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길목에 선 한국정치…정치의 경제화는 실패국가로 가는 길
   
▲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남미화(南美化)의 길에 선 한국정치 

1. 2016년의 한국정치 - 선진 정치와 중남 정치의 길목에서 어디로?

2016년의 한국 정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87체제’가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한 세대 30년을 경과하여 어떠한 정치·경제적 결과를 가져왔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결단해야 하는 운명적 길목(critical junction)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87체제’의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공고화’(the consolidation of democracy)를 넘어, ‘민주주의 심화’(the deepening of democracy), 그리고 ‘민주주의의 질’(the quality of democracy)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단계에 있었다.1) 이러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The Economist의 ‘민주주의 지수’(Democratic Index) 평가에 따르면 20위권으로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16년의 한국정치는 광장의 요구 폭발과 이러한 광장의 요구가 법과 제도에 의해 순화되지 않고 정치과정을 압도하고 무시하며 정치적 불안정(political instability)을 증대시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2016년의 한국정치는 양당체제(two-party system)의 정치적 안정(political stability)을 기반으로 하는 영미(英美)형 경쟁체제 내지는 다당(multi-party)의 협력에 기반을 둔 북유럽형 연립정권 체제로 가느냐 또는 잦은 시위와 포퓰리즘에 기초한 정치적 불안정, 좌파정권으로 가느냐의 길목에서 후자의 길, ‘남미화’(南美化)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중)남미화’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갑제는 ‘남미화’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잦은 쿠테타, 부패한 관료-지도층, 강성 노조, 과격한 언론, 좌경적 경제정책, 반미(反美)감정, 계층 갈등, 빈부(貧富)격차, 얇은 중산층, 법질서 붕괴와 범죄증가, 전통적인 가치관의 취약 내지 붕괴, 종교의 정치개입(을 의미한다). 남미화(南美化)의 가장 큰 특징은 좌우(左右)갈등의 만성화로 법질서가 잡히지 않고, 공동체의 규범이 허약하다는 점이다. 남미(南美)는 우리보다 민주화를 먼저 시작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제도, 중산층, 국민교양이 준비되지 않아 쿠데타, 게릴라, 민중봉기가 되풀이 되었다.”2) 

본고에서 필자는 ‘남미화’의 여러 특징들 가운데 2016년 한국정치의 문제점으로 “민주화를 뒷받침할 제도와 국민교양의 미비, 그리고 과격한 언론, 강성 노조, 반미(反美) 정책, 법질서 붕괴, 좌경적 경제정책의 채택”에 주목한다. 

분석해보면 최근의 한국정치의 양태는 대의민주주의의 제도화를 통한 정치 발전과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길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 가지 측면에서 ‘남미화’ 징후를 찾을 수 있다. 

첫째, 4·13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3당 체제는 타협에 의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기보다는 분열과 대결의 지속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국민이 원하고 바라던 타협(妥協)과 협치(協治)는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었고, 결과는 여야의 끊임없는 대립이었고 야당은 주도권과 선명성 다툼에 몰두했다. 

둘째, 광장의 촛불의 요구가 헌법에 규정된 대의민주주의 기관인 국회의 논의와 결정을 압도했다. 대한민국 광장의 정치는 아테네의 아고라(Agora)에서 행해진 직접민주주의 보다 세련되지 못했고, 국회 정치를 압도하며 대의민주주의 후퇴를 결과했다. 왜냐하면 광장의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대의민주주의 제도인 투표도 선거도 국회도 존재의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헌법기관인 국회가 결정의 기준으로서 촛불의 명령을 인용함으로써 스스로 위상을 낮추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앞으로 국회의 결정들이 광장의 촛불에 의해 뒤집혀지고, 그것이 상시화 된다면 의회정치는 없어지고 광장의 촛불에 의한 결정만 남게 될 것이다. 이는 대의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셋째, 국회의원들의 언어가 품격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압도하고, 또 입법부 국회가 법률로 경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입법부가 법률에 의한 규제를 통해 경제에 개입함으로써 경제의 자유 영역을 무너뜨리고 있다. 내년 또는 가까운 미래에 사회주의로의 길, 또는 좌클릭 정당(또는 좌파 집권)에 의한 통제 경제로 나아갈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들 정도이다.            

