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검소·실패에 좌절 않고 일어서기…"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
현대 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과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두 사람 모두 넉넉치 못한 가정형편과 정규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이른바 ‘흙수저’출신임에도 세계적인 기업을 설립하였고, 매우 창의적인 사고를 하였다는 점에서 토론을 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기업가를 들자면, 현대의 정주영,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김우중 회장을 들 수 있다. 정주영 회장은 나머지 두 사람과 비교하면, 이북출신, 초라한 학력 및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연-지연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흙수저라 할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은 경남 의령과 진주 일대의 대지주 경주 이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다. 이병철 회장은 해외유학 경험과 근대 교육을 가지 근대 자본가였다. 
김우중 회장은 본인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특히 김우중 회장의 부친인 김용하 씨는 경성제국대학교를 졸업하여 대구사범대학 교장, 서울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김우중 회장의 부친과 박정희 대통령은 사제관계여서 대우그룹의 성장에 있어서 학연-지연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와 반면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통천송전소학교를 졸업한 것이 유일한 정규교육이다. 정주영 회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 차례 가출을 시도한 문제아였다. 
한편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시리아계 아버지와 백인 여학생 사이에 태어나 생부모 모두로부터 버림받아 고등학교 중퇴자 부부에게 입양되어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교를 1학기 다닌 것이 그의 마지막 정규교육이다. 동시대 동종업종 라이벌은 빌게이츠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하바드 대학을 진학한 것 과는 대비된다.

   
▲ 정주영 회장과 스티브 잡스는 항상 승승장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엄청난 실패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실패에 좌절하거나 신세타령을 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재기하였다./사진=(좌)현대그룹 홈페이지, (우)애플 홈페이지


창의성의 천재 정주영과 스티브 잡스

정주영 회장과 스티브 잡스는 정규적 교육을 통한 지식의 축적이 많지 않지만 도전적 난관에 부딪힐 때 마다 직관력과 획기적 발상과 함께  무모할 정도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이들의 창의성 본질이다. 이들의 창의성을 증명하는 일화는 너무나도 많다.

예를 들면, 정주영 회장은 아산 방조제 물막이 공사에 엄청난 공기와 공사비를 줄이기 위하여 폐유조선을 침몰시키는 ‘정주영 공법’을 탄생시켰다. 사실 해전사에서 배를 스스로 가라앉혀 항국를 봉쇄하는 자침 (自沈, scuttling)의 사례가 더러 있다.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 함대가 세바스토폴만에 자국 배를 침몰시켜 항구를 봉쇄한 한 사례가 있다.  정주영 회장이 이러한 해상전술사를 알았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놀라운 통찰력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1952년 미국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선거 당선 후 한국을 방문을 하여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었다. 미군은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를 녹색 잔디로 깔아 주기를 주문하였다. 이에 정회장은 겨울 추위에 강한 보리를 부산 경남 일대 밭에 거두어 트럭으로 옮겨 심었다. 유엔군 묘지를 엄동설한에 푸르게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매킨토시, 넥스트 스텝, 픽사,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연속적을 성공시킨 것을 널리 대중 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의 수많은 실패가 있었고 수차례 빈털털이가 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대학을 포기하였고, 실패로 인해 빈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은 타고난 직관력으로 역발상을 하여 문제를 과감하게 해결하였고, 스티브 잡스는 실패로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하는 일에 꾸준히 도전하면서 창조적 제조 능력이 생긴 것이다.

   
▲ 2015년 11월 1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고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 관객이 고 정주영 회장의 사진 앞을 지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검소한 생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패션 리더였다. 제일모직에서 독일제 기계를 들여와 고급 의류를 생산하였다. 자신이 생산된 제품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이회장은 솔선하여 제일모직이 생산한 양복을 착용하여 그 스스로가 패션모델임을 주저하지 않았다. 파커 만년필 애호가였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만년필을 선물 받은 이회장은 그 스스로가 만년필 애호가 되었다. 삼성 그룹에서  임원승진자에게 최고급 만년필을 선물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병철 회장이 개인적을 수집한 미술작품 들의 높은 수준에서 알 수 있듯이 이회장은 품격 있는 양반의 삶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반면 정주영 회장은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평생 유지하였다. 과거 청운동 자택이 일반에게 공개되었을 때, 그의 소박한 삶에 많은 사람이 놀라면서 존경심을 가지 되었다. 놀라운 점은 그의 책장 에는 정회장의 손때가 직접 묻은 장서 들이 수백 권 있었다는 것이다.

