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갈등 심화 우려, 전산시스템 교체 차질도 심각

이건호행장과 이사진 모두가 패자가 됐다. 결국 IBM만 승자가 됐다.
KB은행 전산시스템 교체를 둘러싸고 이건호행장과 정병기 감사, 그리고 사외이사들간의 불협화음과 갈등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이사회내부에서 문제를 풀지 못하고, 결국 금융감독원에 특검을 요청하는 이례적인 일까지 벌어졌다.

이번 사태는 몇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첫째 은행장이 이사회의 결정사항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이사회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키고, 대외신뢰도를 추락시켰다. 콩가루 집안을 만들었다.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감사가 감독당국에 특검까지 요청한 것은 무리한 처사라는 게 은행전문가들의 중론이다.

KB은행의 전산시스템 교체작업은 최대현안인 비용절감과 선택의 폭 확대 차원에서 비롯됐다. 무리한 요구와 과다유지비용을 청구해온 IBM으로부터의 종속탈피도 주된 포석이다. 이사진은 지난해부터 IBM의 횡포를 막고 경쟁에 부쳐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놓고 고심했다. 모든 사안에는 장단점이 있다. 전산시스템의 경우 기존 IBM본체를 쓰느냐, 아니면 신한은행 등 다른 은행들처럼 경쟁입찰을 통한 유닉스체제로 가느냐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A와 B 모두 장점과 단점을 안고 있다. 단지 이 시점에서 IBM본체가 좋은가, 아니면 유닉스가 더 효율적이고, 비용절감적인가 하는 것은 선택과 판단의 문제다.

   
▲ 국민은행 로고
KB은행 이사진은 결국 충분한 토의와 검토를 거쳐 IBM과 결별하고, 유닉스체제로 가기로 했다.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 8명이 이를 찬성했다. 이건호행장과 정병기 감사만 반대했다. 8대2의 압도적 표결로 전산시스템 교체안건은 명쾌하게 결론이 났다.

그런 이사회 결의사항을 부인하고, 특검을 요청하고, 더 나아가 전산시스템 교체작업 중단을 위한 가처분신청까지 낸 것은 아무리봐도 지나치다. 충분한 숙려와 숙고를 거쳐서 이사들이 결의한 것을 이제와서 원상복구시키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이사회결의를 폄훼하면서까지 IBM을 사수하려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궁금하다.

   
▲ 이건호 KB은행장
이건호행장과 사외이사들간의 향후 행보도 문제다. 이번에 행장과 사외이사들간에 신뢰가 깨진 것도 큰 문제다. 이견과 반복 불화로 향후 경영 현안과 이슈에 대해서 신뢰를 바탕으로 충분한 토의와 의결이 이뤄질지 우려된다. 과거 어윤대 지주회장과 사외이사들간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ING생명 및 우리금융인수 등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번 사태가 그런 전철을 밟아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더구나 전산시스템 교체과정 결정에서 사외이사들의 리베이트의혹을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더욱 큰 불신을 가져오는 자충수다. 아직 유닉스업체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리베이트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사외이사들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키는 악수다. 이는 두고두고 이사진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것이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똘똘 뭉쳐서 험로를 헤쳐나가도 힘들 상황에서 사외이사들을 의심의 대상으로 만드는 악수를 둔 것은 아쉽기만다.

KB이사진은 허수룩하지 않은 전문가들이다. 역대 황영기 강정원 어윤대 회장 시절 KB은행 이사진들은 결코 회장과 은행장의 거수기가 아니었다. 허투루 이사를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척 깐깐했다. 까칠했다. 이런 사외이사들이 충분한 검토를 거쳐 결정한 사안에 대해 리베이트 의혹을 제기하면서 불신과 갈등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문제가 적지 않다.

KB은행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왔는가? 카드고객 정보 유출, 임직원 횡령, 대출부조리 등이 줄지어 터졌다. 내부의 환부를 도려내고, 개혁을 하려면 행장과 이사들간의 의기투합과 동지의식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정병기 감사의 행태를 보자. 정감사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휘젓고 다니면서 분란을 부채질하고,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모든 정의와 선은 혼자 독차지한 것처럼 천방지축이다. 그의 최대 문제점은 너무 튄다는 점이다. 물론 감사가 전산시스템 교체문제에 대해 이견을 갖고 감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이사회는 압도적인 의결을 거쳐 통과시켰다. 감사위원회에서도 별 하자가 없다고 의결했다. 그가 요청한 유닉스 도입 중단 안건 자체가 부결됐다. 그럼 이 문제는 종결된 사안이어야 한다. 그런데 감독원에 특검을 요청했다. 지나치게 튀는 감사다. 감사위원회에서 안건상정 자체가 부결된 것을 감독당국에 발설한 것은 중대한 법규위반이다. 제재를 받아야할 사안이다

   
▲ KB은행은 지금 위기국면이다. 고객정보 유출과 임직원들의 횡령과 부당대출 등 모럴해저드로 개혁과 자정을 통해 거듭나려는 중차대한 시기다. 이런 개혁와중에서 전산시스템 교체문제를 둘러싼 이건호행장과 사외이사들간의 충돌은 내분을 부채질하고, 대외신인도도 떨어뜨리고 있다. 이사회중심의 경영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사회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은행점포에 고객정보 유출과 관련해 사과문을 게시해놓고 있다.

