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70)-영웅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불패신화의 기록 
아리아노스(95~175)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고대 그리스 문명이 낳은 인물을 논할 때 알렉산드로스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삶을 추적할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걸출한 철학가의 사상은 당대의 여러 저작을 통해 음미할 수 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서른세 살의 불꽃같이 짧았던 삶은 당시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아킬레우스는 호메로스라는 탁월한 시인을 만난 덕에 자신의 영웅적 행적을 후대에 인상적으로 남길 수 있었다. 서사시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교과서였고, 그리스인들의 삶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자신에게는 호메로스와 같은 위대한 시인이 없어 자신이 저평가 받게 될 것이란 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기도 한 칼리스테네스를 종군시켜 자신을 아킬레우스와 같은 전설적 영웅과 비슷하게 묘사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반역 혐의로 처형됨으로써 호메로스의 역할을 끝내 다하지 못했다.

이런 탓에 불행히도 알렉산드로스 생전의 생생한 삶을 추적한 작품들은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같은 전범이 될 문학작품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없다. 다만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참전한 부하들이 투박하지만 진솔하게 쓴 몇몇 저술들은 있었다. 그의 부하 장군이던 프톨레미아오스는 동방원정의 경과를 주로 군사 운용의 측면에서 자세히 기술했다. 시종이었던 카레스는 몇몇 단편적 일화를 소개한 책을 썼다. 또 인도 원정 이후 더 이상의 원정을 접고 회군하는 과정에서 함대를 이끌고 인도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항해한 네아르쿠스의 기록도 있다. 또 아리스토불루스는 원정 지역의 지리와 지형학적 특성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는 로마 시대의 인물인 아리아노스(95~175)의 작품이다. 아리아노스는 로마와 아테네의 집정관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에픽테토스에게서 스토아 철학을 배운 철학자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400여년 후대의 인물이다. 그리스 철학과 문화를 애호한 그는 알렉산드로스 생전에 부하 장군들이 남긴 저작들과 2세기 활약한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전기>, 플루타르코스가 쓴 <비교열전> 속의 알렉산드로스 전기 등을 종합적으로 참조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남겼다.

그는 여러 저작들을 참조하면서 기술 내용이 서로 상충되거나 사실 여부가 미심쩍은 부분들은 채택하지 않고 가급적 당시 군대의 내부 사정에 밝았던 장군들의 기록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생전의 활약상을 보다 생동감 있게 그리기 위해 주로 휘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루스의 저작을 참고했다. 이런 까닭에 동방원정 과정의 군사 작전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탁월하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의 병법과 원정 상황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반면에 전쟁터를 누비면서 겪는 알렉산드로스의 다양한 정서와 사유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은 적은 편이다.

이 동방원정의 기록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전투 지휘 능력(generalship), 부하 통솔력(leadership), 그리고 인품과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몇 대목을 살펴보자.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원정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매 전투마다 적이 미처 생각할 수 없는 대담하고 창의적인 작전을 구사했다. 그는 지형지물이나 군대의 포진, 군세와 기상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 기마병을 이용한 기동전은 물론 보병의 도강, 매복, 포위공격, 공성 장비를 이용한 성벽 공격 등 다양한 형태의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다뉴브 강을 다리를 놓지 않고 하룻밤에 건너버려 적을 동요시켰고, 인도 원정 시 인더스 강을 건널 때에는 배를 해체하여 숨겨두었다가 일시에 조립하여 띄우기도 했다. 튼튼한 성채를 구축한 티레를 공격할 때는 투석기와 같은 공성 장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토루를 쌓거나 성벽 밑을 파서 무너뜨리는 작전을 써서 효과를 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략과 전술에 있어 천재적인 역량을 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군사적 탁월성 못지않게 부하들을 휘어잡는 리더십 또한 뛰어났다. 그는 대전투가 끝나고 나면 항상 각종 운동경기와 문학 경연, 음악 경연 등을 열어 병사들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고 전투로 지친 심신을 풀게 했다. 병영 내의 문화체육 행사를 통해 동료애를 북돋우고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고양시켰던 것 같다. 이러한 비군사적 활동 또한 부하들의 마음을 사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사랑도 남달랐다. 그의 군대가 인도 정복을 마치고 귀로에 게드로시아 사막을 지날 때였다. 지독한 갈증으로 장졸들이 고생했다. 물을 구하러 갔던 병사들이 어렵게 구한 물을 투구에 담아와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쳤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모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 물을 사막의 모래 위에 쏟아버렸다.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자신만 혼자 마실 수 없으니 차라리 그 물은 없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병사들을 생각하는 그의 애틋한 행동이 병사들을 감동시키지 않았을까. 이렇듯 지휘관이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면 리더십은 자연히 만들어진다. 

