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적 판단보다 정치적 결단…촛불 면죄부 준 '신의 판단'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
대통령 탄핵심판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희귀한 사례다. 정치적 사법통제 기관인 헌법재판소만이 유일하게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법적 판단이다. 대통령이 발휘하는 고도의 정치행위에 관해 헌법을 매개로 사법적 통제의 길을 열어놓은 강력한 견제 제도다.

8대0. 무슨 콜드게임으로 끝난 야구경기도 아니고 이 숫자는 무슨 의미일까? 과연 모든 판관들이 조금의 이의도 없을 만큼 대통령이 저지른 죄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정문이 밝힌 단 하나의, 그러나 절대적인 인용 근거는 오직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지'의 결여뿐.

그럼에도 결정문에 담긴 8대0이라는 이 독특한 현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광장에 촛불이나 태극기가 애초에 없었더라면, 대통령을 향한 분노가 '여의도 정치'의 울타리를 넘지 않았더라도, 8대0의 판결이 내려졌을까?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는 데 숫자에 담긴 함의가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철학적 가치관과 판단을 담보한 것인지, 판관들이 천착한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8대0의 현상이 담고 있는, 앞으로 감당해야 할 숨은 과제는 이제 시작이다.

헌법 재판관들은 법률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결단을 했다. 그들이 합의한 건 딱 하나, 내전을 방불한 듯 보이는 이 불필요한 소요를 서둘러 수습하고 국정을 안정화시키는 방향으로 결정을 해는 것이 '옳다'는 절박감에 합의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소송은 시시비비를 가려 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법률이 정한 사회적 정의(justice)와 사적 정당성(fairness)를 실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정치적 소송이라고 불러야 할 탄핵심판에서 재판관들이 수용한 건 광장의 외침이 전하는 정치적 요구였다.

   
▲ 박근혜 전 대통령에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관들의 8대0 인용결정은 법률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결단이라고 볼 수 있다. 8대0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봐야 한다. 전능한 신이 기준 삼은 심판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대통령 개인의 일탈 때문인지, 국가 공동체가 저지른 축적된 범죄의 제물이 된 건지 알 수 없다. 그건 오직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사진은 퇴임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그 정치적 요구가 정당한지, 그것이 정의에 얼마나 부합한지에 대한 질적 판단은 없다는 거다. 단지 재판관들이 인식하는 대통령의 문제적 원인과 그것에 기초한 판관들의 결과적 합의만을 선언한 거다. 헌재 결정에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는 근본적 이유다.

그렇다면 불복종 운동을 해야 할까? 가히 혁명이라도 하여 정치의 힘으로 질서를 전복시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이런 당연한 의문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의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현 상황에 대한 신의 뜻은 무엇일까?

'소수의견'은, 인용판결 구성자체의 엉성함과 빈약함에도 8대0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봐야 한다는 거다. 전능한 신이 기준 삼은 심판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대통령 개인의 일탈 때문인지, 국가 공동체가 저지른 축적된 범죄의 제물이 된 건지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수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어쩌면 그것이 신의 목적이었던 걸까? 박근혜라는 인물이 지닌 보수우파의 상징성은 탄핵과 함께 산산이 깨졌다. 과연 그 조각들을 모아 다시 붙이고 세우는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조각 난 보수의 사명이 될 수 있을까?

좌파의 저력은 인간 심연에 자리한, 정의를 좇고자 하는 본능에 호소한다는 거다. 딱히 의식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도 쉽사리 분노할 수 있는 이유다. 사안에 대한 통찰이 없어도 드러난 몇 개 사실만으로도 분노할 수 있다. 얄팍한 정의감을 충만이 만족시킨다.

촛불의 함성은 그것을 함축했고 언론은 부채질했다. 100만 인이 모였다는 선동은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을 불식시키고 무조건 옳다라는 자기확신을 심화시켰다. 확대 재생산으로 구조화된 분노는 오직 한 사람으로 모아졌고 헌재는 탄핵으로 화답했을 뿐이다.

보수 우파는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과정의 잘못을 지적하며 개별 투쟁을 할 때가 아니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받은 응징의 신호라고 생각을 전환한다면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파가 태어난 자유의 본질, 신을 경외함의 자리에서 무엇이 어긋났는지 살펴야 한다.

역사의 주관자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가정과 교회에서 회개해야 마땅한 잘못을 먼저 찾아야 한다. 좌파가 갖고 있지 않은, 전능자를 향한 경외감을 회복시켜야 한다. 신과 무관한 정의감은 곧 교만이다. 인간은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싸우자고 할 것이다. 억울함의 분노는 크게 들리는 법이다. 새로운 전선을 만들자는 호소가 상처받은 마음을 설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전하는 구속사의 진실이다. 소수의견일지라도 말이다.

다급한 정치적 안정을 얻기 위해 법적 정의로 포장한 헌법 재판관들의 방법은 얼마나 정당한가? 여기에는 '올곧음'을 대하는 가치관과 철학의 문제가 개입돼 있다. 그들은 광장의 촛불은 무조건 옳았다는 면죄부를 줬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비용을 치르더라도 역사적인 올바름을 찾기 위한 법적 투쟁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애써 이념문제가 아니라고 선언만하면 외면할 수 있으리라는 그릇된 믿음이 8대0의 숫자를 만들어낸 동력이다. 그런 외눈박이 믿음은 두려움에서 피어난다.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의 정의를 위해 싸우기 보다 확실해 보이는 현재의 잘못을 확대하고 단죄하는 것이 안전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옳았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분명한 건 이제 그 책임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몫이 돼 버렸다는 거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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