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5월9일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41.1%득표율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일에 대해 사법시험 합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꼽았던 그가 '장미 대선'에서 승리,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는 세 번째 기쁨을 누리게 됐다. 

   
▲ 경남고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한 문재인 당선인(윗줄 가운데)/사진=연합뉴스

문 당선인은 자신의 정치인생에 대해 ‘운명’처럼 시작됐지만 이젠 ‘숙명’이 됐다고 말해왔다. 청년기에 노동자를 대변했던 인권변호사 시절 정치인으로서 소양을 쌓았고, 노무현정부 시절 국정운영 경험이 정치를 벗어날 수 없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관으로서 청와대에 들어갔던 그는 노 전 대통령 임기 중인 2004년 돌연 정치를 그만 두고 히말라야로 떠났던 일이 있다. 당시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던 그는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로 정치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것이 기뻤다”고 했지만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가 자신의 운명을 바꿨다”고 했다.

문재인 당선인은 6.25전쟁 중이던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함경도 흥남 출신으로 전쟁 때 월남해 경남 거제에 정착했다. 부친의 장사가 실패하면서 모친이 연탄배달을 해야 했고, 어린 그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도왔다. 

경희대 법대 재학 시절 유신반대운동에 뛰어들었고, 1975년 4월 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 다음날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이 때문에 구속과 제적, 강제징집을 당했고,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입대해 1978년 31개월의 군생활을 마쳤다.

군에서 제대했지만 시위 경력으로 인해 복학도 안됐고, 취업도 여의치 않았던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 문 당선인은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뒤늦게나마 한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아들로서의 결심”이었다고 했다. 부친의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에 몰입했고 이듬해인 1979년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시 준비 중에도 학내 시위에 가담한 문 당선인은 계엄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됐고 1980년 경찰서 유치장에서 2차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문 당선인은 사법연수원 시절 7년 연애한 김정숙 여사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자 변호사로 일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리게 된 운명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1988년 35세 문재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노동현장의 인권유린을 참을 수 없다”고 포효한 까닭은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주력산업이던 신발업체의 여성노동자들을 만나게 된 것. 그들은 “회사가 점심시간을 주지 않는다. 재봉틀 밑으로 쥐가 다니고, 화장실엔 칸막이도 없다”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회사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경찰에 끌려갔고, 회사에서는 잘렸다”고 호소했다.

이들을 위해 법정에 서게 된 문 당선인은 이후 울산, 창원, 거제, 포항, 구미에서 노동자들을 변론하는 인권변호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그분들 덕분에 저는 인권변호사, 노동변호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저는 그분들에게서 ‘세상을 바꾸는 용기’,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배웠다.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다”고 말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 청와대 전 비서실장인 문재인 변호사 등 측근들과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왼쪽부터 노 전 대통령, 문재인 변호사(전 청와대 비서실장), 문용욱 비서관, 전해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사진=연합뉴스

문 당선인은 2002년 당시 대통령후보인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위 본부장 직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노 전 대통령 당선 후 그는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비서실장을 맡으며 대표적인 ‘친노(친 노무현)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재단법인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지내던 중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문 당선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 당선인은 2015년 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10개월간 당 대표 시절 재·보선 패배,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 국민의당으로 분열이 잇따르면서 ‘사퇴’ 요구가 빗발쳤고,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하지만 지난해 4.13총선에서 당초 100석도 힘들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이 총 123석의 제1당을 이루면서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났다.

촉각을 다투며 전국을 누비던 지난 선거유세 기간 문 당선인은 자연스러운 순간에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회자된 바 있다. 거제 크레인 전도 사고 때에도 문 후보는 비공개로 현장을 찾아 유족들을 위로했다. 그때 인형을 안고 있는 한 소녀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소녀를 품에 안고 함께 굵은 눈물을 흘린 일이 있다. 

강릉에서 충주로 가던 중 식사 해결을 위해 잠시 들른 회성휴게소에서 5분만에 육개장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일어선 문 당선자가 쟁반에 자신의 빈그릇과 차를 빼러간 수행팀원의 빈그릇을 담아 들고 반납하러 간 모습이 찍혀 화제가 됐다.

따르고 싶은 정치인으로 ‘진보적이면서도 통합적인 리더십’을 보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꼽은 문 당선인은 두 번째 대선에 도전해 성공했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당시 당과 제가 하나가 되지 못했다. 준비가 부족했다”고 소회를 밝힌 그는 “그래서 더 단단히 준비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의 공과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는 또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에 대해 “광화문에서 국민들과 막걸리 한잔 하고, 주말에는 아내와 같이 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소박한 삶”을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에 당선돼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을 이루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나가는 것”을 신에게 기도해왔다고 밝혔다. 

문 당선인은 스스로에 대해 “가난 속에서 일찍 철들었다”며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치관도 가난 속에서 생겼다”고 말했다. 이제 대통령이 된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저는 원칙을 지켜도 손해 보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상식대로 하면 성공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국민 누구나 정의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피부로 느끼는 세상, 꼭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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