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의 치명적 약점, 왜 경제적 불평등 생기는 지 담론없어

오늘날 한국사회는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와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으로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려는 반자유주의적인 좌파 평등주의사고가 끝없이 충돌하고 있다. 

   
▲ ▲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겸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4월 21일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자유주의는 어떻게 경제성장을 가져오는가>라는 정책토론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역사는 대체로 자유가 없이 경제적 번영은 어렵다고 증언하고 있다.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의 보장이 경제적 번영의 충분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필요조건은 된다고 가르친다. 대체로 틀린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하지만 반자유주의 좌파들은 경제번영보다도 경제평등이 먼저라고 항변한다. 경제평등이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일 뿐만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은 그 자체로서 번영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좌파 반자유주의자들은 이 세상, 즉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칼 마르크스가 강변한 것처럼 가진 자와 못가진자간의 계급투쟁을 통해 전자가 후자를 착취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모순된 사회라고 보고 이를 교정하여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상사회 실현의 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가 초래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또한 그 자체로서 못가진 자들의 일할 동기를 차단함으로써 경제번영의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계 민주주의국가들은 사회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적인 노동자무력혁명이 아니라 민주혁명을 통해 평등사회를 실현하자는 사회민주주의가 선·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자유시장민주주의 보다 훨씬 높은 세상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정치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경제민주화”주장도 바로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유사한 개념인 셈이다.

이들의 공통된 이념적 가치는 “경제적 평등”이다. 한국인의 다수의 이념도 점차 “경제적 번영”을 버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경제적 평등”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표심에 눈치 빠른 여야당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를 부르짖고 대기업규제에 동참하고 동반성장에 동참하겠는가? 또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오늘날 한국 사회가 1% 부유층을 경제양극화의 주범이라 공격하는 운동이나 자본주의 4.0이라는 주장에 공분하고, 정의와 공정에 평등의 개념을 입히는데 혈안이며, 우파정부라는 이명박 정부마저 동반성장, 공생발전의 이념적 기치를 들었겠는가? “경제적 불평등”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적 산물이라는 좌파 반자유주의자들의 끈질긴 주장이 세상의 인기를 만끽하고 있는것이다.
 

그럼 시장자유주의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필자에게 비치는 시장자유주의진영의 대응에는 크게 세 가지의 아킬레스건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가 경제번영의 필요조건임을 열심히 항변하지만 이 시대의 화두인 “경제적 불평등”이 왜 생기며 해결책이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담론이 없다. 따라서 평등의 가치에 매몰된 청중을 끌어들이기에 역부족일 수밖에 없고, 경제번영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되고 만다.

자유가 번영을 가져온다면 왜 불평등은 생기는 지, 그리고 평등을 추구하면 결과는 어찌되는지에 대한 담론이 없으니 현실적 호소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아니라 “자유와 불평등의 가치”를, 그리고 불평등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사회인지를 당당하게 설파하고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는 멀어 보인다.
 

또한 이 문제는, 아무리 경제적 자유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고 경제번영의 미사여구만을 설파해온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 바로 자신이 남보다 번영할 수도 있으나 경제적으로 남보다 뒤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불평등은 경제적 자유의 결과로서 나의 책임이지 사회도 국가도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모순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임을 설파하고 설득하지 않은 결과가 오늘날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가 설 땅을 온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전후 수정자본주의의 등장도 바로 이런 이유와 무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모두를 번영하게 하지만 반드시 경제적 불평등을 수반한다.” “경제적 평등을 원하면 자유도 번영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설파해야 한다.
 