   
▲ 한국 정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87체제가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한 세대 30년을 경과하여 어떠한 정치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결단해야 하는 운명적 길목에 있다./사진=미디어펜


2. 2016년 드러난 한국정치의 이상 징후 

2-1. 협치는 없고 대결만 있었던 3당 체제  

4·13 총선의 결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여당 새누리당에 승리하자 제 1성으로 나온 용어는 ‘협치’(協治)였다.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부·야당 협치를 요구하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협치는 ‘공동 통치’라는 국가 통치의 거버넌스(governance)로서 내각제 권력구조가 아닌 대통령제 권력구조에서 협치 주장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 즉, 헌법 제70조(대통령의 임기)는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여 중임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으며, 5년의 임기 동안에는 대통령 ‘소신껏’ 행정을 이끌어 가라는 ‘민의’의 표출이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음에도 협치를 주장하는 것은 국회의 다수를 점하였으니 행정부까지 내놓거나 공동으로 통치하자는 초헌법적 발상이고 주장이었다. 

국민은 4·13 총선에서 국회를 3당 체제로 운영하라고 국회의원을 (골고루) 뽑아준 것이지 대통령직 수행을 야당과 협의하여 하거나 또는 야당의 동의를 근거로 통치하라고 주문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협치(協治)의 한계는 국회이며, 대통령은 법안 통과를 위해 야당에게 협조를 구하라는 정도로 민의(民意)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데 야당의 주장은 이미 박근혜 정부에 대한 무장해제 내지는 항복을 요구했던 것이다. 언론과 방송, 그리고 야당이 한 덩어리로 주장했던 협치에 의한 박근혜 정부 무장해제는 결국 대통령 탄핵을 결과했다.  

4·13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3당 체제는 여소야대(divided government)에 의한 정부와 국회 충돌의 일상화와 여·야 대결의 상시화를 초래하면서, 결국 남미정치의 특징인 ‘좌우(左右) 갈등의 만성화’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2017년에는 어떠할 것인가? 2016년 12월 말 새누리당의 분당으로 2017년에는 4당 체제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4당의 분리가 이념이나 정강·정책에 따른 분화가 아니라 지역대결과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한 사당(私黨)적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어 2017년의 정치는 타협보다는 분열과 대립의 요인이 더 커 보인다. 타협에 의한 정치적 안정의 제도화가 아니라 2017년 치러질 대선에서 인물 중심의 극한 경쟁과 이념 대립이 중첩되어 정치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정치적 불안정이 확대되는 ‘남미식’ 정치의 일상화를 예상할 수 있다. 

2-2. 제도화의 취약으로 광장이 국회를 압도 

최근 언론은 광장의 촛불을 ‘국민의 소리’라고 정의(definition)하고 국회가 따라야 할 지침내지는 가이드라인으로 강조하고 있다. 광장의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압도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 보다 우월한 제도이고 더 나은 제도라는 구절이나 정의는 정치학 교과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특히 인류는 직접민주주의에서 간접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 방식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더 세련되게 그리고 현실에 맞게 진화시켜 왔음에 주목해야 한다. 3~6만 명 정도가 함께 거주하는 도시 공동체의 일을 정치라고는 특별히 할 것이 없는 시민(성인남성)들이 모여 하루 종일 토의하고 논의하고 필요한 직책을 추첨에 의하여 뽑는 장식의 아테네 직접민주주의는 더 이상 수백만 수천만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작동할 수 없는 제도가 되었다. 

만일 광장의 모임이 대중운동(mass movement)의 결과로 만들어진 위대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3)의 저자 에릭 호퍼(Eric Hoffer)의 다음과 같은 일갈(一喝)은 의미심장하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광신적 성향은 서로 같아 보일뿐더러 서로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 숭고한 대의와 교조의 내용은 서로 크게 다르지만, 그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획일적인 요소들이다.”4) 

   
▲ 최근 한국정치의 양태는 대의민주주의 제도화를 통한 정치 발전과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길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대의민주주의 제도는 다원주의와 결합하여 ‘획일성’을 극복하고 있다.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고, 국회의원은 그 위임받은 통치권을 행사하는 개개 헌법기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개개 헌법기관이라는 의미는 획일성을 버리고 다양한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되 국회의원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표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입법권력’ 의회를 만드는 힘은 국민에게 있고, 만일 국회가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사용한다면 그러한 ‘입법권력’ 의회를 견제하는 힘 역시 건전한 시민성(citizenhood)에 근거한다. 따라서 입법부에 대한 국민의 권력 회수는 입법부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데 입법권을 사용하는 경우의 비상시에만 그렇다. 

평상시에는 입법권력 의회를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는 대통령제 권력구조(power structure)의 경우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른다. 대통령제는 권력의 독점(monopoly)을 막기 위하여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분리하고 서로 견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권력들 간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통해 권력독점을 방지하는 방식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이 유럽 절대주의 하에서의 왕권의 피해를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 집중을 방지하고자 만들어낸 제도였다. 