정회장은 한국최고의 기업의 설립자이고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영웅이지만, 그는 매일 아침 부인이 차려준 밥상에서 식사를 마치고 작업복 차림으로 걸어서 출근하였다. 정주영 회장은 검소하다고 해서 그를 짠도리라고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사회공헌 및 자선사업을 할 때는 그의 성격대로 저돌적이고 아낌없었다. 소떼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항상 검은색 셔츠, 청바지, 운동화를 고집하 였다. 스티브 잡스는 채식주의자였고, 교외에서 살며 직접 가꾼 유기농 야채와 견과류만으로 식사를 하였다. 물론 그가 암 진단 이후 고기를 통한 단백질 섭취를 거부하여 병을 악화 시킨 점이 안타까운 점이지만 그는 자신 만의 검소한 삶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그는 미국의 상류층이 좋아는 흥청스러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고, 기름을 팔아 졸부가 된 자들이 비싼 자동차를 수집하는 짓과 같은 일을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초대에도 자신만의 드레스 코드를 고집하였다. 

정주영 회장과 스티브 잡스의 는 겉으로 멋을 내지 않고 촌스러우나 그 내면의 강렬함이 껍데기의 요란함을 치중하는 패션을 이겨낸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검소한 삶은 “Less but Better”라는 디자인 철학을 내세운 독일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생각 과 유사한 점이 있다. 자신의 삶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디자인 하는 것이 이들의 창조력의 근원이다. 

   
▲ 대한민국 건국이후 최대의 외화를 벌어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 사진은 현장을 방문한 (사진왼쪽)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사진=아산정주영닷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정주영 회장과 스티브 잡스는 항상 승승장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엄청난 실패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실패에 좌절하거나 신세타령을 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재기하였다. 정주영 회장은 일찍부터 자동차 사업에 관심이 있었다. 1940년 정주영 회장은 오윤근 씨에게 빛을 내어 아현동에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하였다.

손수 망치를 들어 자동차에 두들기면서 작업을 한지 25일만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여 고객의 차량 10여대가 전소되는 위기를 겪었다. 물론 그는 당황하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즉시 고객들에게 변상을 약속하였다. 한편 그는 오윤근 씨에게 다시 돈을 빌려 빠른 신설동에 무허가 업소를 재개하였다. 그는 다른 업소보다 짧은 시간에 일을 끝내는 수완을 발휘하여 결국 재기에 성공하였다. 
정주영 회장은 6-25동란 중 미군이 발주한 공사들을 많이 수주하여 큰 돈을 벌었다. 전쟁 후 정부가 발주한 경북 낙동강의 ‘고령교’ 복구공사를 수주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엄청난 위기를 겪게 된다. 그는 24개월의 공사시한으로 수주하였다. 물쌀이 빠른 낙동강에 교량복구는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공사였고, 많은 비용이 추가로 들었다., 공사비용폭증과 물가폭등으로 막대한 공사적자를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현장근로자의 파업과 빛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다. 
 
정주영 회장은 친인척의 재산을 정리하여 막대한 적자를 보고 결국에 고령교 복구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는 재산을 잃었지만, 신용과 교훈을 얻었다. 현대건설은 고령교 건설 위기 후 한강인도교 공사에 입찰에 성공하여 도약의 계기를 삼았다. 고령교 건설의 위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냈기에 기회가 온 것이다. 
1976년 스티브 잡스는 친구 워즈니악과 애플을 설립하여 개인용 컴퓨터를 출시하여 돈돠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동료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성격이었다. 스티브 잢는 자신이 펩시 콜라에 영입한 존 스컬리의 주도하에 자신이 세운 애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잡스는 애플에서 퇴출되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한다. 그가 회사에 쫓겨날 때 엔지니어 몇 명을 같이 데리고 나와 NeXT라는 회사를 차리고 NeXTStep라는 운영체제를 개발한다. 하지만 스티브의 NeXTStep사업은 상업적을 실패하여 애플에서의 퇴출과 함께 그에게 또 하나의 큰 시련이 된다.
그러나 NeXTStep은 매우 뛰아난 기술적 혁신적을 이루어 낸 운영체제였다. GUI기반의 UNIX 운영체제로서 매우 안정적이고 객체지향적 프로그래밍 환경을 조성하였다. 잡스가 떠난 애플은 마이크로 소프트와 경쟁에 완패하여 망하기 직전이 되자. 스티브 잡스를 다시 영입하고 NeXTStep을 인수하였다. NeXTStep는 현재 애플의 맥킨토시, 아이폰 및 아이패드의 운영체제로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자랑하는 애플의 경쟁력의 근원이 된다. 

