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개발 지역 불구, 증조부 하장환 독립운동 거점 부지 매입도
기업가로선 유일하게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구인회 창업회장에 이어 LG의 현재 전문경영인도 애국지사의 후손인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대 항일 투쟁을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일암(逸庵) 하장환(河章煥) 선생이 하현회 (주)LG 대표이사 사장의 증조부인 것.

   
▲ 하현회 (주)LG 대표이사 사장은 1920년대 항일 투쟁을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일암(逸庵) 하장환(河章煥) 선생의 후손이다. / LG 제공

증조부 일암 하장환,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심혈

하장환 선생은 독립운동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항일 투쟁을 위한 군자금모집 활동을 한 애국지사로, 당시 종로구 일대에서 10여 년을 거주하면서 관훈동의 면우 집간소(集刊所)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숙의(熟議)했다.

중국 북경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1925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해 김화식, 송영호, 곽윤, 김황, 손후익, 이자근, 이기병, 하장환 등과 함께 친일 부호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내는 무장 조직 신건동맹단을 조직했다. 

김창숙은 국내에서 자금을 모아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해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뜻을 세웠다. 

당시 하장환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곽종석의 문집 출판을 위해 서울에 있었다. 김창숙을 수 차례 만나 신건동맹단을 결성하고 단원으로 적극 활동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 자신도 재산의 상당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자금 모집 활동 중 하장환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 순사에게 체포돼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른 후, 그 후유증으로 출옥 1년 만인 1928년 1월 서거했다.

하장환 선생은 일제 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지만, ‘제2차 유림단 의거’는 훗날 의열단원인 나석주의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으로 이어져 독립투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장환 선생이 별세했을 당시 옥중에 있던 김창숙 선생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는 국립현충원에 있는 하장환 선생의 묘에 새겨져 있다. 정부는 독립운동을 하다 서거한 하장환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하현회 (주)LG 사장은 평소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 증조부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기업인으로서 그 정신을 실천하려 애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의미에서 하 사장에게 증조부인 일암 하장환 선생이 10여 년을 거주하며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동했던 종로구 일대는 의미가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하 사장은 지난 6월 통의동 일대에 부지를 매입했고, 현재는 문화재개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은퇴 후 가족들과 거주할 수 있는 보금자리로 증조부의 독립정신이 담겨있는 이 지역을 선택할 만큼 하 사장의 증조부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은 문화재 출토가 빈번한 지역이라 건물 공사 전 까다로운 문화재 발굴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지구단위 계획구역에 묶여 3층 고도제한은 물론 용적율과 건폐율 등 건축 조건이 까다롭고 불리한 지역임에도 해당 부지를 매입하는 등 애착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하 사장은 향후 이곳에 지역의 특성에 걸맞는 다양한 문화공간 마련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LG 신화창조 연암 구인회, 독립군 든든한 자금줄

   
▲ 구인회 LG 창업회장 / LG 제공

앞서 LG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일화도 앞서 세간에 알려지며 주목받은 바 있다.

1942년 7월 구 창업회장이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인 ‘구인상회’를 운영할 당시 임시정부를 후원하던 백산 안희제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부탁에 위험을 무릅쓰고 1만원을 독립 자금으로 지원한 것이다.

당시 80kg짜리 쌀 1가마니가 약 20여원임을 감안한다면 1만원은 쌀 500가마니에 해당하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독립자금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목숨을 주고받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구 창업회장은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해 기꺼이 독립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구 창업회장의 부친인 춘강 구재서 공이 1930년경 의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일정 구여순’ 선생을 통해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일화 5000원을 기탁하도록 했던 일 또한 힘이 되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으로 시작된 LG의 독립운동 정신은 2015년 ‘서재필 기념관 개보수 지원’, ‘중경임시정부 청사 복원 지원’, ‘독립유공자 주거환경 개선 지원’ 등 LG의 사업역량을 활용한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김세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