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 박정희반대로 가는 개혁, 저성장 양극화 하향평준화 조장

   
▲ 조우석 문화평론가
조우석의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좌승희, 김창근 공저) 서평

"박정희는 지금까지 경제학의 이름으로 설명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산업정책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주류경제학이 보자면 박정희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결코 권하지 않는 걸 골라서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얼떨한 겁니다. 또 주류경제학에서 부정하는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통해 산업화를 이뤘고, 경제학이 가장 우려하는 경제력 집중과 경제적 불균형의 방식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때문에 저들에게 박정희는 해독될 수 없는 무엇으로 남아있을 뿐이죠.”

책 한 권을 읽고 많은 암시를 받는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닌데,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좌승희-김창근 지음, 일월담 펴냄)가 그랬다. 내친 김에 평소 존경하는 분인 저자 좌승희 박사에게 전화를 자주 해 책 이해에 요긴한 얘기를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저자가 들려준 얘기의 하나가 앞의 인용문이다. 아카데미즘의 함정에 빠져있는 경제학 내부가 어떤 분위기인지는 안 봐도 가늠되지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새삼 충격이다.

   
▲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
지적 허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제학자들

거대한 지적 허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 경제학자들은 실사구시의 태도로 세상을 바라 볼 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은 대한민국의 먹물답게 거의 예외 없이 진보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지 않던가? 곤혹스럽다. 세계가 칭송하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니 만치 경제학 한다는 이들이 자의반 타의반 한강의 기적을 편의주의적인 방식으로 뜯어 맞추고 꿰매서 설명을 하긴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박정희의 성공방정식’이 결코 논리적이거나 인상적일 리 없지만, 그걸 제3세계 후진국에 적용할 경우 예외 없이 실패하고 만다. 이 모든 게 잘못된 설명탓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우리가 코앞에서 경험한 역사인데도 그걸 규명하는 학문이라는 게 저토록 지리멸렬할 수도 있다. 학문이 때론 어떻게 도그마로 변질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학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시장이란 신성화된 그 무엇이라서 박정희 식의 정부의 개입은 어떠한 경우에도 최소화되어야 믿는다. 그들에게도 박정희의 성공은 쉬 해석되지 않는다. 다음은 좌승희 박사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그게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고민일 겁니다. 경제교과서대로 하지 않은 박정희를 끌어안고 있자니 해석이 안 되고, 그렇다고 내다버릴 수도 없고…. 아니 박정희를 해독하려고 하는 것부터가 금기(禁忌)이죠. 관치 경제, 정경유착, 독재, 불균등 성장전략 등이란 시장경제에 위배되며, 민주주의 이념과도 부합하지 않다고 저들은 믿으니까요. 주류경제학이 됐건 자유주의 경제학이 됐건 저들은 공통점이 있어요. 민주주의, 시장 혹은 정부와 경제적 번영 사이의 상관관계를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예전 영국 캠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가 박정희를 다소 긍정적으로 말하는 듯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반(反)시장주의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1960~70년대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박정희 산업정책 중 잘한 게 있더라 하는 식인데, 그렇게 해서도 박정희 경제개발의 실체를 온전히 해독할 수 없다. ‘과연 어떻게 해서 경제개발에 성공했는가?’하는 경제번영의 기본 요건과 원리를 실사구시적으로 설명 못하는 건 주류경제학과 매일반이요, 오십보백보이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등장한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는 그래서 이단아의 작업이 분명하다. 저자 좌승희 박사는 자기 자신이 한국경제학자 중에 돌연변이라서 경제 관련 학회에서 주류 경제학자들과 입씨름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대로, 한국경제는 세계경제발전사에서 이변이 분명하다. 내 솔직한 마음은 그런 경제발전을 일으킨 박정희가 너무도 불쌍할 뿐이다. 그가 일으킨 한강의 기적이 학문적 해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는 상황이 어디 예삿일일까?

학문이라는 이름의 지적 사기(詐欺)

