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가공, 부풀려진채 확대 재생산…'죽음의 굿판' 희생물 의혹
   
▲ 김용삼 동원대 특임교수
전태일에 대해 귀가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시기는 대학 재학 중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경기도 대변인 시절이었다. 당시 경기도지사는 한 시절 노동운동으로 ‘한국의 레닌’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문수였는데, 김문수 지사와 전태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김문수 지사는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분신한 후 그의 영향을 받아 서울대 상대를 중도에 그만두고 청계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후에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공장 노동자 시절을 회상하며 김문수 지사는 “하루 종일 또또 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근로기준법을 위해 노력했다”는 무용담을 지인들에게, 그리고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다음은 김문수 자서전 『나는 아직도 넥타이가 어색하다』 중의 한 대목이다,

‘우선 재단사가 되어야겠다고 계획하고 청계천 신평화시장 꼭대기에 있는 신평화복장학원에서 재단을 좀 배우고 난 뒤 나는 동문시장에 재단보조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학원에서의 재단공부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게 금방 드러나고 재단사는 내게 재단을 가르쳐 줄 생각은 꿈도 꾸지 않으면서 하루 온종일 옷에다 구멍을 매고 쇠를 박는 “또또”만 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열여덟 살짜리 보조아이는 어떻게나 또또를 빨리 치는지 나는 도저히 따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스물다섯 살이나 먹은 나는 아무리 빨리 치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고 계속 재단사한테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겸허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영어나 수학이나 기타 다른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옷 만들거나, 또또 치는 데는 나는 열등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공장에서 하루 온종일 지겨운 또또만 치다가 한 달이 돼서 필자가 받은 월급은 단돈 만원. 

그 만원 가지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은행 다니는 형님 자취방에 얹혀서 함께 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나 혼자 자취를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또또고 뭐고 굶어죽기 딱 알맞을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또또사를 때려치우고 다시 통일상가에 재단보조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또 시아게만 죽어라고 한다가 일을 잘못해서 쫓겨나고, 딴 데 가니까 또 또또를 치라고 하여 나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는 내게 적합지 않다, 노동조합도 있고 사람도 있으니까 나는 딴 데를 가자, 이게 내가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김문수 지사는 2012년 6월 2일 경기도지사를 그만 둔 후 평화시장을 찾았는데, 이날 청계평화시장과 봉제공장 등을 둘러본 후 전태일 동상을 방문했다. 당시 그의 평화시장 방문을 보도한 한 인터넷 기사는 다음과 같이 그 정황을 전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는 김문수 지사가 노동운동에 헌신할 수 있도록 원동력을 제공해준 마음속의 영원한 선배님이다.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 날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뵙고 안부를 여쭈었었는데 이제 그런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오늘 김문수 지사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시 다잡을 수 있었지 않을까? 

동상 옆에서 생각에 잠긴 김문수 지사의 모습은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고 또다시 낡아가는 동대문 평화시장 건물들 사이에서 40여 년 전, 독재의 그늘 아래 자유를 소망하던 “청년 김문수”를 그리는 듯 했다. 그리고 시장 상인들의 입가에 늘 미소가 떠나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분열을 넘어 하나 된 통일강대국의 대한민국을 만들겠노라 다짐을 하는 듯 보였다.’(http://blog.naver.com/weeklypaper1/159058308)

김문수 지사의 입에서는 “근태 형(김근태)” “영복이 형(신영복)”이 무시로 튀어나왔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영복이 형’을 꼽았다. 김문수 지사 앞에서 신영복의 좌익 이념을 비판하면 “당신들이 영복이 형을 잘 몰라서 그래. 그 사람 절대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반박하고, “박노해에게 시집을 내라고 권한 것이 바로 나”라고 말하고 다닌 사람이 김문수였다. 

   
▲ 일반인들은 『전태일 평전』을 통해 만들어진 신화를 기억할 뿐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잘못 알려졌거나, 의도적인 목적으로 가공했거나, 혹은 선전선동을 위해 부풀려진 내용들이 무차별로 확대 재생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사진=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컷


전태일 신화의 탄생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 전태일은 김문수 같은 운동권 청년들에게는 ‘빛나는 훈장’이었을 것이다. 전태일을 통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포악성이 적나라하게 터져 나왔고, 나이 어리고 순진하며 때 묻지 않은 ‘순수 영혼’ 전태일은 자본주의의 포악성에 분신으로 저항한 고귀한 희생양이 되었다. 