의회의 입법권 역시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과 사법부의 위헌 심사권, 즉 의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 경우 취소하는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의회를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완성한다.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과 사법적 판단에 의한 헌법 수호라는 제도적 장치는 미국과 한국 모두에 마련되어 있다. 반대로 사법부에 대한 행정부와 입법부의 견제도 동시에 존재한다. 사법부의 대법관을 대통령이 지명하여 의회의 승인을 거쳐 임명하게 함으로써 사법부의 자의적 판단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다. 이러한 의회 권력을 포함한 3권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는 이미 우리 헌법에 명확히 보장되어 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은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 수장에 대한 견제이고, 이것을 최종적으로 헌법재판소가 사법부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광장의 촛불(또는 촛불의 숫자)이 국회의원 탄핵 결정의 기준이 되고, 또 헌법재판소 판결의 기초가 되느냐이다. 만일 그렇다면 촛불이 가장 중요하게 되므로 국회도 헌법재판소도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가 없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광장에서 촛불의 숫자로 국가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 방식을 버리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의문해야 한다.  

광장(또는 정치참여)의 과도한 요구로 정치제도가 무너지는 현상을 사무엘 헌팅턴(S. P. Huntington)은 ‘집정관 정치’(praetorian polities)로 지칭했다. 헌팅턴은 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1968)에서 보다 많은 수의 국민이 요구를 증대시킴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 예를 들어 정당이나 국회가 -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할 때 ‘정치 참여의 위기'(the crisis of political participation)가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정치 참여(political participation)가 정치 제도화(political institutionalization)의 수준을 넘어 서게 되면 불안정한 정치가 탄생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그림 1> 참조) 

   
▲ 그림 1. 정치 제도화와 정치 참여 (political institutionalization and political participation) 5)

정치체제가 충분히 제도화6) 되지 못했을 때 ‘정치참여의 위기’에 정치체제는 '퇴화'(decay)하여 군부의 출현이나 포퓰리스트 독재자가 집권하는 ‘집정관주의’(praetorianism) 또는 ‘집정관 정치체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참여는 중요하지만 과도한 참여 - 예를 들어 군부의 정치참여 또는 시민의 과도한 요구 - 는 정치 안정에 부정적이라는 의미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정치참여는 절제되고, 제한되고, 합법적 정치과정 내에서 머물 것을 강조하였다.  

2016년 대한민국은 광장에서의 시민주권의 정치가 제도권 정치를 압도함에 따라 '정치 제도화'(political institutionalization)와 정치적 안정을 저해했다. 헌팅턴의 논지에 따른다면 광장 민주주의 또는 광장의 촛불은 기존의 정치 제도가 그 요구를 수용해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정치의 불안정을 초래하고 포퓰리즘으로 변질되어 정치 엘리트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대의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행정 부분에서의 예를 든다면 과거 노무현 정부가 한-칠레 FTA의 결과를 보고 후속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였을 때 농민, 노조단체 등의 강력한 반대와 국회 앞 시위로 정부가 FTA 추진뿐만 아니라 다른 일상적인 업무 처리가 힘들었다. 최근에는 정부와 정치권이 광장의 요구에 대처하느라 경제위기 극복, 조류인플루엔자·독감에 대한 대응이 과거와 같지 않고, 세종시 공무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정치 부분에서의 예로는 새누리당이 광장의 요구를 수용·해결하지 못하여 분당(分黨)의 사태에 이르는 것을 들 수 있다.  

다당 체제가 출현하되 서로 경쟁하며 투쟁만 일삼는다면 결국 대한민국 정치가 ‘남미식’ 정치 불안정, 정부 행정력의 마비, 그리고 종국에는 ‘실패한 국가’(failing states)7)에 이르는 악순환에 들어설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정치와 사회 운영을 포함해 경제도 남미식 저성장 내지는 과도한 국가부채의 길로 들어서서 국가 전반이 ‘실패한 국가’의 표상인 ‘남미로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이다.

2-3. 언어의 저질화와 정치의 경제 개입 확대

2016년 국회 특위의 청문회에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거친 언어를 생산해냈다. 다음은 청문회 스타(?)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막말의 예들 가운데 몇 가지 사례들이다.

“갤럭시 7 또 실패했지요? ‘이재용폰’ 실패했지요?” 
“전경련 해체에 앞장서겠어요? 안 서겠어요?” 
“이재용 증인,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아직 50도 안 된 분이 어른들 앞에서, 이 국민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아무도 (입학을 허가)한 사람이 없는데 정유가가 어떻게 입학을 해.” 