알렉산드로스는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배포가 컸다. 부하 장졸들에 대해 한번 믿음을 주면 굳건하게 신뢰했다. 유명한 사례가 있다. 한번은 알렉산드로스가 병에 걸려 고생할 때 주치의 필리포스가 물약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신임하는 장군인 파르메니오가 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를 독살하려는 정보가 있다는 쪽지를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 경고의 글을 읽은 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 쪽지를 필리포스에게 건네주고 그가 쪽지의 글을 받아 읽는 동안 물약을 받아 태연하게 마셨다. 필리포스가 말한 대로 그 약을 먹고 알렉산드로스는 건강을 회복했고,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진정한 친구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하들을 믿었던 알렉산드로스의 통 큰 신뢰의 덕성은 아쉽게도 나중에는 점점 흐려져 갔다. 동방원정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자만심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페르시아를 완전하게 정복한 후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페르시아의 복식과 음식 문화를 차용하고, 페르시아 병사들을 중용하게 되면서 마케도니아 부하 장졸들과 불협화음이 자주 일어났다. 그로 인해 부하들의 모반이나 배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부하들을 의심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페르시아 방식의 예를 요구하자 이를 술자리에서 비판한 친구 칼리스테네스를 충동적으로 죽이게 된 것도 알렉산드로스가 부하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용맹한 전사이자, 탁월한 왕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용맹한 전사에 대해서는 비록 패장이라도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인도 정벌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포로로 잡힌 인도 왕 포루스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대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에게 자신의 왕국을 그대로 통치하도록 하고 더 넓은 영토까지 얹어주기까지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왜 그렇게 험난한 정복 전쟁을 벌였을까. 그는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를 침탈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여러 신전들을 불태운 만행도 응징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을 불태워버린 것도 그리스의 최종적인 복수를 완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당시 지구상에 존재했던 건축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웅장했던 왕궁이 소실된 것은 인류의 중요한 유산 하나를 잃어버린 것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전쟁의 명분은 분명 페르시아 응징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그 유일한 목적 달성에만 혈안이 되었다면 그는 후대에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페르시아 정벌을 통해 동방과 서방의 완전한 통합을 꿈꾸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을 희구했다. 그가 자신과 부하 장졸들이 합동으로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식을 올리고, 페르시아 귀족 자제들을 마케도니아 최고의 정예 기병으로 편입시킨 것도 양국 간의 인적 결합을 통한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벌하면서도 페르시아 인들의 원성을 사기는커녕 환대와 칭송을 받았다. 전쟁 포로로 잡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모친과 왕비 등 왕족들을 우대하고,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를 배반하여 죽인 총독 베수스 일당을 끝까지 추적하여 잡아서 공개 처형한 행위들이 페르시아 인들의 호의를 샀기 때문이다. 저자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러한 덕목을 곳곳에서 칭찬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명예욕이 유달리 컸다. 그는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와 같은 고대 영웅들의 행적을 선망했고, 그들의 업적을 뛰어넘고자하는 강렬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정복 전쟁과정에서 그들의 성취와 관련된 지역에 이르면 기어코 자신도 그곳에서 더 큰 성취를 만들고자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헤라클레스도 차지하지 못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인 소그디아나의 아오르노스 바위산을 점령한 사실을 자랑한 것도 하나의 예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과음과 풍토병 등의 원인으로 바빌론에서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는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도 아라비아 정벌을 계획한 것으로 아리아노스는 기술하고 있다. 그의 끝없는 정복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리아노스는 전반적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이 아몬 라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자신의 존엄성을 증대시키려는 수단이었다고 보았다. 또 부하 장수들과 갈등을 겪게 만든 궤배례 또한 페르시아의 관습을 차용함으로써 페르시아 인들을 동화시키려 했던 정책적인 선택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불굴의 인내력과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였으며, 용감하고 모험심이 강한 탁월한 전사이자 왕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숱한 작가들이 어떤 이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어떤 이는 그칠 줄 모르는 정복욕에 사로잡힌 무모한 이로 그린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학문을 배웠지만 그와 같은 현인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끝없는 야망에 불타는 청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그가 이룬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군사적 성취만 도드라질 수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광대한 정복 활동이 결과적으로 동서 문화교류를 촉진시키고, 마케도니아 인들이 이어간 후계 왕국들을 통해 헬레니즘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큰 업적이라 하겠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아리아노스 지음, 박우정 옮김, 글항아리(2017). 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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