이상과 같이 두 위인들은 실패와 굴욕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시만의 핵심역량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 위기 탈출의 비법이다. 

   
▲ 스티브 잡스는 회사에 쫓겨날 때 엔지니어 몇 명을 같이 데리고 나와 NeXT라는 회사를 차리고 NeXTStep라는 운영체제를 개발한다./사진=넥스트 로고

언변으로 정면 돌파

정주영 회장은 사실 배움이 짧다. 그러면 정회장은 가진 것 많고 많이 배운 사람에게 굽신거리거나 당황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현대는 조선소 건립 당시 영국 바클레이은행과 4300만 달러(약 510억 원)에 이르는 차관 도입을 협의했다. 그러나 바클레이 은행은 현대의 능력을 의심하고 차관지원을 거절을 하였다. 1971년 9월 정주영 회장은 바클레이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롱바텀 회장은 부정적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정주영 회장은 당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설득하였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있었는데, 산업화가 늦어져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이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오.

롱바텀 회장은 정회장에 설득되어 결국 추천서를 써서 바클레이 은행에 제출하였다. 이후 정주영 회장은 영국 수출보증기구(ECGD) 총재를 만났다. 영국인 총재는 정회장에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리는 당신이 제출한 조선소 건립 사업계획서에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영국의 일류 기술회사가 현대의 조선 능력을 인정했으니 나는 그걸 믿겠습니다. 또한 영국 제일의 바클레이즈은행이 당신네 회사를 긍정적으로 진단한 것도 믿겠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기술진과 창업주의 능력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선주라면 세계 유수의 조선소에다 배를 주문하지, 왜 배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현대에 주문하겠습니까? 주문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배를 만든다면 그 배를 누구에게 팔겠습니까? 만약 배가 안 팔리면 영국 은행에서 빌려간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앞으로 현대에서 만드는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게 증명해보세요. 그 전에는 차관 제공이 불가능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러한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창의적이 대답을 준비한다. 그는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세계 유수의 해운회사들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당신이 만약 배를 사준다면 우리는 영국 수출보증기구의 승인 아래 바클레이즈은행으로부터 차관으로 건설자금을 받아 곧바로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당신이 주문한 배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정회장의 이러한 황당한 주장은 의외로 성공하여 해운사로부터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선박 주문을 받아 낸다. 

   
▲ 사진은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자료사진=한국은행

스티브 잡스는 이른바 “말빨”은 그의 성공의 주요한 자원 중 하나였다.  잡스가 애플I을 개발했을 때 판로를 찾아야 했다. 사진과 같이 케이스도 없는 제대로 된 제품이라고 할 수 없는 제품이였다. 잡스는 한 가게에 자신의 언변으로 구두계약을 하고 제품생산을 개시하여 애플신화가 시작되었다. 

한편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떠난 후 애플은 PC와의 경쟁에서 완패하여 새로운 운영체제를 개발하려고 코플랜드 OS프로젝트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안으로 애플은 다른 회사의 운영체제를 인수하기 검토하였는데 장 루이 가세가 개발한 BeOs와 잡스의NextStep였다. 두 사람 모두 애플에서 퇴출된 경험이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둘의 경쟁에서 스티브 잡스의 언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맺으며

정주영 회장과 스티브 잡스의 공통점을 이상과 같이 정리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핵심적 명언을 하나만 고른다면 다음과 같다. 정주영 회장은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신념으로 살았고 ‘이봐 해봤어’라는 철학 하에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오직 “마음과 직관만이 진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교훈을 바탕으로 흑수저론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두려움 없이 실행하라. (2) 화려하고 요란함을 추구하지 마고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키울 수 있는 실력을 키워라. (3) 실패에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기다려라. (4) 자신의 능력과 결의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길러라. /한영수 랭캐스터대 및 지겐대 사회학 박사


(이 글은 24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정주영 기업가정신, 지금이 필요할 때’ 현대그룹 창업자 고(故) 정주영 회장 탄생 101주년 기념세미나에서 한영수 랭캐스터대 및 지겐대 사회학 박사가 패널로서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한영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