국회 청문회의 청문(聽聞)은 “증인의 의견을 청취하고 증거를 제출하게 함으로써 사실을 조사하는 절차”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청문회에 증인에게는 “그래요? 안 그래요?”식의 질책성 질문에 유일하게 “예, 아니오”의 답변만 허용되는 곳이다. ‘청문(hearing)’은 사라지고 ‘질책(scolding)'의 장소가 된 청문회 중계를 지켜본 국민의 마음은 참으로 어두웠다. 국회의원들은 청문회에서 국민들 - 또는 카메라 - 앞에서 정의의 심판관인 척하며, 증인들 앞에서는 폼을 잡고 싶어 하는 일종의 스노비즘(snobbism)의 모습이었다. 나아가 입법부 국회가 사법부의 재판관의 역할까지 하는 입법 패권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편 20대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저질 국회의원하고 같이 국회의원 한다는 게 창피해 죽겠네”식의 대응이 있었다. 어떤 국회의원은 12월 21일 대정부 질문에서 황교안 총리(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촛불에 죽고 싶으냐”라고 했다. 또 “명백하게 답변하지 않으면 최순실에게 부역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의원들이 총리를 겁박하고 창피를 주는 것을 행정부 견제로 인식하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의회가 되었다. 행정부의 정책을 질문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대정부 질문에 터져 나오는 국회의원의 막말은 본회의장에 터뜨린 말의 최류탄이고 언어의 햄머질임을 의원들 본인들만 모르고 있는 듯했다. 막말 국회의원일수록 ‘(보수) 개혁’ 또는 ‘사회주의 경제’을 주장하는 것이 2016년 대한민국 정치의 ‘불편한 진실’이 되었다. 

   
▲ 다당 체제가 출현하되 서로 경쟁하며 투쟁만 일삼는다면 결국 대한민국 정치는 남미식 정치 불안정, 정부 행정력의 마비, 그리고 종국에는 실패국가에 이르는 악순환에 들어설 것이다./사진=연합뉴스

국회의원의 막말은 정치가 지나치게 비대하고 힘이 크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이는 정치와 정부의 경제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는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민간단체의 해체’ ‘사회적 경제의 강화’를 외치는 정당과지지 국회의원이 늘어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새누리당의 비박(반박근혜)계 국회의원들이 새로이 만들겠다는 ‘개혁보수신당’은 “안보는 보수 기조이지만, 경제·복지·노동 분야에서 진보적 색채를 대폭 강화할 계획”이라는 설명8)으로 볼 때 경제에서의 국가 개입의 강화 등 사회주의화는 갈수록 강화되고 ‘경제적 자유’와 ‘규제완화’ ‘노동개혁’을 정책으로 지지하는 정당과 국회의원은 찾기 힘들어 지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정책의 사회주의·좌경화는 남미의 좌경적 경제정책 현상과 상당한 유사점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 퇴진 관련 촛불 시위에서 민주노총 등 노조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남미의 강성 노조 세력이 페론(Peron) 정권과 같은 포퓰리즘 정권의 집권 기반이 되는 현상과 오버랩(overlap) 되고 있다.  

3. 선진국으로의 길 또는 ‘남미화’로의 길에서 선택해야

2016년은 1987년 6월 민주화 이후 29년이 되는 해이다. 1987년 이후 과거의 고도 경제성장은 멈추었고 이제 연 2% 중반에 성장률로 그것도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2006년 첫 2만 달러 소득을 달성하였는데 10년째 3만 달러 달성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의 경제성장으로는 선진국 기준인 3만 달러 달성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식 청년실업률은 10%, 실질 청년실업률 30%로 최근에는 계속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17년 치러질 대선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의 대부분이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복지, 분배, 노동, 그리고 사회적 경제에 집중하고 있다. 좌파 포퓰리즘이 주도하는 남미(南美) 경제를 닮아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87체제’가 만들어낸 민주주의는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러니하게도 ‘시위의 일상화’를 맞이하고 있다. 1987년의 민주화가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경제의 민주화를 초래하여 저성장의 지속과 ‘대의민주주의의 후퇴’가 현실화 된 상황으로 된 것이다. 

