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그릇된 작위(作爲) 삼가야 백성의 삶이 평안해져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14) - 지족의 인생철학, 무위의 통치철학 노자(출생 사망 미상) <도덕경(道德經)>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무(無)를 본(本)으로, 유(有)를 말(末)로 삼는 ‘귀무론’(歸無論) 사상체계 수립

노자의 철학은 중국 유교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교(道敎)의 시원이 될 만큼 심오하면서도 난해하다. 그가 쓴 5200여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중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서양 사회에서도 어떤 유가(儒家) 경전보다 더 큰 관심을 받았다.

노자의 사상은 운율을 갖춘 한 편의 시적 특성을 띄면서도 추상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후대에 수백 종의 주석서가 나온 이유를 잘 말해준다. <도덕경(道德經)>은 모두 81개의 장으로 이루어졌으며, 29개 장의 <도경(道經)>과 52개 장의 <덕경(德經)>으로 구성되었다.

많은 주석서 중 왕필의 <노자주(老子注)>가 가장 널리 읽힌다. 왕필(王弼, 226~249)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하안(何晏)과 함께 현학(玄學)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18세에 쓴 <노자주>가 중국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힐 만큼, 왕필은 유가와 도가, 주역학을 넘나드는 천재였다.

그는 노자 사상의 핵심이 “근본을 높이고 말단을 줄이는 것”(崇本息末)이라면서, 무(無)를 본(本)으로 삼고 유(有)를 말(末)로 삼는 ‘귀무론’(歸無論)의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왕필의 주석은 난해한 노자 읽기의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 복건성에 있는 노자 바위, Tom@HK 사진

◇ 일체의 꾸밈(作爲)을 경계하라

노자의 <도덕경>, 어떻게 읽어야 할까? 노자 읽기를 시작하기 위해선 우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아니 젖어있던 기성의 관념과 지식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노자는 중국의 전통사상의 중심자리를 차지한 유가적 관점을 과감히 깨뜨리기 때문이다.

노자는 유가적 교훈과 관념을 여지없이 전복시킬 만큼 삶을 보는 관점이 사뭇 달랐다. 공자와 같은 유가의 가르침에 경도되어있는 사람의 경우 노자의 ‘생각 뒤집기’는 무척 당혹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자는 <논어>의 첫 귀절에서 “배우면서 때로 그것을 익히는 것도 기쁘지 않은가?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오는 것도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1-1: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며 부단한 시습(時習)이 열락(悅樂)의 원천이자 군자의 제일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가히 호학(好學)의 종결자였다.

하지만 노자는 배움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강조한 도(道)는 학습으로 취득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 ‘꾸밈이 없는 사물과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일체의 인위적 노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세상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그 역시 가르쳤다(人之所敎, 我亦敎之). 하지만 그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억지로 따르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가에서 사회의 실천윤리로 강조한 예(禮), 인(仁), 효(孝)를, 노자가 인위적인 것으로 백안시(白眼視)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덕목으로서 ‘공부해라, 예를 지켜라, 인을 베풀라, 효도하라’는 유가의 요구와 가르침 자체를 노자는 인위적인 것으로 보았다.

당연히 해야 될 것으로서 행하는 것은 자연을 따르는 것이지만, 당위(當爲)의 덕목이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강조한 절대적 가치의 교의적(敎義的) 속성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배치된다고 인식한 것이다.

“대도(大道)가 없어지니
인의가 드러나고,
지혜가 나타나니
거짓도 생겨나게 되었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므로 효성이니 자애니 따지게 되고,
국가가 어지러워지자 충신이 등장하게 되었다
(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18장)

노자는 세상에서 인의와 지혜, 효와 충이 강조되고 있는 것 자체가 자연의 무위의 철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자연적 흐름에 순응하기 위해서 무위(無爲)를 강조했다. 무언가 억지로 하려고 애쓰지 않는 질박한 삶 속에 인의(仁義)와 효(孝)와 충(忠)이 저절로 구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의 관점으로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자연(自然)은 ‘대자연(大自然)’과 같은 물리적 세계가 아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천하만물의 흐름과 운행의 원리에 가깝다. 일체의 형식과 꾸밈, 인위적 노력을 배제한 ‘있는 그대로 모습과 속성’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공자가 형식과 본질의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며 문질빈빈(文質彬彬)을 강조하긴 했지만, 노자는 형식적 문(文)보다 질(質), 즉 본질과 본성을 휠씬 더 상위의 관념으로 강조한 셈이다.

노자의 ‘도’(道)의 관념은 형이상학적이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이 이름이 아니니, 천지의 시원에는 이름이 없고, 만물이 생겨나서야 이름이 있게 되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1장) 이렇듯 노자가 도는 말할 수도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고 말하는 만큼 도의 개념과 실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는 비어 있어서 아무리 써도 막히지 않고 깊숙해서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道沖 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4장)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명확하게 이름 붙여 잡을 수는 없지만, 만물의 근본이 되는 무엇인가가 도임에는 분명한 듯싶다.

