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시장덩어리규제로 원가절감및 신규투자억제, 배임죄확대도 기업가정신훼손

   
▲ 조동근 명지대교수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법’에 나오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정책 당국이 곱씹어야 할 최고의 금언(金言)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다 보면 눈에 안 보이는 커다란 손실을 자초할 수 있다. 규제(規制)가 그 전형이다. 규제는 아름다운 세계를 지향하지만, 역설적으로 화려한 약속은 우울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국무조정실이 집계한 우리나라 규제는 지난해 말 기준 1만5070건으로 1만5000건을 넘었다. 이는 중앙정부의 법령에 근거한 규제만 집계한 것이다. 잔 물고기는 계산에 넣지 않은 숫자다. 시행세칙, 규칙, 창구지도 그리고 형체는 없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림자 규제’까지 합치면 그 수는 셀 수조차 없다. ‘규제공화국’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관료의 뇌리에는 ‘관(官)은 민(民)을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규제 당국은 마땅히 시장 위에 위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 기저에는 ‘공익’을 위해서 민간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는 ‘중립적 권력실체’의 신념이 깔려 있다. 버려야 할 ‘발전국가 모델’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친(親)규제 성향도 일조하고 있다. 일이 터지면 여론은 규제 불비(不備)를 질타한다. 우연한 사건도, 언론과 정치의 질타를 거치면서 매뉴얼로 충분할 것마저 규제가 된다.

밀턴 프리드먼이 웅변한 ‘특수이익집단, 정치인, 관료’ 간의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도 규제 제조기와 다름없다. 특수이익집단들은 규제라는 보호막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 한다. 정치인이 로비 대상이다. 표(票)를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정치인은 이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다. 관료 조직은 규제를 통해 인·허가권과 예산을 거머쥘 수 있으므로 삼각연대에 합류한다. 이들 간의 ‘이해의 일치’로 삼각연대는 더욱 공고해지고 규제가 양산된다. 사적(私的) 이익을 추구하는 규제임에도 ‘공공성, 균형 발전, 약자 보호’라는 명분으로 포장되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역이 된다.

우리나라는 7년째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에 갇혀 있다. 최근에는 ‘저성장의 구조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휘몰아친 ‘경제민주화’ 광풍에 편승한 반(反)시장적 덩어리 규제의 역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원가 절감을 막는 하도급법 개정, 신규 투자를 억제하는 신규 순환출자 금지, 오너의 ‘경영상의 판단’을 부정하는 배임죄 확대 등의 정책 환경에서 기업가 정신이 발휘될 수는 없다. 신규 출점 금지, 출점 거리 제한, 대형마트 의무휴일 규제로 골목상권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적 자치’를 공적 규제로 치환하면서 시장의 활력이 꾀해지길 바랄 수는 없다. 규제는 시장이라는 수레바퀴에 뿌려진 모래일 뿐이다. 이처럼 거미줄 규제에 한국경제는 서서히 질식되고 있다.

획기적인 규제 개혁 없이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 창출은 불가능하다. 규제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적(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규제 존치의 입증 책임(立證責任)을 관료와 정치인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모든 규제를 대상으로 규제의 필요성과 수단의 적정성을 규제 부서가 규제개혁위원회에 입증하지 못하면 그 규제를 폐지하게 하면 된다. 일종의 비용편익분석(B/C)을 통과한 규제만 남겨둔다면 규제의 품질 관리가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피(被)규제기관에 규제의 적정성(適正性)에 대해 ‘심사청구권’을 주는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규제의 소비자는 피규제기관이기 때문에 피규제기관의 관점에서 규제의 적정성 여부를 판별하게 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규제를 보는 눈’을 제대로 가질 때 규제 개혁의 첫 단추가 끼워진다. 미국 연방대법관이었던 루이스 브랜다이스만큼 규제를 꿰뚫어 본 현인은 없다. “정부가 선(善)한 뜻에서 일을 벌일 때 가장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자유를 지켜야 한다. 자유에 대한 더 큰 위험은 열정적인 인간, 좋은 뜻은 가졌으나 그들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은밀한 침해(侵害) 속에 숨어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문화일보 문화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