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내전 참가한 헬라스군대 생환주도 리더들, 설득과 협상 전략 돋보여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5) -크세노폰(BC430?~BC355?)의 <아나바시스>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자유의 갈망과 용맹이 1만 병사를 구하다

어느 집단이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생존해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도움은커녕 항복하거나 생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난폭한 적에 에워싸인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나바시스(Anabasis)>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작은 군사집단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생환하는가를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헬라스(Hellas, 그리스 사람들이 당시 자기나라를 부르던 이름이다) 사람들이 페르시아 내전에 용병으로 참가하여 내륙까지 진군했다가 실패한 후, 적진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헬라스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린 전쟁기이다. 저자 크세노폰(Xenophon, BC 430?~BC 355?)은 군인이자 역사가였다. 그는 플라톤과 동년배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하지만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플라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크세노폰, 출처: http://als.wikipedia.org/wiki/Datei:Xenophon.jpg
        

더구나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버트란트 러셀로부터 “현명한 사람이 한 말에 대한 어리석은 사람의 기록은 정확하지 못하다”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바시스>와 그의 다른 저작 <헬레니카>, <키로파에디아> 등에서 엿보이는 크세노폰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에서 기사회생했지만, 아테네인임에도 한때 스파르타인의 편을 들어 추방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아나바시스>는 ‘올라가기’란 뜻으로 헬라스 용병이 페르시아의 퀴로스(Kyros) 2세와 함께 저지대인 소아시아의 해안지대에서 출발하여 페르시아의 티그리스와 에우프라테스 강 사이의 고지대로 행군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이 책의 대부분은 퀴로스의 전사 이후 헬라스군의 퇴각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페르시아 퇴각기>가 더 어울리는 제목일 듯싶다. 물론 번역자는 2011년 같은 책을 <페르시아 원정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했다. 하지만 적극적 원정 활동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어떻든 헬라스 군이 페르시아 내전에 개입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퀴로스 2세는 그의 형인 페르시아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피시다이족을 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태수로 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군대와 헬라스 용병을 모은다. 이에 평소 퀴로스와 교유하고 있던 헬라스 장군들에 의해 중무장 보병 1만1000명, 경방패병 약 2000명 등 1만3000여 명이 모병되어 참전하게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퀴로스가 페르시아 대왕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인 줄은 모르고 참가했다. 그러다 점점 내륙 깊숙이 진입한 상태에서 뒤늦게 원정 목적을 알게 되자 퇴각하고자 했다. 하지만, 급료 인상을 내거는 퀴로스의 제안과 독자 퇴각의 어려운 현실 등을 고려하여 할 수 없이 페르시아 대군과의 전투에 임한다.

 

   
 ▶아나톨리아의 동중부 지방의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모습이다. 헬라스 용병들은 소아시아 해안지역에서 모병되어 황량하고 험준한 고원지대인 아나톨리아 지방 어딘가를 횡단하여 바빌론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하지만, 퀴로스 2세 휘하의 10만여명의의 군사와 페르시아 대왕의 군사 40만여명명(책에서는 120만명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이 접전한 쿠낙사(Cunaxa) 전투에서 헬라스 군 진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퀴로스의 전사와 함께 반란군이 궤멸되고, 패잔병은 대왕에게 투항한다. 기원전 401년의 일이다.

오롯이 남게 된 헬라스 용병은 대왕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고,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 태수 팃사페르네스(Tissaphernes)와의 협상을 통해 퇴각 안내를 받으며 퇴각한다. 그러다 그의 계략에 말려 주연에 초대된 헬라스 군 장군들이 사로잡히고, 대왕에게 압송된 후 처형을 당한다.

스파르타인 사령관 클레아르코스(Clearchus)와 헬라스의 주요 장교들의 몰살로 헬라스 용병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졸지에 장군들을 잃게 된 헬라스 군은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지만, 곧 전 병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군과 대장들을 새로이 선출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퇴각하게 된다. 장군들의 몰살이후 군대가 자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헬라스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투항하거나 분열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생존 방식을 찾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

이 책은 크세노폰이 직접 장군으로 선출되어 군대를 통솔해 가면서 체험한 전쟁기 또는 전기(傳記)형식을 띈다. 그의 문체는 화려하진 않지만, 군인답게 군대의 이동과 주둔, 병참 조달, 전투 전개 상황, 통과지역 지형이나 부족들의 생활상 등에 대해 소상히 기술해준다. 하지만 정작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헬라스 용병이 다양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방식이다. 여기에 헬라스인의 저력과 이상적 지휘관의 모습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로부터 흑해 연안의 헬라스 식민지까지 진출과 퇴각을 한 행군의 거리는 무려 1,150파라상게스(약 6,325km), 행군 날수는 1년 3개월이나 된다. 그 과정에 수많은 부족들과 전투와 협상을 벌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한다. 결국 흑해 연안의 헬라스 식민지에 도착하여 때마침 페르시아 팃사페르네스를 치러 출전한 스파르타 군을 만나 이에 편입되면서 이들의 험난한 여정이 끝을 맺는다. 수많은 전투과정에서의 전사, 이탈 등으로 천신만고 끝에 남은 병력은 6000여 명이었다.