다음으로 IBM의 한국적 영업방식을 보자. IBM은 한국에서 지난 40년간 한국기업들의 등골을 빼먹었다는 불만이 비등하다. 그래서 금융기관들이 대부분 IBM에 등을 돌렸다. 처음엔 시스템을 싸게 주는 것처럼 유혹해서 계약을 체결한 후 유지보수과정에서 비싸게 받아먹는 스타일이다. 금융계에선 IBM의 이런 영업행태에 대해 ‘포로’라는 말을 쓴다. 한국금융기관들을 싼 가격에 포로로 잡은 후 장기간 과도하게 유지비를 챙긴다는 것. IBM이 이번 교체과정에서 1000억원대를 제시했지만, 실상은 본체가격에 불과하다. 여기에 스토리지와 부대비용을 감안하면 2000억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정병기 감사는 이런 실체는 제대로 알리지 않은채 1000억원대 계약만 강조해 유닉스로 가면 무슨 흑막이 있는 것처럼 포장했다. 유닉스체제로 가는 것은 아직 계약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의계약으로 유닉스로 간다고 하는 흑색선전까지 벌인 것도 석연치 않다. 주요언론에 수의계약의혹을 퍼뜨리는 고도의 언론플레이까지 하고 있어 볼썽사납다.

금융기관들이 IBM을 포기하고, 유닉스로 가려는 것은 비용절감이 최우선이고, IBM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닉스로 가면 경쟁입찰이 가능하고, 전산시스템의 모듈화를 통해 부분교체도 가능하다. 그래서 비용절감을 중시해온 신한은행등은 일찌감치 유닉스로 갔다. 신한은행의 경우 IBM트라우마로 인해 신속하게 유닉스로 말을 갈아탔다. 국내 은행중에서 IBM시스템을 사용중인 은행은 우리은행과 KB은행 둘 뿐이다.

우리은행도 민영화하는 즉시 IBM과의 계약을 끊어야 한다. 전산시스템 통합을 위해서다. IBM은 이런 절박한 상태에서 KB은행장과 감사에 매달리는 것은 아닌지 의혹이 든다. KB은행마저 지키지 못하면 IBM은 한국비즈니스를 포기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 있다. 다른 성들을 다 빼앗긴 상태에서 최후의 ‘KB성(城)’이라도 지킬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은 아닌지...많은 은행전문가들이 IBM의 행태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다.

이건호행장은 청렴하고, 소신과 개혁이 있는 최고의 금융전문가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IBM이 왜 국내 금융기관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유닉스 채택시 비용절감이 가능하고, 전산시스템 선택의 폭도 넓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이건호행장과 사외이사들이다. 은행대주주인 지주사 임영록회장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 내부에서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를 감독당국이란 관군에게 SOS를 치는 것은 의아스럽다.

더 큰 문제는 KB은행에서 유닉스로 가는 것에 대해 이를 중지시켜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말 심각하다.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감사가 IBM을 위해 발벗고 도와주는 꼴이다. 당연히 의혹을 살 수 있다. 이행장은 사적인 메일로 IBM측과 이 문제를 협의했다고 한다. 이것 자체가 공연한 오해를 살 수 있다. 법원의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질지, 아니면 기각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법원에서 이 문제를 판단하는 데 통상 6개월가량 걸린다면, 내년으로 예정된 전산시스템 교체는 사실상 물건너간다.

KB은행은 지금 유닉스채택을 위해 오라클 HP등 다국적 전산업체들을 대상으로 입찰참가서를 받고 있다. 마감이 임박했다. 그런데 가처분신청을 냈으니, 업체들이 입찰 참여를 기피하고 있다. 이번 입찰을 준비해온 다국적 기업들은 BMT(벤치마크테스트)를 해왔는데, 업체당 30억원 가량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입찰이 중단되면 이것들도 은행이 부담해야 할 사안이다.
결국 가처분신청은 IBM과의 계약을 유지하기위한 고도의 전술(?)이 되고 말았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답답하다. 은행장과 감사의 오기와 고집이 이런 파국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이번 사태의 플레이어들은 모두가 루저가 됐다. 지주사에도 불똥이 미쳤다. 이 내분과 이전투구에서 최대 승자는 IBM이다. IBM으로선 한국의 마지막 성을 일단 지켰다. 씁쓸하기만 하다. [미디어펜=이서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