사실 전태일이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까지, 그리고 조영래 변호사라는 지식인이 전태일 평전을 쓰기 전까지는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전태일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시켰다. 김문수 같은 서울대 재학 중이던 수많은 지식 청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도록 했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확산시켰으며, 1995년에는 민주노총 출범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류석춘 교수의 발제문 ‘ 『전태일 평전』의 3가지 함정: 착취? 대학생 친구? 동시대인의 선택?’을 보고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의 1983년 초판에 의하면 석유를 뒤집어 쓴 전태일에게 성냥불을 붙인 사람이 가명으로 등장하는 김개남이라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태일은 김개남의 도움을 받아 분신했다는 사실을 후속 판부터는 왜 애매모호하게 기술해 놓았을까.

또 전태일에게 외부세력의 접근이 있었다는 점, “전태일이 분신할 때 곁에 있었으며, 전태일은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양국주의 증언(조선일보 2009년 10월 31일 기사)을 보면 전태일은 운동권들이 벌인 ‘죽음의 굿판’에 희생물로 바쳐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그를 ‘죽음의 굿판’으로 내몬 세력들의 존재를 밝혀내고 인과관계를 밝혀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는 사이 좌파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전태일의 분신을 미화찬양하고, 운동권들이 우상으로 띄우고, 노동자들이 본 받아야 표상으로 추켜세우는 작업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거대한 신화가 형성되었고, 그 신화의 진실에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이 건설됐다.

천재 신화의 형성

필자는 월간조선 기자 시절 김웅용이라는 IQ 210의 천재가 범재(凡才)가 되어 충북의 한 지방대학을 나와 조교로 활동하고 있는 사실(현재는 신한대 교수)을 추적하여 거짓된 신화가 어떻게 창조되는지를 폭로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김웅용은 언론에 의해, 그리고 부모에 의해 처절하게 뻥튀기 되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김웅용에 대한 대략의 보도 방향은 다음과 같다.

‘그는 1살 때 한글을 이틀 만에 떼고 3살 때는 그가 쓴 글과 그림을 모아 책을 펴냈다. 5살 때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6살 때는 미적분을 풀어내며 세상에 놀라움을 안겨줬다. 그리고 8살 되던 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며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본 후지 TV에서 실시한 IQ 테스트에서 그는 210이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등재되며 세계적인 천재로 인정받았다.’

추적을 해보니 이 모든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 그는 일본 후지 TV는 물론 어떠한 공인된 IQ 테스트를 받은 적이 없다.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IQ 테스트를 요청하면 부모들이 결사적으로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IQ 210의 천재는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 당시 조선일보 동경특파원이었던 신동호 기자(후에 그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가 일본 후지 TV에 출연한 김웅용이 미적분을 척척 풀자 참석했던 대학 교수가 “유치원생이 고교생 정도의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보니 IQ가 210정도는 될 것 같다”는 발언을 보도하면서 와전된 것이다. 

김웅용의 아버지는 물리학자, 어머니도 대학 교수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아들에게 미적분을 푸는 방법을 기계적으로 달달 외도록 해서 풀었던 것이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 부모는 자기 아들이 암기를 약간 잘 하는 아이였을 뿐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희대의 천재로 알려졌으니 부모는 계속 그를 숨겨야 했고, 그럴수록 신화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졌다. 

어느 언론도 김웅용의 진짜 IQ가 210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지 않았고, 모두가 “김웅용 IQ가 210이야” 하니 그대로 따라 믿었을 뿐이다. 