나아가 노자의 여러 잠언을 통해 도의 소재와 추상적 속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어떠한 인식, 태도, 행동, 양상이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 무위(無爲)의 핵심은 ‘지족지지(知足知止)’

노자가 권면하는 인생철학은 무엇인가? 그는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등 감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탐하지 말라고 지적한다. “은총을 받거나 굴욕을 당하거나 놀란 듯이 대하고, 재앙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라(寵辱若驚, 貴大患若身)”(12장)는 말로 인생에서 은총과 굴욕은 같으며 영예로움과 걱정거리가 동일하다고 일깨운다.

이는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을 삼가며 중심을 잃지 않는 자중(自重)의 태도를 요구한 것 같다. 이는 무가 유의 시초가 되고, 다시 유(有)가 무(無)의 종말이 되는 순환적 사고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 노자의 초상, 만든 이 미상

 “완전히 비우고, 아주 조용함을 지키라.” 노자의 도는 비움과 무(無)의 철학이다. 이런 사고는 무위(無爲)의 관념으로 확대된다. “작위(作爲)할 수 없나니, 작위하면 실패하고 잡으려면 잃어버린다(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29장)는 것이다. 억지로 무엇인가 하려고 하지 말고 사물의 본성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자가 이렇게 무위의 철학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대목들은 마치 끝없는 욕망으로 스스로 고통 받는 현대인들의 교만을 질책하고 있는 듯하다.

발돋움하는 이는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고,
다리 사이에 물건을 끼고 있는 이는 제대로 걸어다닐 수 없고,
스스로 드러내는 이는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이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는 이는 공이 없고,
스스로 뽐내는 이는 오래가지 못하니,

도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먹다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 한다.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므로 도를 가진 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在道也, 曰餘食贅行.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24장)

노자의 잠언은 표면적으로 보면 역설과 모순이 가득하다. 하지만 가만히 음미해보면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굽히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아지고,
패이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며,
많으면 미혹된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敝則新,
少則得, 多則惑) (22장)

노자의 인간관계술은 무욕과 절제, 자기 인식을 강조한다. 특히 노자는 다른 사람을 아는 지혜보다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아가 극기(克己)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자족과 분수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남을 아는 이는 지모가 있으나,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명철하며,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으나,
자신을 이기는 이는 강건하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넉넉하고,
힘써 노력하는 사람은 뜻을 이루며,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이는 오래가고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33장)

노자는 “도는 낳고 덕은 기르니 사물은 형체를 이루고 기물은 완성된다(道生之而德畜之, 物形之而器成之)”(51장)고 말한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궁극적으로 만물을 낳는 시원이 된다. 도를 실천하고 완성해 나가는 길이 축덕(蓄德)의 과정이다. 도와 덕은 뗄 수 없는 표리(表裏)의 관계인 셈이다. 노자는 만물이 자생자화(自生自化)로 천하가 안정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개인이든 나라든 욕심을 내지 말고 자족(自足)할 것을 강조했다. 족함을 알고 그칠 줄을 아는 ‘지족지지(知足知止)’의 철학이다.

◇ 정치인의 그릇된 작위(作爲)가 백성의 삶을 어지럽힌다

특히 군사력을 동원하거나 복잡한 법령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치자가 먼저 무욕을 보이면, 백성들의 삶이 스스로 바로 잡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척 묵묵히 다스리면 그 백성은 순박해지고, 가혹하게 따지며 다스리면 백성은 교활해진다(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58장)는 것이다.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작은 생선 삶듯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하라(治大國若烹小鮮)” (60장)는 얘기도 결국 군주가 삼가고 고요해야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무리한 작위(作爲)를 경계한 맥락과 같다.

노자의 무위철학은 자연스럽게 부드러움, 물에 대한 찬탄으로 이어진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이나, 물이 최고선이라며 ‘상선약수(上善若水)’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600여년 전의 노자의 <도덕경>은 현대인에게도 하나하나 음미해 볼만하다.

쉬지 않고 아래로 흐르고 스며드는 물의 속성에서 노자는 순리와 무욕의 의미를 읽어낸다. 노자는 강한 것만이 생존을 보장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을 보여줌으로써 인간들의 무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욕망을 절제시키며, 자족의 자세와 질박한 항상심(恒常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노자의 무위(無爲)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달관의 경지에서나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노자의 오묘하고 난해한 통찰에, 복잡한 지식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무욕과 무위의 삶의 진리를 설파한 노자의 <도덕경>은 우리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느리고 질박한 삶’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추천도서 : 《왕필의 노자주》》,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한길사(2010, 6쇄), 395쪽.