기나긴 퇴각과정에서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페르시아 부족들에 대한 대응방식의 선택의 폭은 좁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느냐, 싸워서 정복하느냐 양자택일의 상황에 늘 맞닥뜨려야 했다. 이 때 이들이 택하는 기준은 분명했다.

”무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을 때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더 값진 친구들이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싸워야 한다면 무기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을 때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더 잘 싸우게 될 것“이란 점이다. 이들은 무기를 버리고 굴종을 택하기보다 맞서 싸울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뒤에서 끊임없이 추격하는 페르시아 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며 이들을 따돌려야 했다. 여러 호전적인 부족들이 안전한 귀로를 허가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공격해서 활로를 뚫었다. 이들을 가로막는 세력들에 대한 메시지는 단호했다.” 우리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되도록 피해를 적게 주며 이 나라를 통과할 것이나, 누가 우리의 길을 막으려 하면 우리는 그 자와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싸운다.”는 것이다.

불굴의 용맹과 귀향에 대한 강렬한 희구, 자유에 대한 소망, 리더를 정점으로 한 헬라인들의 결속력이 이들을 살려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겪은 최대의 고통은 정작 적군보다 배고픔이었다. 고립된 적국에서 일만여 군사와 종군하는 노예나 수송수단인 가축의 일용양식을 대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시로 굶기 일쑤였고, 그마나 우호적인 마을을 만나면 시장을 통해 매입하여 조달했지만, 시장을 제공받지 못할 경우 약탈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늘 생존을 위한 제로섬 게임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식량과 전리품 획득과정은 적과의 협상이나 정벌이냐의 냉혹한 결정을 요구했다. 이 때마다 이들은 민주적 방식으로 전 군사들의 다수결 의사에 따르거나, 다양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난 후 예언자가 전해주는 전조(前兆)의 길흉에 따라 군대의 진퇴를 결정했다.

헬라스 군의 생환에 가장 중요한 동력은 군사력과 지휘관의 리더십이었다. 헬라스 군의 전투력은 페르시아 군을 압도했다. 개개인의 전투능력 뿐만 아니라, 중무장보병과 경무장 방패병, 투석병, 기병 등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활용하는 전술 운용도 뛰어났다.

또 생면부지의 적국의 자연지형과 습속, 성곽, 도시 및 촌락들의 환경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현지인을 포획, 활용하며 늘 창조적 전술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산악과 평야지역, 성채 등에서 각기 다른 진법이나 공격술을 선보였고, 이는 헬라스 군의 현지 적응력과 총체적인 역량을 높여주었다.

퀴로스가 반란을 일으키기 오래 전부터 헬라스인에게 다양한 사전지원을 하면서 인간관계를 구축하며 유사시 원활한 모병을 위해 공을 들인 것도, 일만여 명에 불과한 헬라스 군을 자신의 십만여 명의 ‘야만인(페르시아 군)’보다 더 믿고 의지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 페르시아 대왕의 사십만 대군과 접전한 쿠낙사 전투에서 우익을 맡았던 헬라스 군만이 페르시아 군 좌익을 허물고 압도한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군대의 수에 비해 실제 전투력은 취약한 것으로 드러난 페르시아 군의 약점은 훗날 스파르타와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동방 원정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헬라스 군의 생환기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에게 페르시아 정벌에 자신감을 심어준 하나의 요소였음은 틀림없다.

한편, 적국의 한복판에서 ‘일만 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페르시아 제국이 여러 부족에 의해 분권적으로 느슨하게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만인’ 에 대한 헬라스인의 우월감과, 굴종보다 자유를 존중하는 특유의 자부심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고르디온(Gordion) 박물관 벽면에 장식된 이수스 전투에서 싸우는 알렉산더의 대왕의 모습이다. 모자이크의 복제품이다. 이 박물관에는 황금 왕으로 유명한 미다스(Midas) 왕이 다스리던 아나톨리아 중서부에 있던 프리기아Phrygia) 왕국의 유적을 모아놓고 있다. 이 지방에 “고르디온의 매듭을 푸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는 신탁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고, 알렉산더가 동방원정 시 이곳에 들러 단칼에 매듭을 베어 푼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알렉산더의 벽화를 남긴 것도 이 지방민들의 우호적 정서로 읽힌다. ⓒ박경귀

이 책은 군인에게는 군대의 전투와 전술운용 대목이 주목을 끌겠지만, 각 분야의 리더들에겐 조직관리 과정에서의 설득과 협상의 전략에 대한 교훈을 더 많이 얻게 해 준다. 다양한 분쟁이나, 의사선택, 적군과의 협상의 시기에 장군과 병사들이 행한 수많은 연설과 주장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무조건 상명하복의 요구가 아니라,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공명정대한 자세와 정확하고 합리적인 상황 판단에 의한 설득과 협상으로 이해관계자가 수용하게 만드는 리더십의 전형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추천도서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저,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출판부(2001), 264쪽.
  <페르시아 원정기>, 크세노폰 저, 천병희 옮김, 숲(2011),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