   
▲ 전태일은 1965년 가을 평화시장 안의 삼일사의 견습공(시다)로 취직하여 월급 1,500원을 받았다. 사직・해고와 취업을 반복하여 1970년 그의 월급은 23,000원이 되었다. 5년 사이에 15배 이상 증가한 것이고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이 8배 상승한 것이다./사진=『전태일 평전』(조영래 著) 표지

쇠말뚝 신화

일제가 박은 쇠말뚝 해프닝도 신화 만들기의 전형적 패턴에 속한다. 사실 국내에서 발견되어 제거된 쇠말뚝들은 100% 일제가 풍수침략을 위해 박았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김영삼 정부 시절 전국에서 18개의 쇠말뚝을 제거했는데, 필자가 쇠말뚝 발견 현장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모두가 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박은 것이었다. 

군부대가 통신 안테나를 세우기 위해 박은 것, 산꼭대기에서 나무를 벌목한 다음 산 아래로 내리기 위한 철선을 설치하기 위해 박은 것, 주민들이 강가에 뱃줄을 묶어두기 위해 박은 것 등등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런 쇠말뚝이 일제 풍수침략용이라고 판정을 내린 사람은 해당 지역의 무속인이나 역술가, 풍수가들이었다. 정부 공무원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판정을 맡긴 것이다. 어느 학자도, 어떤 언론도 이런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조차 하지 않고 무속인이나 풍수가들의 “간악무도한 일제가 풍수침략을 위해, 이 나라의 혈맥을 끊기 위해 박은 쇠말뚝”이라는 요설에 속아 넘어갔다. 

필자가 이 사실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자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던 쇠말뚝을 슬그머니 치웠고, 이 사실을 일본 산케이신문이 취재하여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선동의 레토릭
  
선동이란 공산주의와 파시즘 등이 대중을 군중심리로 몰아가고 우민화시켜 자신들의 정책이나 생각, 방법이나 주장을 교묘히 현실화하고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즉, 수많은 거짓에 한 가지 진실을 보태 대중을 자신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사악한 전술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선전선동을 강력한 정치교육의 수단이자 대중투쟁의 뇌관으로 대단히 중시한다.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와 괴벨스, 모택동 같은 희대의 선전선동꾼들이 이론화한 방법론에 의해 전태일 신화 만들기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레토릭이 발견된다. 

“거짓말도 계속 되풀이하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나중에는 의심하지만 결국은 믿게 된다.”

“선동(거짓말)은 단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이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우리는 숱한 난관을 뚫고 열심히 살아서 성공한 수많은 성공사례들은 마다하고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영웅화하고 추앙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자본가들의 가혹한 착취’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선동이라는 사실이 박기성 교수의 발제문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를 통해 밝혀졌다. 

일반인들은 『전태일 평전』을 통해 만들어진 신화를 기억할 뿐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잘못 알려졌거나, 의도적인 목적으로 가공했거나, 혹은 선전선동을 위해 부풀려진 내용들이 무차별로 확대 재생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중우(衆愚)정치의 본질, 민중주의 포퓰리즘의 본성을 가장 먼저 정확하게 꿰뚫어 본 집단이 공산주의자, 전체주의자, 나치 히틀러 일당이고, 이를 그대로 전수받은 북한, 그리고 북한을 추종하는 남한 내의 좌익과 종북 세력들이다. 이런 세력들이 수없이 써먹는 수법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일전에도 한 번 소개한 바 있는 히틀러의 선전선동 수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원고를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김용삼 동원대 특임교수

① 추상적인 관념 따위는 피하고 감정에 호소하라.
② 끊임없이 정해진 문구를 반복한다. 문구는 객관적이지 않아도 된다. 논의의 한 측면만을 기술하여 적을 격렬히 비난하되, 항상 특정한 적을 하나씩 정해야 한다. 
③ 언어적, 시각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라. 특정한 속죄양을 정해서 비난하고 낙인찍는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수행한다. 
④ 선전선동을 통해 공포감, 주저, 곤혹 등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적의 사기를 누르되, 단일한 목표를 향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선전을 실시하라. 
⑤ 전체 중에서 사소한 일부분의 잘못이나 실수를 끄집어내 그것을 무기로 전체를 다 부정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뒤집어씌워라.

   
▲ 우리는 숱한 난관을 뚫고 열심히 살아서 성공한 수많은 성공사례들은 마다하고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영웅화하고 추앙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자본가들의 가혹한 착취’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선동이라는 사실이 박기성 교수의 발제문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를 통해 밝혀졌다./사진=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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