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언급한 경북 안동시 임청각. 백배 공감한다. 다만 조금 아쉬움 남는다면 임청각 바로 앞에 있는 국보 제16호 신세동 7층 전탑에 대해서도 한 마마디 쯤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건국훈장 독립장)의 생가다.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은 당초 99칸으로 건축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일제의 만행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산실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고성 이씨 문중에서 9명의 독립운동가에 부인 며느리 손부까지 나섰으니 자그만치 12명이다. 임청각 주인과 가솔들이 줄줄이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집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았다.

99칸의 유서 깊은 종택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잘려 나가면서 70여칸으로 줄었다. 집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마저 막혀 배산임수의 명당터를 무색케 했다.

   
▲ 임청각 서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16호 신세동 7층 전탑. /사진=연합뉴스

임청각 서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탑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신세동 7층 전탑. 전탑은 석탑이나 목탑이 아닌 흙으로 구운 작은 벽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벽돌탑을 일컫는다. 임청각의 행정주소는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63, 옛 주소로는 법흥동 20-3이다.

법흥동인데 탑의 이름은 왜 신세동 7층 전탑이 되었을까? 1962년 이 탑을 국보 제16호로 지정할 적에 옆 동네의 이름을 잘못 붙여서 그리된 것이라는 웃지 못할 사연이 전해진다.

신세동 7층 전탑 자리에는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고 법흥동은 이런 연유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임청각은 법흥사라는 옛 절터에 세워졌으며 이로 인해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으로 불리기도 한다.

번지수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국보 제16호 신세동 7층 전탑은 어떤 모습일까. 탑 바로 옆으로 철길이 놓여 있다. 쉼 없이 오가는 요란한 기차의 울림에 천년 전탑은 몸살을 앓고 있다. 석탑도 아닌 흙으로 빚은 벽돌이 75년을 그렇게 버티고 있다. 1942년 중앙선 철로가 놓였으니.

철로 공사 때 탑이 훼손되어 제 모습을 잃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기단부를 돌아가면 감싸고 있는 판돌에는 신장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장을 새긴 판돌의 위치가 바뀌었고 시멘트로 듬성듬성 보수한 흔적도 애련하다. 지붕엔 듬성듬성 남은 기와의 모습이 애처롭다. 석탑이 아닌 전탑이었으니 세월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배려가, 세월에 씻겨나간 채 상채기를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 이후 안동시는 "문화재청과 함께 임청각 원형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2014년 1억 원을 들여 임청각 주변 시설정비에 이어 지난해부턴 4억3000여만 원을 들여 보수 사업 등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 참에 임청각 뿐만 아니라 상채기 난 몸으로 천년을 버텨온 국보 제16호 7층 전탑의 몸살도 낳게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번지수 틀린 이름도 제대로 찾아주었으면 한다.

낙동강을 굽어보며 웅장함과 위용을 자랑하던 모습은 철길에 가로막혀 목만 내 놓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탑은 제자리를 빼앗긴 채 좁디좁은 감옥에 갇혔다. 열차가 지날 때 마다 온 몸을 부르르 떨어야 하는 분노를 이제는 멈추게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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