종합하면 2016년 한국정치의 문제점은 법치, 자유(대의)민주주의, 자유 시장으로의 선진국으로의 길에서 벗어나 정치적 불안정과 무질서, 과격한 언론, 강성 노조, 반미, 그리고 좌경적 경제·사회 정책의 ‘남미화’로의 길에 들어선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남미화’로의 길은 ‘실패한 국가’(failing states)로의 길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 2016년 대한민국은 광장에서의 시민주권의 정치가 제도권 정치를 압도함에 따라 '정치 제도화'(political institutionalization)와 정치적 안정을 저해했다./사진=연합뉴스


1) ‘민주주의 공고화’란 러스토(D. Rustow)식으로 정의하면 선거를 포함한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되고, 정권이 야당에 이양된 적이 있으며, 정치문화 속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단계를 말한다. 헌팅턴(S. P. Huntington)에 따르면 공고화란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2차례의 정권교체 테스트"(two-turnover test)를 거친 민주주의를 말한다. 정초  선거(founding election)에서 정권을 잡은 정당이나 집단이 이후의 선거에서 패배하여 승자(야당)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이후 선거에서 또 다시 승자(야당)에게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 이루어진 민주주의를 말한다. ”2차례의 정권교체“를 통과한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준수하고 민주주의 제도의 틀 내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심화’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민주적 정당체제의 제도화, 정당간 적대감 해소, 국가 및 정치권력의 분권화를 의미하고 ‘민주주의의 질’이란 여성과 소수집단에로의 정치 참여의 확대, 부정부패의 감소, 빈부격차나 사회적 차별의 해소 등 사회·경제적 발전을 통한 민주의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오창헌, ”민주주의의 공고화: 개념적·방법론적 고찰,“ 『대한정치학회보』, 10집 2호, 2002, p. 109. 

2) 조갑제, “南美化로 가는 한국 - '종북의 난(從北變亂)' 불이 났는데...,” 『뉴데일리』, 2011년 10월 5일.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93378. 접속일: 2016년 12월 24일.

3) 원제는 Eric Hoffer, The Believer: Thoughts on the Nature of Mass Movements, New York:  HarperCollins, 1951. 이다. 

4) 에릭 호퍼, 『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서울: 궁리, 2011, p. 12.

5) Samuel P. Huntington, 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8, p.79.

6) 헌팅턴은 '정치제도화'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직이 가치와 안정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광장의 촛불 요구에 따라 국회의 의결이 구속된다면 의회라는 입법 조직이 가치를 잃게 되고 안정성도 확보하지 못하여 정치발전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로드 헤이그·마틴 해롭(Hague and Harrop), 『비교정부와 정치』, 서울: 명인문화사, 2011, p.32. 헌팅턴에 따르면 발전국가와 저발전 국가의 차이는 결국 제도화의 차이에 달려 있다.  

7)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State Building: Governance and World Order in the 21st Century, Profile Books, 2004에서 “failed states”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실패한 국가(정부)의 모습을 설명했다. 대척점에 존재하는 잘 작동되는 정부 또는 좋은 정부(good government)의 거버너스(governance)의 표상은 덴마크(Denmark)로 “getting to Denmark"라는 용어로 잘 작동되는 정부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8) 필자는 “경제는 좌파, 안보는 우파를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은 이념적 혼란을 겪다가 결국 안보가 좌로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좌파 경제정책은 우파 안보정책과 조화될 수 없고, 또 좌파세력이 우파 안보정책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또 유승민 의원은 ‘개혁보수신당’(가칭)의 정강정책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의 ‘안보 보수, 경제 진보’라는 프레임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재벌(대기업)의 기득권과 경제적 불평등을 문제시 하는 유승민 의원의 해답은 정부 개입에 의한 해결(또는 경제 민주화)과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였다. ‘가난이 부자유(不自由)’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부자연(不自然)’하기에 가난을 없애고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온정적 독재자(또는 정부)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온정적 독재자 또는 정부가 가난과 불평등 해결자가 될 수 있느냐이다. 자유주의자(보수 우파)는 온정적 독재자나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집단이고, 진보좌파는 가난과 불평등 해결자로서 정부 또는 온정적 독재자를 믿을 수 있다는 부류이다. 최근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결의 중도적 해결을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연구회를 만든다고 하는데 공인으로써 자신이 우(右)인지 좌(左)인지, 중도(中道)라면 온정적 독재 또는 정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김인영, “중도(中道)는 허상(虛像)이다,” 자유경제원 [생각의 틀 깨기 7차 세미나: ‘애매한 중도가 세상을 망친다: 중도는 없다’] 토론문, 2016년 6월 7일. 


(이 글은 지난 달 29일 마포 리버티홀에서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위기의 2016 무엇이 문제였나’ 2016 평가세미나에서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가 발표한 토론문 원문이다.)
[김인영]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