사실 경제학뿐인가? 정치학 사회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회과학이 지금껏 박정희 해독을 하지 못한 상태이다. 거룩한 그 무엇, 위배되면 안 되는 원칙으로 상정된 민주주의라는 것이 최우선의 가치이고, 그것에 위배된 박정희는 일단 나쁘고, 잘못됐다고 저들은 입을 모은다. 그렇게 해서 사회과학은 물론 인문학까지 1960~70년대를 보지 못한 채 거대한 ‘아카데믹한 거짓말’, ‘학문이라는 이름의 사기(詐欺)’의 대열에 합류했다. 지금 학자입네 하는 이들과 젊은 학생들은 아카데미즘의 이런 주술(呪術)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3년 뒤면 박정희 탄생 100년인데, 이런 구조가 좋아질 가능성은 현재로선 거의 없다. 이건 실로 기이하고 기형적인 이 사회 지적(知的) 풍토의 차원을 넘어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의 문제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박정희 사후 35년인데, 박정희 반대로 가는 것을 개혁이자, 사회적 정의 혹은 한국경제의 나갈 길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다. 그게 너무도 견고해서 박정희 사후 30여 년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성장률이 바닥을 기어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외려 '박정희 반대로'를 상징하는 용어인 경제민주화가 우리사회의 대세로 등장했다. 그 결과 2012년 말 대선 때 여당 캠프에서 경제민주화 구호를 앞세우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걸 어찌 봐야 할까? 대세에 묻어가며 표를 얻어 집권하자는 고차원의 전략이었나? 인기영합주의에 두 손을 담그려 했던 바보짓에 불과했을까?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는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매우 의미 있는 저술이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호의적인 이들은 다음처럼 말하는 게 보통인데, 그런 인식조차 시원하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 박정희식 성공모델은 세계경제의 이단이었다. 성과내고 열심히 일하는 마을과 기업, 지역에 대한 차등지원과 불균형성장전략은 시장경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 성공신화는 세계경제의 일반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발전의 코리안 스탠더드가 될 수 있다. 역대정부는 박정희 사후 지난 30년간 박정희성공정책과는 거꾸로개혁하는데 골몰했다. 그 결과 경제는 저성장골짜기에서 헤매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마르크스주의적 분배와 형평, 경제민주화에 매몰된 탓이었다. 흥하는 이웃을 없애는데만 에네르기를 낭비했다. 지식인들과 경제학자들은 거대한 지적 사기극대열에 동참하기 바빴다. 박정희대통령 초상화.

“박정희는 문제가 많아. 특히 1972년 유신이란 절차적 정의를 무시했기 때문에 두고 두고 후유증을 남기고 있잖아. 10‧26 직전의 박정희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심신이 피곤하고 절제능력을 상실했다는 징후도 포착되고 있어. 어쨌거나 유신이라는 무리수 때문에 2000년대 지금의 좌우파 이념갈등도 있는 것 아냐? 다만 그래도 박정희가 열심히 일을 하려 했으니까 그 대목만은 약간 인정을 해주자고.”

그런 편의주의적 인식, 절충주의적 판단이 맞는 소리일까?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는 그런 통념을 뛰어 넘는다. 그냥 후한 점수를 주자는 호의가 아니라 박정희 식 한국경제 발전의 패러다임에서 세계경제의 일반 원리(general theory)를 발견하겠다는 야심찬 단행본이다. 책의 앞에 '하룻밤에 읽는'이란 말까지 달아놓아 이 책의 무게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지만(유감스럽지만 이런 게 우파적 성향을 가진 단행본들의 한계이고, 그래서 시장 진입에 애를 먹는다), 한 달 내내 읽고 숙성을 시켜야 책에 담긴 뜻이 온전히 해독되는 묵직한 저술이 맞다. 실은 '경제발전의 코리아 스탠더드를 찾아서'란 표지의 카피가 이 책과 잘 어울린다. "한국경제의 역사를 모르고 경제발전을 논하지 마라!"는 띠지의 카피도 이 책의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한국경제를 모르고 경제발전을 논하지 마라!"

이 책은 경제로 본 해방 이후사로도 읽히지만, 핵심은 개발연대의 성공방정식에 대한 분석이다. 개발연대는 한 마디로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고 믿었던 사회적 합의로 뭉쳤던 시기였다. 박정희 철학의 핵심이 그것이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에 뻗친다는 말대로 잘 나가는 소수에 대한 차별화 지원의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것이 포인트다. 후대는 그것을 불균형 성장 전략이라고 한다. 맞는 소리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이었고, 그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지, 전략이나 목표 같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정치의 논리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려는 습관이 있고,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로 흐를 여지를 안고 있는데 그걸 최고지도자의 의지로 막았던 게 개발연대의 최대 특징이다.

"정치는 내가 막을 것이니 임자들은(경제관료들은) 경제개발에만 전념하시오" 그건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 회고대로 박정희가 자주 경제관료들에게 했던 말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정치가 경제를 막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수출지원 제도가 그랬다. 수출기업이란 이유 때문에 균등 지원을 한 게 아니라 수출 실적이 우수하다고 검증됐기 때문에 차등 지원을 단행했고, 그래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지 말자.

지금처럼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균형과 사회적 형평이란 명분을 중시할 경우를 가정해보자. 인기영합주의에 이끌려 수출진흥 단계에 성공한 기업은 모두 배제한 채 무자격 기업 모두에게 균등 지원을 한다고 난리였을 것이고, 그게 사회적 정의라고 애써 포장을 했을 것이다. 실은 새마을운동도 정확히 차별화 지원책이었다. 가난한 마을이기 때문에 지원해야 한다는 건 인기영합주의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고, 모든 정치권이 그렇게 해야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아우성을 쳤는데도 박정희는 그 정반대로 갔다.

