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치밀한 논쟁과 참혹한 비극이 동시에 펼쳐지는 남한산성의 풍광은 놀랍도록 장엄했다. 7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김훈 작가의 원작 '남한산성'을 영화화했기에 잘해야 본전이라는 시각이 만연했으나, 황동혁 감독의 묵직한 연출은 본전 그 이상을 해냈다. 극장가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시대극에 대한 피로감도 시원하게 잊혀질 정도였다.

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총 11장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서사다. 챕터 별로 각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를 전함과 동시에 주요 사건들을 짚는 '남한산성'은 정직하고 알이 꽉 차 있다. 별다른 자극적 요소 없이 정공법으로 승부한 작품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데 충실하면서도 결코 드라마성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드라마성의 기반에는 호국을 둘러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과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의 근사한 논쟁이 있다.


   
▲ 사진=CJ엔터테인먼트


김상헌은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최명길은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라고 맞선다. 각각 적화와 화친을 주장하는 두 충신의 말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 없이 설득력 있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있다. 특히 시국을 논하는 조정의 처절함과 위태로움은 380년이 지난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와 비교해도 다를 것이 없어 관객들의 몰입을 더한다.

배우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고 그 기골이 절정에 달한다. 전세가 기운 상황에도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의 강직함은 가슴을 들끓게 하고, 천하의 역적이 될 것을 각오한 채 인조(박해일)와 민초들의 생(生)을 구하려는 최명길의 충절은 눈시울을 얼얼하게 한다. 서로의 정치관을 존중하며 예를 갖추는 두 사람이 속사포 대사를 뱉어내며 뜨겁게 맞붙을 때, 이병헌과 김윤석의 미친 연기 내공에 한 번 압도당하고 눈물을 머금은 두 사람의 감정 시너지에 또 한 번 무너진다.


   
▲ 사진=CJ엔터테인먼트


150억원이 투입된 대작인 만큼 역사 고증도 훌륭하다. 여기에 세계적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의 섬세한 선율을 얹어 화룡점정을 찍었다. 좋은 영화는 정말로 많은 것을 고려한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효과적인 음악 사용은 남한산성의 비장미와 기품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남한산성'의 가장 큰 장점은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한국사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극이면 으레 등장하는 민족주의·감성팔이가 자취를 감춘 대신 위기를 대하는 조정의 모습과 나라의 결단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백성들의 현실을 가만히 조망한다. 원작을 바탕으로 탄탄한 전개를 선보이면서도 훌륭한 각색이 가미된 '남한산성', 5개월간 혹한기와 싸운 제작진·배우들의 고군분투가 아깝지 않다.


   
▲ 사진=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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