면서 빙상연맹에 대한 현미경 감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체부는 아직 감사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일단 소치올림픽의 여독도 채 풀리지 않은 빙상연맹에 대해 칼을 빼들을 수는 없다는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 힐튼호텔에서 문체부와 스포츠 3.0 위원회가 '대한민국 스포츠, 길을 묻다'는 주제로 개최한 공개세미나에서 기조강연을 한 김종(53) 문체부 제2차관이 한국 스포츠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로 '체육계 4대 악(惡)'으로 인한 '스포츠 공정성 훼손 사례 지속 발생'를 지목하며 체육계에 대한 '비정상의 정상화'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한 것으로 볼 때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박근혜 정부 들어 문체부는 국내 스포츠계의 4대악으로 승부조작 및 편파판정, 파벌 및 조직 사유화, (성)폭력·체육계 학교 입시비리, 체육단체 사유화 등을 꼽고 척결 의지를 여러 차례 내비쳤다.

앞서 지난해 8월26일부터 12월24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대한체육회·국민생활체육회·대한장애인체육회·시도 체육회·시도 생활체육회·시도 장애인체육회 및 중앙 시도 경기단체 등 체육 단체(2099개)를 대상으로 2010년 이후 단체 운영 및 사업 전반에 대해 특별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직사유화·단체운영 부적정·심판 운영 불공정·회계관리 부적정 사례 등 총 337건의 비위사실을 적발했으며, 이 중 대한배구협회·대한야구협회·대한배드민턴협회·대한공수도연맹·대한씨름협회·대한복싱협회·대한레슬링협회·경기도태권도협회·울산태권도협회·패러글라이딩연합회 등 10개 단체에 대해 수사 의뢰하고, 관련자 19명을 고발했다. 15억5100만 원을 환수조치했고, 15명에 대해서는 해당 단체에 문책을 요구했다

실제로 지난달 27일에는 대한야구협회가 검찰에 압수 수색을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다만 빙상경기연맹은 금전 비리가 불거진 것은 아니어서 지난 감사에는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빅토르 안 사태로 인해 문제를 야기해 도마에 오른 단체들보다 오히려 더 '공공의 적'이 됐다.

소치올림픽 기간 동안 '안현수 러시아 귀화=빙상계 파벌싸움의 피해자로서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는 일방향적 여론은 올림픽이 끝나고 냉정을 찾으면서 많이 사그라든 상태다. 빅토르 안 스스로도 지난달 22일 소치 현지 인터뷰에서 "파벌싸움이 러시아로 귀화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고 선을 그은 것이 결정적이다.

◇ 국내 스포츠계는 빅토르 안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나

그렇다면 빅토르 안 사태를 지켜본 국내 스포츠계 인사들의 생각은 어떨까. 올림픽 기간 중 팽배했던 국민 정서와는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에서 문화연대·스포츠문화연구소 주최로 열린 '소치올림픽을 계기로 드러난 대한민국 체육계의 문제점' 토론회에서 정희준(49) 동아대 스포츠학과 교수는 안현수의 귀화 이유에 관해 "엄밀히 말해 파벌문제가 아니었다"고 소신 발언을 해 눈길을 모았다.

정 교수는 "파벌문제, 왕따문제, 폭행문제는 과거의 일"이라며 "그가 귀화를 단행하게 된 이유는 첫째 새롭게 성장하는 후배들과의 경쟁이 버거웠고, 둘째 러시아의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고, 셋째 한국의 억압적인 훈련 분위기가 싫어서였으며, 넷째 대표팀에 들어가봐야 과거처럼 대접받지도,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정 교수는 빙상계 인사 등 스포츠계 인사들과 만나 청취한 의견들을 토대로 이같은 판단을 했다.

사실 위의 사례들도 우리가 일종의 선입관을 갖게 된 빅토르 안이 아닌 A라는 선수의 일로 한 발 떨어져서 본다면 그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는 파벌의 혜택을 봤거나 파벌싸움의 선봉장으로서 다른 선수에게는 가해자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현수 귀화 사태의 원인 제공을 한 빙상연맹이나 스포츠계의 4대악까지 감싸주고 덮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즉, 안현수가 100% 피해자가 아닌 만큼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국민여론에 편승한 '본때 보여주기식' 빙상연맹 감사가 아니라 스포츠계의 4대악 근절을 실질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감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체육계 향해 칼 빼든 문체부를 위한 고언(苦言)

그렇다면 문체부의 감사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야 할까.

정 교수는 "파벌문제를 감사를 통해 밝혀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면서 "다만 안현수 선수와 부친 안기원씨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섭섭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필요는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먼저, 조국에 올림픽 메달 4개를 선사한 선수가 국가대표로서 훈련을 하다가 선수 생명이 끊길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도 연맹이 무관심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안현수가 거부한 강압적인 선수 훈련 문화가 어느 정도로 문제가 있는가도 살펴야 한다"고 부연했다.

나아가 정 교수는 "엘리트 스포츠가 생활체육지역공동체 스포츠와 완전히 분리돼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 학생 선수들로 하여금 수업에는 참여할 수 없게 하고 합숙소에 가둬놓은 채 검투사를 기르듯이 운동기계를 만드는 한국의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며 "운동이 좋아서 하는 선수들은 100명 중 1명도 안 된다. 부모와 감독이 하라니까, 대학에 가야 해서 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승부조작과 판정비리, 뇌물과 감독 접대는 당연한 것으로 배운다. 대학도 커넥션으로 가고, 프로팀에도 돈 내고 가는 문화가 있다. 그곳에서 파벌을 비롯한 각종 운동협회의 부정부패가 나온다. 메달을 못 따도 된다는 각오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포츠 에이전트인 장달영(45)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펙스)는 "국내 스포츠계의 문제는 시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면서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 단체는 시스템이 아닌 일부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만큼 궁극적으로는 스포츠 엘리트 육성 시스템을 검토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장 변호사는 "안현수는 현 빙상연맹 집행부가 있는 한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이 있어 떠난 것이고, 박태환도 진로를 놓고 대한수영연맹과 갈등을 겪었다. 스피드스케이팅의 이상화도 대학 졸업 후 빙상연맹에서 가라는 팀을 마다하고 다른 팀으로 갔고, 김연아도 태릉 등 빙상연맹의 집단적인 훈련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된 선수들을 보면 이처럼 소속 협회나 연맹하고 갈등관계를 갖고 있다"며 "한국의 협회 체제, 엘리트 육성 시스템이 국제 경쟁력 차원에서 적절한지 다시 한 번 새겨봐야 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