가난한데도 다른 마을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걸 증명해야 정부는 그제서야 우대를 개시했다. 그렇게 할 경우 당장 돌아올 정치적 불이익이 예견됐지만, 그런 인기영합주의를 정면 돌파할 때만이 경제개발에 비로소 성공한다고 박정희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 차별화 원리, 인센티브의 대원칙을 박정희는 새마을운동 초기에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내가 막겠다"는 말에 담긴 철학

"일은 하지 않고 노름이라 하고 술이나 마시고, 게으른 그러한 퇴폐적인 농어촌을 부지런히 일해서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농어촌과 똑 같이 지원해 준다는 것은 오히려 공평한 처사라 할 수 없습니다. 계속 성장한 부락은 조금만 더 지원해 주면 그 다음에는 정부에서 손을 떼도 될 것입니다. 물론 뒤떨어진 부락들은 불평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평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1972년 유신 직후 시작된 중화학공업 육성 전략에서도 차별화 원리가 가차없이 적용됐다. 파격적인 금융 및 세제지원을 검증된 기업에만 차등 지원했고, 그래서 극적으로 성공했다. 반복하지만 박정희 경제개발의 실체는 차별화 그리고 불균등 발전이다. 그런 박정희 경제운영의 일반 원리를, 아니 세계 어디에서나 적용 가능한 경제 성장의 일반 이론을 세상은 잊었다. 그 반대로 하는 걸 개혁이자 경제민주화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후 30여 년은 흥하는 이웃이 없어야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본 마르크스 세계관에 우리가 사로잡힌 시기라는 게 좌승희 박사의 견해인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이다. 경제민주화 조항이 헌법에 명문 규정된 것은 1987년 헌법 개정 당시로 우리는 알고 있다. 실은 제헌 헌법과 1962년 제3공화국 헌법 등에도 경제민주화란 용어만 등장하지 않지, 사회정의 실현 등을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를 한다는 식의 선언적 조항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8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무시할 수 없었던 신군부는 대기업과 재벌규제를 시작하겠다는 정책변화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가 재임 18년 간 성장과 차별화 그리고 불균등 성장으로 이 조항을 정면돌파하는 데 성공했다면, 전두환 정부 이후는 그걸 모두 잊기로 하고, 거꾸로 가기를 작정한 셈이랄까? 실은 그게 한국경제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예전의 활력을 잃고 기진맥진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게 좌승희-김창근 박사 두 분의 견해다. 책을 읽는 나도 십분 공감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를 읽으니 모든 게 명쾌해지고 앞뒤 맥락이 눈에 들어온다.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박정희 패러다임을 돌연 허물어버리는 작업을 시장경제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시행했던 게 5공(共)이었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김재익 경제수석을 포함한 사람들은 균형과 평등을 앞세운 경제 포퓰리즘의 기치를 처음으로 내건 장본인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내용은 우리가 기억하는 바와 같다. 그동안 경제개발의 수혜자인 30대 재벌은 물론 수도권과 대도시에 대한 각종 명목의 규제 시작, 소외된 중소기업과 지방에 대한 집중 지원책의 등장…. 이때 공업발전법을 제정해 모든 기업에 대한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산업정책이 첫 등장했다. 5공 초기부터 소득의 적정 분배, 균형발전 등이 경제운용의 기본 이념으로 등장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던 게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캐치프레이즈였다. 당시엔 그 국정목표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 하고 좀 얼떨떨했던 기억이 나는데, 실은 간단했다.

가진 자와 부자 그리고 재발, 대기업을 때릴 테니 서민들은 즐거워하라는 신호탄이었다. 이런 정책과 레토릭이 별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소수의 손을 묶고 취약한 다수를 지원한다는 게 얼핏 정의롭고 온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개발연대의 핵심 노하우에 눈 감은 정책이자, 박정희 식 경제개발의 패러다임을 허무는 참담한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이미 5공화국은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을 마친 상태였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전의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그건 요지부동의 국민적 합의였다. "이제는 가진 자들이 고통 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호언했던 게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경쟁력을 가진 기득권층에 대한 집단 이지매가 그처럼 강도 높게 표현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그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경제민주화가 옳은 노선이라고 믿는데, 이런 도그마에서 갇힌 상태에서 한국경제의 회생은 쉽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 저차원의 몰(沒) 역사적 인식으론 1960~70년대 개발연대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는 이런 미몽(迷夢)을 깨어나게 해주는 죽비 같은 책이 분명하다. 공저자 두 분에게 이번 기회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박정희 한국의 탄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