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필패 진보라고 환호할 이유 없어…국민 선택의 몫으로 남아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위기 돌파 능력으로 침몰 직전의 한나라당을 건져 올린 보수의 구세주 박근혜,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로 대중들이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으며 국민들의 가슴에 환상을 품게 했던 철의 여인 박근혜, 그녀가 집권 4년 만에 탄핵을 당했다.

4년 전 국민 대통합의 시대를 선언하며 그녀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때, 5천만 국민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이런 불행한 사태를 예견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그녀에 대한 단핵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지난 수년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탄핵 사유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불행한 사태를 불러올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사태를 맞아 정신과 의사로서 이 문제를 키우고 확대시키는데 기여한 대통령의 심리적인 문제와 사회심리학적인 면을 같이 지적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박근혜 대통령의 결벽증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보수의 원류이자 자유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라는 신념과 사명감에 불 타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이념적 순혈주의 젖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닮은 독선적인 완고함도 겸비하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녀는 다른 이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그녀가 민주주의의 성전에 바친 첫 제물은 다름 아닌 민주 노동당이었다.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고 북한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민주 노동당을 사회적 갈등만을 야기하는 악으로 보았던 탓이다.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공은 또 다시 상대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박근혜의 탄핵 사태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우리 국민의 몫으로 지금 남아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민주 노동당의 문제점은 새삼 이 자리에서 논한 가치조차 없을 만큼 너무나도 많고 그 이유 또한 분명하다. 증오를 부추기며 사회 갈등을 선동하고 분열을 야기하는 그들의 전투적인 모습은 삼척동자의 눈에도 티끌만한 사회적 책임감이나 인간에 대한 관대한 사랑이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눈 뜬 장님이 아니니 당연히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 못났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방법도 옳지는 않지만 이들에게도 분명 사회적 순기능이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했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일부이기는 해도 그들도 이 나라의 국민이고 그들에게도  숨 쉴 공간은 필요했다. 거리의 뒷골목에서 한 진 술을 걸치고 부질없는 농담과 뒷담화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사람들처럼, 이들에게도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제도권 내의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악의 씨앗은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근치(根治)를 하듯 민주 노동당을 해산하여 이들의 존립기반을 일거에 제거해버렸다. 대통령은 새로운 깨끗한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어쩌면 철없는 좌익들의 행동에 실망한 많은 보수주의자들도 대통령의 조치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원했던 깨끗하게 정돈된 세상은 오지 않았다. 사실 정돈된 세상이라는 것이 원래 없는 것이다. 질서정연하고 안정적이며 모든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꿈같은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또 욕망은 다양하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다양한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결벽증을 가진  대통령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세상을 꿈꾸었다면 이것이야 말로 연목구어가 아니었을까? 

대통령의 아집과 독선에 국민들은 등을 돌렸고, 집권당은 종국에는 과반을 잃어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고, 차면 넘치는 법이다. 생존 기반을 상실한 민노당 출신 인사들이 대통령 탄핵의 선봉에 선 것을 보면,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대통령의 결벽증이 오늘의 화를 자초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둘째는, 대통령의 이중성이다. 취임 당시 대통령에 대한 인기는 엄청났다. 그녀에 대한 지지는 유례가 없을 만큼 높아 찬사가 하늘을 찔렀다. 그녀 스스로 이 나라와 이 국민과 결혼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녀의 말에 환호했다.

오천년 역사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인물이 한 사람 나왔다고 국민들은 한때 가슴이 몹시 들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국민들을 위해 다 바치겠다는 대통령, 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가? 게다가 미혼으로 남편도 자식도 없었다. 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갖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대로 공정하고 부정 없는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주변의 반대와 여러 우려에도 굴하지 않고 김영란 법을 끝내 통과시켰다. 이 법이 통과되자 이제야 대한민국이 보다 더 성숙한 세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사람들은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이 법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수 많은 영세 자영업자들도 불만을 억누르고 이 대세를 따랐다. 이 와중에 최순실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은 이전에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과 최 씨 집안은 이미 오래 전에 관계가 끝났다고 수 없이 밝혔다. 여러 의혹이 있었지만 순수한 국민들은 인간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설마 대통령이 국민들을 기만할까 생각 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사랑했던 대통령이었기에 더  믿고 싶었다.

