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박지성의 위대한 발자취...4강 신화 주역, 최초 프리미어리거, 맨유 멤버

 
'캡틴' 박지성(33)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박지성은 14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박지성 축구센터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현역 선수로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 박지성(33·PSV에인트호벤)이 14일 오전 경기 수원시 박지성축구센터에서 현역 은퇴 및 향후 거취 관련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그의 여자친구인 김민지 전 아나운서가 깜짝 방문,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뉴시스
 
2002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리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고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 등 화려했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지성은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다. 최고 자리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성실하고 겸손한 그의 모습은 축구인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1981년 2월25일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박지성은 수원 세류초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떡잎부터 달랐다. 박지성은 6학년 때인 1993년 세류초를 전국대회 준우승으로 이끌며 두각을 나타냈고, 그해 축구 새싹들의 꿈이었던 '차범근축구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찌감치 재능이 남달랐다. 그러나 청소년기 들어 장애물이 생겼다.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이었다. 
 
 안용중을 거쳐 수원공고에 진학한 박지성은 동기생들보다 키가 작고 왜소해 한계를 절감했다. 벤치에 앉는 시간도 많았다. 수원공고 1학년 시절에는 기본 훈련만 받았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부친 박성종(JS파운데이션 상임이사)씨가 개구리즙 등 몸에 좋다는 각종 보양식을 달여 먹인 결과, 1년 사이에 12cm나 키가 자란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됐다.
 
 1999년 명지대에 진학한 박지성은 그저 그런 선수였다. 실력이 매우 출중한 것도 아니었고, 주위 축구계의 배경이 탄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당시 허정무(59·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었다. 인연이 묘했다.
 
 2000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할 대표팀이 명지대와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이 경기에서 허 감독이 명지대 유니폼을 입고 뛰던 박지성의 플레이에 완전히 반했다.
 
 박지성이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2000년 4월5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라오스와의 2000아시안컵 1차 예선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어 6월7일 마케도니아와의 LG컵 4개국친선대회에서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 기세를 몰아 시드니올림픽에 당당히 출전했고, 곧장 일본 J리그에 진출했다.
 
 J리그의 교토 퍼플상가(현 교토상가)가 주전급 대우와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빠른 프로 데뷔는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2002한일월드컵을 통해 일취월장했다.
 
 거스 히딩크(68·네덜란드)감독은 주저없이 박지성을 한일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시켰고, 박지성은 맹활약으로 보답했다.
 
 월드컵에 앞서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연속으로 골을 터뜨리며 활약을 예고했다. 사실 국내 축구 팬들이 박지성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확실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기어이 본선에서도 사고를 쳤다. 16강 진출을 안심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려 한국의 사상 첫 16강을 이끌었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은 4강에까지 오르는 신화를 만들었다.
 
 주가를 한층 올린 박지성은 월드컵 이후에 히딩크 감독을 따라 네덜란드 프로축구 PSV에인트호벤에 입단, 유럽에 진출했다.
 
 입단 초기에 현지 적응과 언어 습득 등에 애를 먹어 부진했지만 네덜란드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팀의 주축들이 대거 빅리그로 이탈한 2004~2005시즌에 박지성은 전문가들과 현지 언론들의 예상을 뒤엎고 에인트호벤이 정상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여기에 2005년 AC밀란(이탈리아)과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유럽 무대에 강인한 눈도장을 찍었다. 박지성은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골 맛을 본 선수가 됐다.
 
 이 골은 맨유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73)감독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박지성은 2005년 7월 히딩크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맨유에 입단,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가 됐다. 퍼거슨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 속에서도 체력과 스피드, 넓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주전 경쟁을 이겨내며 맨유의 주축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박지성은 대표팀에서도 중심이었다. 2006독일월드컵 프랑스와의 조별리그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려 이름값을 했고, 각종 대회에서 팀의 중심 역할을 했다.
 
 2006~2007시즌 맨유가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도 경험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달려온 그에게 무릎부상이 찾아왔고, 결국 2007년 수술대에 올랐다.
 
 꾸준히 재활에 전념한 박지성은 그해 연말에 복귀해 이전과 다르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2008년 12월에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우승을 맛봤고, 2009년 5월에는 FC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서며 또 하나의 아시아 최초의 기록을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처음으로 알아봐 줬던 허 감독과의 인연도 다시 이어졌다. 
 
 2010남아공월드컵 지휘봉을 잡은 허 감독은 2008년 10월15일 아랍에미리트(UAE)와의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B조 2차전부터 박지성에게 주장을 맡겼다.
 
 대표팀 주장을 맡은 박지성은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과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사상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데 기여했다.
 
 조광래호로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다.
 
 2011아시안컵에서 다시 한 번 주장 완장을 차고, 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아쉽게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해 꿈을 접었다. 
 
 이것이 박지성의 마지막 A매치였다. 우즈베키스탄과의 아시안컵 3~4위전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박지성은 2011년 1월31일 축구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1년간 뛰었던 국가대표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지성의 A매치 통산 기록은 100경기 출전에 13골이다. 
 
 이후 선수 생활도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2012년에 맨유를 떠나 퀸즈파크레인저스(QPR)로 이적했다.
 
 2012~2013시즌 팀의 주장을 맡으며 어린 선수들을 이끌었지만 여러 가지에서 문제점을 드러낸 QPR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박지성도 함께 잠잠했다. 결국 QPR은 20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면서 챔피언십(2부 리그)으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다.
 
 박지성은 2013년 8월 에인트호벤으로 임대이적해 8년 만에 네덜란드 무대로 복귀했다. 과거 에인트호벤에서 선수로 함께 뛰었던 필립 코쿠(44) 감독과 함께 마지막 축구 인생을 보냈다.
 
 올해 2014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곤 대표팀 복귀설이 돌기도 했지만 박지성 자신의 완강한 거부 의사로 끝내 복귀가 성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