둘째로 한국에 있어서 또 하나 자유주의자들의 아킬레스건은 “박정희의 성공”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놀라운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은 좌파평등주의자들은 물론 시장자유주의자들로 부터도 자유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좌파들은 차치하더라도 시장자유주의자들 중에 박정희 시대를 자유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박정희 시대가 자유의 시대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 시대의 경제적 번영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한 가지 더 묻는다면, 지난 30여년간 박정희시대를 청산하여 정치·경제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그래서 선진경제를 앞당긴다고 노력한 결과, 오늘날 한국경제와 사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박정희 시대에 비해 일인당 소득은 10배 이상 늘었지만 저성장과 불평등은 더 심화되고 내수침체로 청년·고령실업이 증가하고 사회의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진영은 아직도 “자유의 패러다임”으로 박정희시대성공과 동시에 실패해온 지난 30여년을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좌파극복은 신기루가 되고 말 것이다. 

   
▲자유경제원이 4월 21일 주최한 <자유주의는 어떻게 경제성장을 가져오는가>정책토론회.

셋째로는 우리는 물론 전후 세계 민주주의 사회의 경험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만개가 반드시 경제적 자유의 신장에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자유주의자들의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정치적 자유를 내건 일인일표 민주주의의 만개는 반드시 민주주의의 또 다른 축인 평등을 강화하며, 나아가 표에 의한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표의 힘을 빌린 경제적 평등의 추구는 반드시 경제적 자유를 훼손할 수밖에 없으니 민주주의를 신처럼 모시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다.

이런 소위 포퓰리즘 민주주의를 방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자유주의는 여전히 고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자칫 자유주의의 무덤이지만 좌파 반 자유주주의의 낙원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칼 마르크스와 좌파의 평등주의를 극복하여 “다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지난 15년을 헤매온 한 자유주의자의 조그만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면 반자유주의 좌파극복의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유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유가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보다도 불평등이 더 원천적인 번영의 원동력이랍니다.”이 명제에 대해서는, 졸저, 좌승희(신국부론, 2006, 굿인포메이션; 이야기 한국경제, 2010, 일월담; 발전경제학의 새패러다임, 2011, 율곡; 경제발전의 철학적 기초, 2012, 서울대출판문화원)를 참조
 

   
▲자유는 재산권보호와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 번영을 가져왔지만, 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과 해법을 찾는데 심각한 아킬레스를 갖고 있다. 경제민주화 열풍이 부는 것도 국민들의 좌파 경제평등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으면 번영도 없지만, 번영의 더 큰 원동력은 경제적 불평등임을 설파하고, 불평등이 생기는 것은 사회적 모순이 아닌,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도 부각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유주의가 좌파평등주의에 맞서 이길 수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반기업적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경제민주화관련 토론을 주재하고 있다.

이 명제가 바로 박정희 시대의 성공은 물론 실패하는 오늘을 설명할 수 있고, 나아가 칼 마르크스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포퓰리즘 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모색의 핵심 명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소위 시장이라는 장치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바로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예쁘게 구는, 즉 우리의 구미에 맞는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과 개인들에게 더 많은 구매력(돈)으로 투표함으로써 우수한 경제주체들에게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장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의 원천인 셈이다. 필자는 이를 일컬어 시장의 경제적 차별화기능이라 명명하였다. 자유로운 시장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을 무기삼아 우리 모두를 부의 창출경쟁에 나서게 유인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가 번영을 가져오는 이유가 바로 시장의 원초적 기능인 경제적 차별화와 이를 통한 불평등 조장기능을 잠재적으로 더 강화할 수 있기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위 재산권의 보장이 번영의 길이라 하는데 이 또한 시장의 차별화기능을 증폭시켜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러한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경제적 불평등은 우리의 모순이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자생적 질서이며 이 힘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심지어 살맛나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사회는 경제적 하향평준화로 가는 죽음의 사회이며, 자유야말로 경제적 불평등 위협을 강화함으로써 모두를 번영의 길로 이끄는 수단임을 직시해야 한다. 자유의 패러다임보다도 “불평등의 패러다임”이 더 근본적이며, 심지어 더 자유주의적임을 이해한다면 좌파의 모순이 더 크게 보일 것이다. /좌승희  미디어펜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