그런데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던 최씨가 대통령의 등 뒤에 숨어 서민들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온갖 구질구질한 전횡을 다 일삼았던 것이다. 그녀의 행실을 보고 있노라면, 연산군의 실정에 일조를 한 장녹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당시 백성들은 일국의 국고가 그녀의 치맛자락 속으로 사라졌다며 그녀를 저잣거리에서 무참히 죽였다. 대통령에 대한 믿음이 깊었던 만큼 그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도 컸다.

우리는 대통령을 아주 담대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국민들이 최순실 사건을 알고 분노했을 때,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바란 것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국민들이 원한 것은 대통령의 솔직한 사과였다. 그런데 대통령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힘에 밀려서 한발 한 발 자꾸 뒤로 물러서면서 개운치 않은 사과만 연발했다. 한마디로 아무런 소용도 없는 똥 볼 만 자꾸 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의 눈에 익숙하지 않았다. 사과를 위해 국민들 앞에 나선 대통령은 국민들이 알고 있던 담대하고 단호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대통령을 비겁하고 비굴하고 옹졸한 소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보수가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당당하기만 했던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렇게 두 번을 실망했다. 엄정해야 할 법의 잣대가 대통령에게는 고무줄 같이 임의적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솔직함까지도 잃어버린 대통령의 어리석은 모습이 보여준 인간적인 실망감까지 겹친 것이다.

셋째는 의외성과 공사 관계의 구분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운영하는 지도자에게 비선이라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 지도자가 좀체 볼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늘진 곳의 문제점을 찾아 지도자에게 이를 알려주고 행여 놓칠 수 있는 실수를 하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비선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비선은 꼭 필요하다.

그래도 여기에는 명확한 역할의 구분이 필요하다. 지금 국민들은 대통령이 최순실이란 사람을 비선으로 활용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최순실이란 인물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권력에 힘입어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에 어이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처럼 엄격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어째서 시정잡배나 우뢰배에 가까운 이런 사람을 자신의 비선으로 삼게 된 것일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최태민 일가의 터무니없는 주술에 빠져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대통령인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다고 비방하기도 한다.

이 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를 믿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 한 사람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이나 국민들도 대통령이 개인적인 삶은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만 한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문제가 공적인 영역을 침입해서는 더 나아가서 공적인 기능을 파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과 삶이 공공성을 저해할 경우엔 이미 대통령은 그 공공의 대표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통령도 인간인지라 엄격한 공사의 구분이 쉽지는 않다.

국민들도 이를 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웬만한 일이면 대통령의 허물도 눈을 감고 넘겨줄만한 마음의 여유도 있다. 문제는 의외성이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지도자들의 의외성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이 된 데는 선거법 위반이라는 실정법 위반의 문제도 있었지만, 화해의 포용의 마음으로 세상을 화합시키기 보다는 끝없는 편 가르기로 증오심을 부추기며 사회적인 갈등을 확대하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감이 그 뒤 배경에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문제는 지도자의 이런 성격적인 의외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점이다. 뽑아놓고 나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만, 지도자에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의외성이 있다면 대통령의 집권 5년이 국민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우리 국민은 탄핵 이후의 시대를 대비해야 하다. 보수의 필패는 거의 명확해졌다. 지난 10년간 국민들에게 별 희망을  보여주지 못한 보수에게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이제 식탁에 다른 메뉴를 올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보수의 필패는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보수가 실망하고 진보라고 환호할 이유는 없다. 이 탄핵 사태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공은 또 다시 상대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박근혜의 탄핵 사태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우리 국민의 몫으로 지금 남아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쿼바디스! 쿼바디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 이념이 어떠하든 간에, 도덕적이고 희생적이며 관대하고 발전적으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국민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란 점이다. /신용구 정신과 의사·장편소설 '나, 박정희'의 저자
[신용구]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