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타이틀만 들어도 수컷들의 땀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온갖 권모술수가 그려지는 작품들이 있다. 한국 대표 느와르물로 꼽히는 '부당거래', '신세계' 등이 그렇다. 두 영화에서 각각 각본, 연출을 맡은 박정훈 감독은 사회 조직의 유착 관계, 그 안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씁쓸한 결말까지 그 누구보다 한국적이고 풍성한 느와르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환호를 끌어냈고, 어느덧 그의 작품은 하나의 장르가 됐다.
 
그렇게 대한민국 사회에 코웃음 치며 붉은 선혈을 낭자하게 만들었던 감독이 이번에 판을 더 키웠다. '북한 VIP의 기획 귀순'이라는 생소한 소재로 말이다.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북에서 건너온 VIP 광일(이종석)은 여성의 가느다란 목선만 보면 눈이 돌아가고, 고향에서 그랬듯 무자비하게 여성들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 사진='브이아이피' 스틸컷

 
북한 고위층의 자제 광일이 서울에서 온갖 활개를 치고 다니고 난 뒤 수습에 나선 건 그를 북한에서 빼돌린 국정원 요원 재혁(장동건)이다. 특별수사팀 경찰 채이도(김명민)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용의자 광일을 쫓지만 재혁의 갖은 방해공작에 허탕을 치고, 광일을 잡는 데 여생을 바친 북한 보안성 공작원 리대범(박희순) 또한 거대한 사회 구조 앞에서 너무나도 먼지 같은 모습이다. 광일이 흘려줄지 모를 콩고물에 혈안이 된 CIA 요원 폴(피터 스토메어)은 광일의 범죄를 방관하며 맴돈다. 이들이 두뇌를 풀가동하고 서로 거센 견제구를 던지는 동안 괴물은 팔자 좋게 유유자적할 뿐이다.
 
'브이아이피'의 장점은 근현대사에 실제 일어났던 '기획 탈북' 현상을 북한 연쇄살인범의 행적으로 각색하면서 시스템의 취약점을 짚어내고, 우리 사회의 위치와 한계를 명확히 한다는 데 있다. 귀하신 VIP 연쇄살인범을 두고 저들끼리만 대립각을 세우기 바쁜 '브이아이피'는 우리나라 조직 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권력가들의 유착과 윗선의 개입을 기본으로 수사는 난항을 겪고, 복수 한 번 해보겠다고 죽자살자 덤벼들어도 잘난 놈 목덜미 한 번 잡아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거대 권력 앞에서 느껴지는 무기력감을 쉴 새 없이 전달한다.
 
각 조직의 이해관계와 세력 싸움을 정확히 짚어낸 설정임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감독의 이전 작품에는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싫은 류승범의 멋드러진 반항기('부당거래')가 있었고,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다는 박성웅의 깊은 무게감('신세계')이 있었다. 박훈정 감독이 그린 인간군상은 다채롭게 살아 숨 쉬고, 러닝타임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의 뇌리에서 생생하게 펄떡거렸다. 하지만 '브이아이피'에서는 캐릭터 개개인의 깊이감이 부족하다. 장동건에 이어 김명민, 박희순까지 각기 성향은 다를지라도 그저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모범생들이기 때문이다.


   
▲ 사진='브이아이피' 스틸컷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종석표 괴물'의 위력도 마찬가지다. 순정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 귀골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성을 고문하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들을 지긋이 쳐다보던 맑은 광기는 좋았으나, 이 본성이 무너지는 지점에선 돌연 사춘기 소년처럼 군다. 이종석의 사이코패스는 분명 색달랐지만, 촘촘히 쌓이지 못한 캐릭터가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이번 작품에서 관객들이 가장 불편을 느낄 만한 부분은 이종석의 가학성 장면일 듯하다. 권력 앞 끝없는 좌절과 분노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잔혹성이 곧 극적인 효과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총 다섯 챕터로 이야기를 나눈 감독은 나체의 여성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하는 장면에 무려 두 챕터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고, 적나라한 묘사를 들이붓는다.
 
다만 막이 다 올라가면 돌아오는 보상도 있다. 박훈정 감독은 프롤로그·에필로그를 통해 영리한 수미상관 연출을 선사하고, 이야기꾼다운 재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결말을 위해 이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브이아이피'는 오는 24일 개봉한다.


   
▲ 사진='브이아이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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